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미터 80센티미터 가까운 키에 가늘고긴 몸에 뚜렷한 이목구비. 잿빛이 감도는 초록 눈의 칠십 대 바비 할머니의 호주 동남쪽 산속 집. 차는 계속 산 위쪽으로 움직이다 등정 포인트에 도착한 듯 기다란 집 입구에 멈췄다. 울타리가 없는 입구는 돌밭 같은 비스듬한 정원이 있고, 정원 옆으로 식수(植樹)한 지 얼마 안 된 어린 묘목 앞 철망 울타리가 약간 찌그러져 있었다. 어린잎을 뜯어먹은 흔적에 바비는 “포섬이 먹고 갔나 본데... 이것도 수리를 해야겠군!”이라고 한 마디 던지고 지나갔다. 2003년 여름 가나안에서 휴가를 받아 일주일간 피정을 갔던 바비 할머니 댁에 입성할 때 기억을 떠올린다.
"바비, 저한테 어울릴만한 성경 이름이 있을까요? 한번 생각해보시고 정해주실래요?" 물론, 그분은 매주 화요일마다 나에게 영어를 가르쳐주고 계셔서, 나는 이만한 부탁 정도는 할 만한 사이라고 생각했다. 집에서는 대부분의 시간을 거실에서 벽난로에 장작을 태우며 요새 하는 말 그대로 '불멍'하며 한가하게 보냈다. 그곳 거실 사이드 책장에는 유난히 존. 녹스에 대한 책들이 많이 꽂혀 있었다. 바비의 설명으로 존 녹스(John Knox)가 당신의 패밀리 트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이런 일이~ 기독교 역사책에서나 들었던 존. 녹스의 후손이 바비 할머니라니...)
(*16세기 영국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 지금의 개신교 장로교의 선구자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가로로 길게 지어진 집 뒤쪽 발코니 중앙에 밑에서부터 올라온 큰 나무 기둥이 하늘을 향해 넓게 가지를 펼쳐 그늘을 만들었다. 그 앞에 흐르는 허드슨 강의 잔잔한 물소리가 들리고, 썩은 나뭇가지에 구멍을 내고 몸을 숨긴 포섬(다람쥐보다 크지만 귀여움)이 어린잎을 뜯어먹으러 출몰하는 장면을 보면서 산속 집에서의 일주일간 쉼에 대한 새로운 루틴을 맛보았다. 몸이 좀 불편한 후배가 발코니가 있는 방을 쓰고 현관 입구 오른쪽 다락 아랫방에다 내 짐을 풀었다. 피정 동안 할머니는 나와 함께 갔던 후배에게 식사 시간은 무조건 같이 보내기로 하고 우릴 자유롭게 풀어놓으셨다. 한날 저녁 할머니는 쪽지에 출애굽기 15장 20~21절의 글과 “Miriam"이라는 이름을 써서 내게 건네주셨다. 왜 그 이름을 정했는지 설명과 함께. (*미리암은 모세의 누이 이름이고, 신약시대에 이르러서 Mary(마리아)라고 부른 이름이었다.)
'마리아'는 성경에서 아주 흔한 이름이며, ‘난주’의 천주교 세례명이 마리아라는 사실에 동질감이 생겨 나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써보았다. 이제 《난주》의 ‘정난주 마리아’ 이야기를 해보자.
‘1801년 정순왕후는 어린 나이로 즉위한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에 나선다. 노론 벽파를 두둔하던 정순왕후가 남인이 중심이 된 천주교를 탄압하니, 이것이 신유박해(辛酉迫害)다. 남인 명문가의 장녀이자 천주교도인 정난주는 시어머니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피신하였고, 남편 황사영은 충북 제천의 배론 골짜기에 숨었으나 천주교 부흥을 위한 백서를 북경의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어 참형당했다. 이어 정난주와 시어머니는 각각 제주도와 거제도의 관비로 정배 된다.’
(책 앞장에서)
*1801년 충북 제천에서 황사영 백서 사건(천주교 탄압의 실태와 대책을 적은 편지를 북경에 있던 프랑스 주교에게 보낸 것이 탄로 되어 참변을 당한 사건이다.)을 빌미로 천주교도를 대대적으로 박해한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정순 대비와 노론 벽파는 천주교를 무부무군(無父無君: 어버이와 임금도 안중에 없는 행동이 막됨을 뜻한다.)의 멸륜지교(滅倫之敎)로 몰아 탄압하였다. 그의 배후 정치세력을 일소하고자 1801년(순조 1) 박해령을 선포하고, 전국의 천주교도를 수색하여, 약 100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되었다.
난주의 천주교 세례명은 마리아였다. 그녀의 남편 황사영은 열여섯에 진사에 급제했으나 이후 사학 죄인이란 죄명으로 참형되었고, 그녀는 연좌의 죄로 중죄인이 되어 제주 땅에 관노비로 배정되었다.
