제 5권. 구봉은 선비올시다

1586년(선조 19). 구봉 송익필(1534~1599)

by 북청로 로데



《경국대전》 <서얼 금고>라는 국법에 따라 송익필의 외조모가 계집종 출신이었다는 이유로 대과 응시가 금지되어 구봉은 향시에 급제한 것에 그쳤다. 송사련의 아들들에게 대과 응시자격이 금지된 것은 명종조에 들어서 신분 제한에 따른 입지가 좁아졌음을 보여준다.


신분에 따라 응시자격이 제한되므로 1559년 (명종 14)에 벼슬의 뜻을 버린 송익필은 구봉산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의 호를 '구봉'으로 칭하게 된 것도 구봉산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는 구봉산(현. 경기도 파주시 심학산)으로 거처를 옮기고 학문 연구와 인재 양성에 힘썼다고 한다. 구봉은 예학의 대가로 율곡 이이(1536~1584). 우계 성혼(1535~1598)과 깊은 교우를 나누었으며, 북인의 영수 이계 이산해(1539~1609)와 함께 당대 조선의 8문장가로 교류하였던 인물이다. 그런 구봉이 왜 정처 없이 떠돌며 몸을 숨기고 세월을 죽이며 지냈는지 궁금하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재판문에서 구봉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안가노안 安家奴案> 조선의 재판 판결문

°서책이 아닌 재판 판결문이다.

°조선시대 야사의 총서인 《패림》 가운데, 철종 때 '패림'은 96종 190 책으로 현재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고, 그중 하나의 글인 판결문이 <안가노안>이다.

°이것은 또 《아주잡록》에 <양천변별>이란 제목으로 실려있다.

°안가(安家)에서 송 씨 집안이 자신들의 노비라는 소송을 제기한다. 1586년(선조 19)에 일어난 사건이다.

°송 씨 집안에 구봉 송익필의 이름이 있다. (이제부터 얘기할 주인공입니다)

°안돈후가 죽은 뒤 100여 년 후에 사건이다.



※ 무슨 소송에 휘말렸던가?

1586년(선조 19)에 구봉(53세)의 집안은 안 씨 가문이 제기한 엄청난 소송에 휘말려 패소하면서 송가(宋家) 일문은 완전히 몰락한다. 일가 70여 명 모두가 안 씨 집안의 노비가 되어 버린 송사였다.

<안가노안>은 긴 판결문 전문이 내려오고 있고, 판결문 자체만으로 사건의 전말과 의미를 전달하는데도 사건의 서술이나 소략이 잘못된 것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지 않는 점이 의아할 정도라 한다.

검색창에 '구봉 송익필'에 대한 간단한 설명 문구가 잘못된 것을 지적해야 할 상황이다.




[안 씨와 송 씨의 가계도]

안돈후==중금(비첩. 계집종으로 첩이 됨)

(1대)

감정(얼녀. 안돈후의 딸)- 송린(가난한 양인)

(2대)

송사련==정 씨

(3대)

감전이. 송인필. 송윤숙. 송부필. 송익필. 송한필(4남 2녀)



안돈후===박 씨(정실부인)

안장. 안 총. 안당=이 씨. 김응기=녀(딸)

안처겸=이 씨. 안처암. 안처근

안로(처겸의 아들)=윤 씨. 안윤(안처암의 아들)=백 씨




이 소송의 여파는 기묘사화(1519년) 이후 일어난 신사무옥에서 비롯되었고, 동인과 서인의 극한 대립으로 1천 여 명이 죽게 되었다는 기축옥사(1589)로 이어지며 조선이 발칵 뒤집히는 사변이었다.





*송사가 있기 이전까지 일어난 사건이다.

기묘사화로 엇갈린 운명. 송사련과 안처겸.


{기묘사화-비부(계집종의 지아비. 여기서는 감정의 남편 송린)-보충대-송사련(송린의 아들)-역모와 고변(고발)-안처겸 옥사-상황 변화-송익필(송사련의 아들)-동인과 서인-율곡 이이의 죽음}


안처겸 옥사 이후 조선이 정치적인 변화를 겪은 시점에 송익필이 출생하였고, 훈구파 세력이 사라진 조정에 주류가 된 사림이 동인. 서인으로 갈라져 정계의 주도권을 두고 극한으로 대립했던 시대를 살게 된다. (송익필의 연한은 1534~1599이다.)


