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대집》 이가환 (1742~1801)
무지불통의 인물이었던 이가환의 역력
-1777년 영조 47. 진사시에 합격
-1780년 39세에 비인 현감이 되었고,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돌아올 때 회자되었던 천주교 서학에 관심과 우려를 가지고 이벽과 논쟁.
-1786년 45세에 정주 목사에 부임.
-1787년 이곤수의 서계로 파직되어 김화(金化)에 유배됐다.
채제공의 후계자로 지목될 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었으나 반대파의 적이 되었다.
-1791년 윤지충의 진산 사건으로 천주교인들이 비난받자 그를 남인 신서파의 영수로 지목하여 광주 부윤으로 좌천했다.
-1795년 정조 정책으로 채제공. 정약용 등 규장각 출신들이 대거 등용될 때, 공조 판서가 되어 화성 축성 사업에 참여했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반대파의 공세 이후. 1801년 신유박해에 연루되어, 2월 24일 옥중에서 절명했다.
1장. 기록의 이유
배움을 위해 사람만 한 좋은 교재가 없다.
2장. 우리 시대의 문학
이가환 당시의 '우리 시대의 문학'에 대한 담론이다.
3장. 정조와 대화하다
대책과 논의에 대한 글이 기술된 《금대전책》에서 정조가 제시한 시정 문제에 이가환이 대답한 기록에서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4장. 그에 대한 평가
이가환에 대해 말하자면, 일찍이 집안의 운수가 좋지 않은 것도 아니었는데 백 년 동안 벼슬길에서 밀려나 수레바퀴를 깎고 구슬을 꿰듯이 학문과 문학을 연마하여 스스로의 분수를 나그네나 촌사람으로 자처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