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책상머리에 붙들어놨다지만 마음은 목련나무 아래를 지나, 매화꽃 가득한 저수지 주변을 돌고 돌아, 무스카리. 크로커스. 수선화. 히야신스까지 땅 위로 꽃대를 올리고 있는 양지바른 언덕에 시선을 던졌다가, 부정확한 웅웅대는 소리로 날갯짓하는 벌들의 봄 꿀 채취 소리에 눈과 귀가 멀 지경이 되니 떠돌아다니는 마음을 억지로 불러오고 싶지는 않다.
몸과 마음이 나뉘고 산만해지는데도 짧은 오늘의 봄에만 집중하고 싶다. 어차피 이번 봄도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서 봄이 나를 흔들기 전에 내가 먼저 얘기하겠다. '나는 봄에 흔들리겠다'라고.
흔들리기만 할 뿐인 봄날이 돌아와서 다행이다.
사흘 전에는 비가 내렸고, 이틀 전에는 바람이 불다가 해가 좋아 두꺼운 겉옷을 한 꺼풀 벗었으며, 어제는 바람도 없는데 찬 기운이 옷 조직을 뚫을 기세로 써늘했는데, 오늘은 어떤 변덕을 부리며 등장할지 몰라서... 그저 마음씨 좋은 친척처럼 '오냐'하고 넙죽 안아줄까 궁리하고 있다.
자주 많이 봄에 휘둘려도 꺾이지 않을 유연함으로 나의 생각과 마음자리를 개간해보라고 예고 없이 스윽 도전장을 내미는 계절이다.
매화꽃
매화꽃 피는 봄날에도,
이용휴(1708~1782)는 초가집 마루에 앉아 봄이 와도 사고에 밴 습성을 따라 '나는 누구인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철마다 되묻는 인물이었다.
조선 시대에 명망 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굳이 서얼허통으로 조정에 인재로 발탁되어야 하는 신분의 제한을 받았던 것도 아니었다. 그의 집안은 조부 대까지 조정에서 활동했던 남인계의 명문가 자제이자 성호 이익의 조카이다. 그러나 이익의 형 이잠이 숙종의 친국으로 죽은 이후 역적의 가문으로 낙인찍혀 내몰린 이후 그는 관직에 뜻을 접어야만 했다.
조선 정조 대에 이르러 능력 있는 인재를 두루 등용해서 국정을 이끌었던 정책에 의해 혜택을 입은 인물은 그의 아들 이가환이었다. "이가환?" 이. 가. 환! 그렇다 이가환은 앞전에 읽었던 <금대집>의 저자이며 혜환 이용휴는 바로 그의 부친이다.
"벼슬에도 나가지 않은 신분으로 문단의 저울대를 손에 잡은 것이 30여 년이었으니, 이는 예로부터 유례가 없는 일이다."
정약용은 이용휴를 두고 이른바 재야문형(在野文衡)의 탄생이라고 극찬했다.
*재야문형의 기원은 이렇다.
인문을 숭상했던 조선에서 시대의 문장을 평가하고 계도하는 일은 국가의 중대한 일로서, 홍문관과 예문관의 책임자인 대제학이 담당했다. 즉 '저울대를 잡고 물건의 경중을 가리듯 문장의 고하를 판정하여 인재를 등용하는 직책'이라는 의미의 '문형'이라는 별칭을 뜻한다. 그러기에 자신의 문장을 인정받으려는 사람들은 으레 권세자들에게 가는 것이 당연해진 환경이었던 때. 서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사대부의 자제들도 그의 글을 애호하는 지경에 이르자 그를 근심거리로 치부하는 학자들이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노론의 심노승은 <선부군언행기>에서 이용휴를 두고 '간사하고 방종한' 인물이라고 비평하기도 했다.
심노승의 고약한 비평과는 달리 '간사하고 방종한'이란 뜻은 무엇보다 '참신한 발상'의 글이라고 평가되어야 한다.
그것은 당시 통념에 균열을 가져다주는 작업이었으나, 이용휴의 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평범하고 소박한 일상을 벗어나지 않고 그 속에서 끌어올린 깨달음은 늘 자신의 내면을 향했다.