구봉의 증조부가 되는 안돈후 사후 3대 째를 맞이했던 시점이었다. 족보를 보면, 안돈후의 손자인 안처겸은 송익필의 아버지 송사련과는 성이 다른 형제가 된다. 그런데 안처겸의 옥사에 송사련이 깊이 연관되어 있었으니 그 악연이 후일 안처겸의 아들 안로에 의해 준비된 소송으로 얽히게 되는 사건의 발단이다.


*《동소만록》에는 송사련이 네 임금을 섬기면서도 아무런 잡음이 없었다고 기록했다. 또한 일에 재주가 있어 집안의 대소사를 기록하는 일을 맡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는 기묘사화가 일어난 1519년(중종 14)에 음양과에 합격하고 2년 후인 1521년 7월에 판관이 된다. 그와 대조적으로 안당의 세 아들인 안처겸. 안처함. 안처근은 공신 반열인 조부 안돈후의 위세로 재능이 없는데도 현량과에 일거 특채되었다고 문헌으로 전한다.


안 씨와 송 씨 가문의 운명을 끌고 갔던 큰 사건은 바로 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였다.

기묘사화는 갑자기 커져버린 조광조를 필두로 한 사림의 세력이 실각하는 사건으로, 반정으로 옹립된 중종이 사림을 대거 기용하여 조정의 훈구파를 견제함과 동시에 자신의 입지를 확장하는데 사림을 이용하고 토사구팽 했다는 것이다.


기묘사화로, 조광조는 처형되었고 연관된 인물들은 유배를 보내는 선에서 마무리되었으며, 안당의 세 아들(안처겸. 안처함. 안처근)의 현량과 합격이 취소되고 품계가 박탈되었다. (1521년 9월의 일이다.)



거사와 처벌의 과정은 이렇다.

-사화로 세력이 꺾인 이들은 구심적 장소로 안가(安家. 궁궐 옆 삼청동 소격서동에 안처겸의 본가가 있었다.)에서 모였다.

-시산부정 이정숙(시산정)이 안처겸 사이에 거사를 논하였다고 22차례의 고문으로 자백한다.

-집사격인 송사련이 사안의 중대성을 간파하여 1521년 10월 11일 처남과 함께 법사(法司)에 나가 고변을 한다. "대신들을 거사할 계획이 논의되고 있고..."

-이 밀고는 승정원을 통해 왕에게 보고된다.


이 일에 연루된 인물에 안처겸. 안처근. 안당까지 안 씨 가문의 세 사람이 능지처참과 가산 몰수를 당한다. 반면, 거사를 밀고한 송사련은 (얼손이었으나) 절충장군 품계와 당상관에 오른다.


여기까지 기묘사화와 관련된 일처리가 일단락되지만, 정계의 상황이 변하면서 김안로의 죽음 이후 변화가 일어났다. 홍문관의 전한 과 김광진이 '조광조의 처벌에 대한 절차상의 문제 제기와 기묘사화 피해자의 사면 복권에 대해 상소를 올린다. 그에 따라, 중종은 유배된 현량과 출신들을 사면하고 벼슬을 복원시킨다. 드디어 1540년(중종 35) 안처겸이 사면되었고, 1566년(명종 21) 안당과 삼부자 모두 정말 복권된다. 게다가 1575년(선조 8) 안당에게 "정민"이라는 시호를 하사한다.






송익필은 어쩌다 서인으로 분류되었나?

사림이 동인. 서인으로 갈리지고 극한으로 대립하여. 동인의 대척에 서면 서인이 되는 형국에까지 이르렀다.

송익필의 교우 율곡 이이의 동서 분쟁의 조정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를 서인의 영수로 보았다.

우계 성혼의 절친 윤두수가 대표적인 서인의 영수였고, 이이의 편에 섰다는 이유로 영의정 박정도 서인이 되어버렸다.

혈통상 연좌보다 더한 이유를 붙여 서인으로 분류하고 동인과 서인을 철저히 분리하는 씁쓸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그러다 보니 율곡과 성혼의 교우인 구봉도 서인으로 분류되었다.


어찌하여 하늘은 그대에게 따뜻. 넉넉. 화목. 풍류. 깨끗. 시원. 소통의 바탕을 내리고선 할아비로 늙어갈 목숨의 여유는 함께 주지 않았단 말인가? 어찌하여 하늘은 그대에게 어짊. 공감. 정성. 차분. 포용. 순수. 정밀의 학문을 이루게 하고는 세상에 펼칠 복은 더불어 베풀지 않았단 말인가?
-율곡을 장사 지내는 글 시작 부분-
글. 구봉 송익필





시절이 달라지고..

