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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청로 로데 May 11. 2022

노을을 읽을 줄 아는 나이가 되어간다

노을을 인격화 하면 생기는 이야기


내가 봐도 지난번 장생포항 노을 사진은 정말 맘에 든다. 사진술이 좋아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장생포항으로 들어가는 256번, 406번 버스를 타면 창밖으로 지나치는 정거장마다 공단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일 년 365일 불과 하얀 연기를 내뿜는 공장 굴뚝과 거대한 저장 탱크들을 쳐다보면 버스 종점까지 뭣하러 가는가 반문하게 된다.



아이러니하지만, 버스 종점 몇 정거장 전부터 장생포 고래박물관, 고래마을, 고래유람선, 해양경비부대 등이 줄줄이 나타난다. 파에서 오메가까지, 처음부터 나중까지, 공장에서 공장으로 끝날 것 같은 도로의 끝자락이 가까워질수록 마을 풍경은 반전을 보여준다. 이렇게 박물관이며 유람선과 식당들을 들일 거였다면, 왜 마을을 철거하고 공장을 유치하네 마네 하면서 지난한 세월을 쌈박질을 하며 허비했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곳을 공장지구 끝 자락에 둔 이유가 어디에 있건. 기억하고 싶은 사실은 옛날부터 그곳에는 고래잡이 포경선들이 바다로 나가고 들어왔고, 선원들의 가족들이 삶의 터전으로 정착해서 생활하고 있었다는 사실. 그런 사람들이 살았던 시간들을 기억하고 싶다.




처음부터 있었던 게 어딨나? 살면서 하나 둘 생겼을 테지.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시장이 생겼고, 코 흘리게 꼬맹이들이 참새 방앗간처럼 들락날락할 만한 구멍가게도 있어야 했고, 그 상점 옆으로 옷가게, 길 건너편에 시계방, 만물상, 그리고 언덕배기에 담배가게까지 생기면서 동네라는 것이 주물럭주물럭 만들어졌다.

참, 경찰서, 우체국, 초등학교, 동사무소, 은행 등등 관공서와 그 기관들이 척척 제 기능을 해서 잘 돌아갈 수 있도록 전문 인력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동네 풍경이 되었다.


동네라고 부르는 기원을 (내가 아는 만큼) 더듬다 보니, 동네에서 정말 중요한 존재는 '사람'이고, 동네의 가치는 '생명으로 어울림'이란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돌아오면 동네가 살맛이 낫듯이,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난 자리는 적막하고 을씨년스러운 고요에 휩싸인다. 그 적막감은 사람을 끌어당기지 못하고 바깥으로 밀어내는 거절하는 손을 닮았.


#노을이 나를 과거로 데리고 간다.


철학자 故 남경태 선생의 책 《개념어 사전》에서 사관(史观)이라는 낱말을 이렇게 설명했다. '미래는  불확실하지만 과거는 확실하다. 시간의 흐름은 단선적이므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상태이고 과거는 이미 있었던 일이 된다. 미래와 과거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상식에 의하면 그렇다. 하지만 미래는 그렇다 쳐도 과거도  그럴까? 흔히 미래는 알 수 없으나 과거는 다 안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게 사실일까?'(이어지는 낱말 해설은 꽤 길기 때문에 앞에 문장만 인용한다.)



'미래는 불확실하지만 과거는 확실하다.'는 문구를 좋아한다. 내 마음에 와닿는 말이다. 



#노을은 나의 과거를 '확실하게' 가져다준다.   노을이 내게 갖다주는 건, 거푸집을 해체하고 사용기한이 지나 폐기된 '확실한 과거'이긴 해도 '내 과거'라서 거절하지 않는다. 어떤 일은 이해되지 않고 설명할 수 없어 진실이고, 또 어떤 기억은 생각보다 많이 왜곡되기도 했다. 하지만 노을은 모든 사실을 내게 던져두고는 은근히 바닷속으로 기어들어간다. 



#얼마 전, 내가 봤던 노을은 어제보다는 관대한 사람으로 나를 빚어주고 싶어 했다. 아니지. 그렇게 노을을 바라보며 마음을 넓히기로 작정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많은 상황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어도 잘 되지 않던 성품과 기질이 자연 앞에서 무장 해제하기 시작한 걸 보니, 온전한 인간으로 빚어지는 건 나 혼자만 애써서 완성될 게 아니었던 것 같다.





# 목적지는 정해졌지만 그 과정은 늘 내가 결정하고  걸어야 하는 현실이 가끔씩 버겁다. 일이나 관계에서 결정에 대한 무게감이 늘어날수록 잠깐 피해 가는 장소가 생겼다. 그곳이 바다가 보이는 곳이면 좋다.... 그렇다면, 얼마 전 장생포항으로 갔을 때 내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정말일까? 힘들었다는 게 정말이었나?  음... 굳이 힘들지 않아도 바다를 보고 복잡한 마음을 다잡았으면 됐다.



힘듦과 바다를 향하는 것과의 상관관계는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가 보다.



# 바닷가 식당 음식들은 8할 이상 맛집일 것이다. 지난주 장생포항으로 갔을 때, 점심  식사 시간이 훨씬 지나 꼬르륵 거리는 배를 움켜잡고 아무 식당에나 들어갔었다. 주문한 가정식 백반을 먹으면서 반찬에서 조미료 맛이 덜해서 주인장이 집밥처럼 차려낸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장생포항 인근 식당의 주 고객층은 대부분 해양 관련 선박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식사하는 그분들의 유니폼을 보고 알 수 있다. 어쩜 직장인들은 식당을 한 곳 정해서 월별로 식대 정산을 하는 경우도 있을 거다.




# 이제 노을이 지듯 이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고, 노을은 질 것이다. 살다보면 알게 되는 자연의 연속되는 반복성이 그렇다. '하루 한번 태양이 뜨고, 지는 해 따라 노을은 진다.'

 어느덧 나는 노을이 감정적이지 않은 이유를 알아낸 것 같다. 신이 자연에게 선물하지 않은 게 '감정'이지만, 사람은 '온갖 감정'을 다 느끼고 발산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다. 과학적인 추론은 아니겠지만, 왜? 왜? 자연에는 없고 사람에게는 있게 만드셨냐면, '다른 차원의 존재'로 끌어안고 끝까지 잘 살라는 '사랑의 마음' 때문이라고 본다.


그래서... 감정이 있고 없음은 노을과  나 사이에 별 문제가 안된다. 한 곳에서 바라볼 수 있을 때 보고, 헤어져야 할 때 이별할 수 있으면 되는 거다.

매일 만나고 이별해도 괜찮은 늘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상수'로 남아 있으면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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