그의 글은 당시 주자학과 성리학 일색의 문장을 표준으로 삼던 글을 벗어나서 통념을 깨트렸다. 그것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알을 깨트리고 아닌 것들을 걷어내어 참된 것을 끌어올리려는 재야문형의 삶을 보여준다.
유만주의 <홍영>에서 그에 대해 이렇게 비평했다.
"이 사람의 문장은 지극히 괴상하다..... 일반 사람들과 매우 다르게 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진실로 병폐이지만 한편으로는 기이한 점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한 서책은 매우 방대한데 모두 기이하고 독특한 것들뿐이고, 평범한 것은 한 종류도 없다. 그의 기이함은 실로 천성에서 나온 것이다."
봄까치꽃(큰개불알풀)
보라꽃을 피워도 불러줄 이름을 알지 못하던 나는 풀 나들이하듯 검색창에서 닮은 사진 찾기로 사진의 풀에 대해 알아냈다.
봄까치꽃
잔디처럼 무더기를 이루어 넓게 퍼져있는 이 꽃의 크기는 3~4mm, 꽃의 지름은 8~10mm이며, 영어명은 bird's eye인 작고 잔잔한 이 풀은 길가나 빈터 습한 곳에서 성장하며, 부드러운 털이 있는 가지는 여러 갈래로 갈라지며 생장하고, 경작지 언저리가 최적지로 한 포기당 6천 개의 종자로 번식하는데, 개미들에 의해 분산되기도 하지만 이른 봄 농부가 밭갈이를 하는 땅에서 잘 자란다.
알고 보면, 봄까치꽃(풀)은 사람들이 간섭하는 땅을 좋아하고 비옥한 곳에서 잘 자란다. 여린 잎은 뜯어서 나물로 먹을 수 있고, 작은 꽃은 따서 그늘에 말린 뒤 은은한 향을 내는 꽃차로 마실 수 있다.
봄까치꽃의 꽃말은 봄과 너무 잘 어울리는 '기쁜 소식'이다.
세상이 뒤집어져도 '기쁜 소식'은 들판에 지천으로 널려 있으니 너무 낙심하지 말고 살라는 위로의 풀이란 생각이 든다.
* 이용휴의 30여 년 재야 문형의 삶. 당시 도처에 널려 있던 것들은 소박하고 평범한 것은 21세기 시골에 흐린 잔상처럼 남은 흔적만으로 추정할 뿐이다. 비범하거나 소박하거나 사람 사는 세상에서 중요한 주제는 아마도'잘 먹고 잘 사는 것'일 텐데.
드라마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남주 임은섭이 운영하던 '굿나잇 책방' 이름을 알 수 있는 대화에서도 먹고사는 것에 대해 나온다. 책방에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서 해원이 물었다. "책방 이름이 왜 굿나잇이야?" 하릴없이 책 정리를 하던 은섭이 대답했다. "잘 먹고 잘 자는 거.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다들 그 기본적인 것도 못해서 힘들어하잖아. 그러니까.. 부디 잘 먹고 잘 잤으면.. 그런 마음에. (굿나잇 책방이라고 이름을 붙인 거지)"
자신의 능력을 맘껏 발휘하는 것도 잘 먹고 잘 사는 삶이고, 재야에 묻혀 찾아오는 문인들과 벗들과 교우하며 자연에서 자신의 인성을 수양하는 것도 잘 먹고 잘 사는 삶이다. 삶의 질을 하나의 잣대로 나눌 수 있는 삶이 처음부터 있던 것처럼 인간의 삶을 나눗셈으로만 본다면 모두가 행복할 수만은 없을 거다.
그는 다음의 일화를 전하고 있다.
충청도 문의면 일대를 흐르는 형강( 荊江. 지금의 금강)에 좋은 풍광이 있는 곳에 은거하는 권처사 라는 친구가 살고 있었다. 그는 늙은 육신을 편안히 쉴 장소로 생각하여 팬액을 낙소(樂蘇. '소소한 것을 즐거워하다'는 뜻)라고 했다. 즉, '소(蘇)'라는 단어는 땔나무(艹) + 생선(魚)+쌀(벼 禾) 세 가지를 합친 글자로 사람이 날마다 쓰는 생필품이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즐겁게 사는 것의 소중함을 담았다.