안처겸의 아들 안로의 치밀한 준비의 시작은 책을 집필하는 것이었다.

《기묘록 보유》란, '기묘록'에서 빠뜨린 내용을 보유하여 완성하였다는 뜻이다. 그리고 '기묘록'은 사재 김정국 (1485~1541)이 쓴 《기묘당적》을 말하며, 이 책은 중종조 말기에 완성되어 명종 때 유통되었다. 그리고 안로가 쓴 《기묘록보유》는 《기묘당적》에 기반해서 쓴 기록인 거다.


세상이 바뀌었다.


"조정의 관원이 붕당을 결성하여 조정을 문란하게 한 경우에는 모두 참형에 처하며, 그 처자식은 노비로 삼고 재산은 몰수한다."

《대명률》 <이율>에 '직제 간당'-


명종 말부터 선조 연간에 동인이 정계의 주류를 차지했다. 율곡이 죽은 해인 1584년에 안로가 쓴 《기묘록보유》가 완성되고 유통될 정도로 《기묘당적》이 성리학자들이 고초를 겪은 명부가 되어 있었다. 즉, 붕당의 죄를 지은 붕당 죄를 두려워하지 않는 세상이 되고 이 조항은 완전히 사문화되었다.



안로의 의도

《기묘록 보유(약자로 보유)》 가 지향하는 바는 《기묘당적》에 실린 이들의 구분을 없애고 신사무옥 관련자들 이름을 기묘당적에 얹어 그들 모두를 기묘사림으로 만들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꼼꼼하게 살펴보면, 《기묘당적》에서는 안처겸의 사건의 실체를 부정하지 않았고, 송사련은 전혀 언급이 없다.


내용상 안로 1인 저작으로 보는 《기묘록보유》. 《기묘록속집》. 《기묘록별집》에 기록 방식은, 《보유》는 《당적》의 기본 구성을 따르는 방식이고, 《별집》은 상소 몇 편을 모아 놓았고, 《속집》은 안로가 구성하고 저작 의도를 담았다.


즉, 후반부에 <주간죄목>, <화매>를 배열하고 사화의 매개자로 송사련의 이름을 등장시킴으로써 '악인전'과 다름없었다.

게다가 《속집》에는 보유를 총망라한 내용으로 전(传)을 실었다. 그 가운데 '송사련전'에는 시작부터 "감정을 노비 중금이 안돈후에게 오기 전에 낳은 딸이라면서 어려서부터 행실이 나빴다"로 서술했다.




안 씨 집안(安家) 소 제기


《기묘록보유》와 《속집》이 완성 유통된 이듬해. 1585년(선조 18) 말엽에 안 씨 집안에서 소송을 제기한다.

실무는 안 씨 집안의 서얼로 승문원 역관이었던 안정란이 맡았다. 그는 "송사를 일으켜 송 씨 집안을 노비로 삼겠다."라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녔다.


그들의 자신감은,

*사회 분위기의 변화

*안당의 찬란한 복권(1566년. 명종 21)

*치밀한 소송 준비

*정치적 이이의 죽음과 동인의 기세 등등

*안정란 자신에 재능에 대한 자신감



◇ 사건의 핵심은 감정의 속량 여부

송사련의 모친 감정이 얼녀(노비)의 신분을 속량 받았는지 여부가 핵심이었으나 이미 100년도 더 된 일이었다.

안처겸의 옥사만 해도 십 년이 넘은 사건으로 '소멸시효가 지난 일이면 접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조항이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보충대>

안돈후는 정 4품 성균관 시예로 비첩과 사이에서 태어난 딸 감정을 양인으로 만들고 싶었을 거다. 조선 법전에 '보충대' 제도는 양인이 되는 경우를 제시했다.


○종친과 혼인하면 어떤 절차도 필요 없이 자손이 천해 지지 않는다.


○2품 이상의 고관의 경우. 그의 천첩을 여종을 대신 장예원에 신고하고 노비 면제가 가능하고 그 자손들은 양인이 된다.


○보충대 입속 하는 방법으로 양인이 된다.

그 절차는, 양인이 되는 것을 신청하면 > 장예원에서 사실 조사 확인하여> 보충대로 이첩하여 증명과 입안을 발급한다> 이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양인이 되지 못한다.