*조선 백성의 목숨과 신분이 임금과 집권 정치세력의 결정에 좌지우지되었다. 그녀의 말처럼, "사학은 단지 핑계일 뿐,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공포와 복종 인지도 모른다. 권력이란 이름이 늘 그랬듯, 그들이 얻고자 하는 나라에 정작 백성의 삶은 없었다."
그녀는 정약용의 조카, 황사영의 아내로서가 아닌 정난주 이름 자체로 살았다. 남편을 통해 전해 들었던 천주 야소(예수)를 믿는 신앙 때문에 양반의 신분에서 제주 관노비로 끌려가서 평생을 제주 섬에서 노비의 삶을 살게 된다. 더 이상 양반 댁 여인의 삶이 아니라 비천한 노비 난주로 불리었고,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주인이 요구하는 모든 일을 다 마쳐야 했다. '양반에서 관비가 된 여인은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을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 했다.' 신분의 차별은 호사이고 목숨의 차별은 당연한 인생이 노비였고 죽어서야 끝날 고행이었다.
"경신생. 황경헌." 아비의 이름은 사족이 될 것이기에 난주는 아이의 옷섶에 손가락 물어 뜯어 피로 '경신생. 황경헌'이란 글자를 써넣었다. 그래서 그랬던가. 제주도로 들어가던 배가 하룻밤 추자도에 정박했을 때, 난주는 두 살배기 아들을 추자도에 버린다. '살면 살 것이고, 죽으면 천주의 자식으로 하늘에서 만날 것이다.' 자신의 아들 경헌만은 조선 땅에서 노비로 살지 않기를 바랐던 어미의 마음이었다. 추자도에 버려졌던 돌쟁이는 초로의 어부가 되어 37년 만에 어머니와 상봉한다.
"나는 네가 황사영, 정난주의 아들이 아닌 경헌 네 자신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양반도 천출도 아닌 이 땅을 살아가는 보통의 양민이 되어, (중략)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말거라. 태생에도, 사상에도, 신앙에도......, 너 된 너로 살아남아 어떤 네가 되든.....(중략)" (47쪽)
이천이십일 년 시월. 칠 년 만에 제주에서 일주일간 쉬었다가 왔다. 고향 행원리 할머니 집은 폐가나 다름없는 몰골로 지내온 세월의 무게를 버티고, 대문 없는 이웃집 평상에는 하릴없는 가족들이 쉬고 있었다. 사촌들은 열심히 일하며 가정을 일구어 살고 있었다.
<난주>를 통해 정난주가 살아낸 시대에 제주는 사람이 살 곳처럼 보이지 않았다. 수탈과 가뭄. 홍수와 역병이 해마다 제주 땅을 휩쓸었고 제주 백성들의 삶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던 것을 읽을 수 있다. 혹시라도 역병이 돌면 마녀 사냥하듯 죄를 만들어 무고한 백성을 고문하고 죽였다. 한양 땅에서 가장 먼 제주에까지 임금의 명으로 철리사 이재수가 도착하기까지 한 달여 넘는 기간이 걸렸던 땅이었다.
어릴 적 제주도에는 된장. 고추장이 귀했다. 소금에 절여진 멀건 배춧잎에 듬성듬성 고춧가루가 발라진 김치는 육지에서 먹었던 것과 달라 참으로 낯설었다. 쌀밥은 제삿날과 명절에나 밥상에 올랐고, 언제나 고구마를 툭툭 썰어 넣은 끈적한 조밥에 찬거리는 풀과 해초 나물이 전부였다. 도민들의 먹거리로 꿩엿과 메밀전병이라도 있었기에 허덕이는 주린 배를 조금이라도 채우고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관하에 두창과 천연두가 창궐하자 난주는 어린것들을 살리겠다고 자청해서 아이들을 돌보는 장면이 있다. 변변한 약조차 없으니 고름이 터지기를 기다렸다가 따뜻한 물에 열을 내리고 격리시키는 게 전부였다. 약방 소 첨지도 약방문을 닫고 제주목을 떠난 상황에서 노비 난주에게 자신의 아이를 맡길 때도 '일을 그르치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기가찰 조건을 걸고 대접받으려 했던 관하 족속들이었고, 그 모든걸 군말 없이 다 책임져야 했던 노비 인생이었다.
난주는 비록 믿음을 잃지는 않았지만 천주의 이름으로 소리 내어 기도할 수 없는 사학죄인이었다. 공교롭게 난주는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에 얽혀 대정(제주도 서쪽으로 미군부대가 주둔해 있는 곳이기도 하다.)에서 삼십 리 밖 차귀진의 관비로 쫓겨난다. 그리고 경오년부터 더욱 곤궁해진 차귀진에 조방장 '황림'이 부임한다.