작은 것에서부터 '있음'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면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가장 평범한 것이 특별하다'는 사실을 배울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오래된 살구나무 아래에 작은 집 한 채가 있다. 방에는 횃대며 시렁과 안석이며 책상 같은 것들이 3분의 1을 차지한다. 손님 몇 사람이 오기라도 하면 무릎을 맞대고 앉아야 하는 너무도 좁고 허름한 집이다. 허나 주인은 이 집을 편안히 여기며 독서하고 구도할 뿐이다."
- 이용휴 지음/ 박동욱. 송혁기 옮기고 씀. / <나를 찾아가는 길> 26에서 인용 -
좁고 허름한 집 안에서 종과 횡, 앞과 뒤로 몸을 돌리면 시야에 들어오는 바깥 풍경들이 얼마나 다채로운지를 배울 수 있다고 한다. 즉, 사람은 생각 한번 고쳐 먹고 몸을 조금 움직일 때마다 사물과 명암이 바뀌는 것에서도 삶의 이치를 깨닫는다. 그러니 몸의 움직임이 크고 작으냐에 의미보다, 관성적으로 행동하려는 본성을 버림으로써 한 뼘이라도 변화를 향해 전진하라는 격려의 의미일 것이다.
저 노란 민들레를 보라.
한 겨울 동안 낙엽 아래 컴컴한 흙 속에서 없는 듯 파묻혔다가 때가 되면 거침없이 땅을 밀어내고 올라온다.
민들레는 저렇게 변화에 발버둥 치지 않고 서슴없이 자신의 모습을 바꾸고 나타난다. 변화다.
사람은 몸통과 꽃대가 한 몸으로 활동하는 민들레에게서 배울 게 많다. 봄이 시작되면 땅 속에서 탯줄에 생명을 의지하고 웅크렸던 잎과 꽃이 한 몸으로 흙을 밀어 올리고 나타난다. 기온이 수시로 바뀌는 요즘 같은 날에도 민들레는 햇살을 잘 받는 양지에서 꽃을 피운다.
주로 4∼5월에 노란색으로 피고 잎과 길이가 비슷한 꽃대 끝에 두상화(頭狀花:꽃대 끝에 꽃자루가 없는 작은 통꽃이 많이 모여 피어 머리 모양을 이룬 꽃)가 1개 달린다. 꽃대에는 흰색 털이 있으나 점차 없어지고 두상화 밑에만 털이 남는다. 뿌리는 길이가 7∼8.5mm이고 봄에 민들레 어린잎을 나물로 먹을 수 있다. 열로 인한 종창· 복막염· 급성간염· 황달 등에 효과가 있으며 소변을 못 보는 증세에도 사용한다. 민간에서는 젖을 빨리 분비하게 하는 약재로도 사용한다.
그래서 봄이 돌아오면 민들레는 뿌리부터 꽃대까지 모든 것이 사람에게 요긴한 먹거리와 약재로 쓰인다. 부지런한 사람은 봄바람에 취해 들판으로 야산으로 노랗고 하얀 민들레를 찾아다니느라 맘이 급할 것이다. 소쿠리 가득 뜯은 민들레 나물로 배를 채우기도 하거니와 먹은 그것으로 아픈 몸이 낫게 된다면 민들레의 쓰임새는 쓸모 없는 게 없다는 말의 뜻을 알려준다.
이용휴의 산문은 <혜환잡저>에 총 338편과 여러 문헌들에 29편을 합쳐 총 364편이 전해진다. 그의 산문선 가운데 46편을 선정하여 박동욱. 송혁기 옮기고 기록하여 <나를 찾아가는 길>로 출간했다. 이 책을 참고로 고전 읽기를 도전했으며 정리하는 동안 봄날과 같은 그의 소박한 글에 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