소송에서 송가(宋家)는 송사련(감정의 아들)이 태어나기 15년 전이던 1481년(성종 12)에 감정이 보충대에 입속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소송에서 안가(安家)는 그런 사실이 없다고 맞섰다.



{송 씨 가문이 노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 씨 집안의 족보를 포함한 수많은 증거들을 11가지로 정리하여 제시한다. 거기에 안돈후의 서녀 사위, 외손 절충장군 송사련, 외증손 송인필, 외증손녀 사위 한원수(이는 종손이다)까지 아들부터 딸까지 족보에 다 실어놓은 기록이다. 이후의 족보에 송린과 송사련, 송익필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감정이 안돈후의 딸이란 사실은 명백하다. 이처럼 송 씨들을 노비로 보지 않았다는 확실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1586년 6월 25일에 결정을 내리라 명하였고, 7월 5일 판결이 선고된다.}


"감정(안돈후와 비첩 사이에 출생한 딸)이 속량 하지 않았으니 그의 후손 모두가 안 씨 집안의 노비이다. "




동인의 기세가 등등하고 사회적 분위기와 소송을 진행하는 장예원의 판결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9월 7일 송사련의 관직이 삭탈되고 그가 오른 모든 관직에서 자취를 없애야 한다는 결정에 따라 12일에 시행되었다. 이로써 송사련에 관한 공식 기록이 다 사라졌으며 명문가가 처절하게 몰락하였다.




구봉 나이 53세에 <안가 노안> 소송에 패하며 70여 명의 식솔들이 갑자기 노비가 되는 변을 당해 가족들은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구봉은 1599년(선조 32) 8월 8일 마양촌에서 66년 생을 마감했다.


그렇게 흩어져 있던 그의 글을 모아서 1622년(광해군 14)에 그의 글 5권을 엮어 시집을 간행했고, 1751년(영조) 정 5품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고, 1762년(명조 38) 《구봉집》을 편찬하면서 동생 송한필의 문집 《운곡집》도 덧붙였다.

1910년(순종 7) 조선의 마지막 왕조에서 구봉을 당상관 규장각 제학으로 추증하고, 문경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조선의 마지막 선비 황현(1855~1910)이 송익필을 조선의 대표 시인으로 기리는 시로 그의 이름을 기억했다.



소감


독서를 마친 날이 현 시국과 맞춘 듯 1월 26일 늦은 밤으로, 다음날 27일 정경심 대법원 판결이 선고되는 날이었다.

구봉 송익필의 한 많은 인생을 읽은 뒤라 내일 그녀의 재판을 듣지 않아도 결과가 예감되었다.


정의가 없는 법을 다루는 이들은 스스로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마치 동인의 나라가 되면 동인의 법이 되고, 훈구의 나라이면 훈구의 법이 되었던 게 조선의 법으로 변신했던 것처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땅에 버려져 사람의 발에 밟힌다.'라고 했다. 포도주의 맛도 산패되면 쏟아 버려야 한다. 맛을 잃은 음식들에 감미료를 치고 방부제를 첨가해야만 되는 음식이 먹거리로 식탁에 오른다. 정의가 밥상에 올라오는 흔한 밥이고 반찬이면 누가 억울하고 한 맺힌 생을 살아갈까...





눈앞 가득한 창칼은 세상 어디에나 마찬가지

뜻밖에 오게 된 솔 아래선 맑은 바람 들리니

어느 가지에서도 새는 편히 깃들지 못하나니

삼고초려는 언제 있어 누운 용을 일으키려나

<소나무 아래 모여 술잔을 기울인다>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 몇 곳을 보면


송시열의 [구봉 선생 송공 묘갈문]에는, 홍경신이 그의 형 가신이 천한 인물인 구봉과 사귀는 것을 탐탁지 않아하다 그를 만나면 기필코 욕을 보이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송익필이 형네 집에 찾아왔을 때 마루에 내려가 정중히 절하였다고 한다.



[겸재집]에 실린 김류(1571~1648. 인조 때 재상)와의 만남에서도..."내가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그날 구봉께서 몸소 차근차근 가르쳐주신 덕분이다."

'제갈공명을 보고 싶으면 송구봉을 보면 된다'라고 평가


《삼현수간》 우계 성혼, 율곡 이이, 구봉 송익필 사이에 주고받은 서찰을 엮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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