황림이 어떤 인간인가?
'그 해에 차귀진의 조방장 황림이 부임해 왔다. 포악하고 예민한 조방장 밑에 수하의 구종은 사흘이 멀다 하고 내쫓기고, 군졸들은 매를 맞거나 벌을 받거나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한 번 떨어진 영이 즉효하지 못하면 발길질에 가슴뼈가 상하고, 두 번 떨어진 영이 즉효하지 못하면 아예 목이 달아난다. 그가 나타나면 모두들 고개를 숙여 눈을 피했고, 혹 눈이 마주치면 반드시 책을 잡았다...(중략) 어떤 이는 작금의 차귀진을 일러 무법천지라 하고, 또 다른 이는 사귀(蛇鬼), 즉 뱀 귀신이 노했다 하니, 즐거이 사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213~214쪽에서 인용)
그녀는 우여곡절을 거쳐 차귀진에서 구휼소를 만들어 굶주림과 질병, 고아와 노인들이 죽이라도 나눠먹도록 갈대를 엮어 허름한 집을 만든다. 죽는 게 사는 것보다 낫다 할 만큼 고통스러워하던 할망(할머니)이 난주에게 "야소인지 천주인지. 그 귀신을 나에게도 알려주게. 그 귀신을 만나면 내 몸 아픈 거 맘 아픈 거 다 사라질 거주."라는 하소연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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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께서는 하늘 아래 모든 이가 공평하다 하시었어요. 귀함과 천함은 오직 마음에 있는 것이지 결코 세상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276쪽)
구휼소가 그들에게 몸의 위안과 한 끼니의 밥을 줄 수 있을지언정 마음의 안식을 주지 못하니, 난주가 생각하기에 그들에게 진정한 기쁨과 희망을 주는 것은 천주의 이름뿐이었다. (278쪽)
삽시간에 구휼소에 모인 이들은 자기들끼리 신앙인이라고 여기면서 난주에게 천주의 이야기를 듣는 날수가 잦아진다. 이것으로 소문이 퍼지자 조방장 황림은 포졸들을 풀어 그녀의 포교를 입증할 물증을 찾아오라 명령한다. 그리고 구휼소 한쪽 망태기 속에 구겨져 풀로 덮여있던 한 장의 그림을 찾아내어 난주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손가락 하나가 잘리고, 곶자왈 동굴에 던져진다.
정순 대비와 벽파가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죄를 물었으나, 난주의 천주 신앙의 내용과는 합치되는 것이 없었다. '공평한 세상에서 귀천 없이 살기를 바랐던 것이 죄가 되어 관노비로 살았던 난주였다.'
세상에서 가장 이루어내기 어려운 과제가 '공평'인 것 같다.
난주의 신심을 통해 '공평'을 말하자면, 그것은 인간됨을 존중하는 '사랑'의 마음이 없이는발현되기 어려운 것 같다.
얼마 전 난주 마리아를 생각하며 지은 시
<고사리>
아낙들의 잰 손 사위로
댕강댕강 고사리 허리 꺾이는 봄이면
찬서리 눈보라 소식 한번 못 듣고
얘까지 왔노라 소곤대는 제주의 들판
삼시 세끼 조석 차려놓고
바당(바다)에 뛰어든
비바리들 숨비소리
중산간 붉게 언 땅을 쟁이질하는구나.
"어쩌다 이녁은 경 삼수과?"
(어쩌다 당신은 그렇게 사시나요?)
"속숨헙서... 고할 말 하나 무신 소용이성!"
(조용하세요~ 할 말 많지만 무슨 의미가 있겠소)
육지에서 살던시절 까마득하니
이곳이 정녕 나고 자란 곳 되었구나.
*그녀는 제주를 떠나기로 결심하고는 자신의 모든 물건을 다 나눈다. 그리고 그녀의 나이 예순여섯에 종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나흘이 지나고 추자도가 보이는 절벽 끝에서 난주의 버선 한 켤레와 미투리 두 짝을 발견한다. 제주목은 죄인의 죽음을 병사로 처리하여 조정으로 장계를 보내고, 향년 육십육 세 무술년 이월 초하루에 묘시에 사망하였다고 적었다. 제주에서 사라진.... 그녀는 추자도에 경헌과 상봉하여 일 년을 살고 죽는다.
**1909년 제주성당에 라크부 주임신부가 추자도를 방문하여, 황우중이란 어부를 만난다. 증조모가 정난주 마리아란 이름으로 제주에서 오래도록 관비로 지내다가 무술년에 추자도로 건너와 황경헌과 해후하였다고 한다.*
***제6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한 김소윤 장편소설 <난주>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