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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청로 로데 Jan 30. 2023

단어를 만날 기회

쓰기연습


인트로

노트에 기록하고 싶은 아포리즘이다.

위화 작가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1장 '인민(人民)'에 있는 문장이다.


(인용 36)

한 사람과 한 단어의 진정한 만남에 기회가 필요할 때도 있다. 내 말 뜻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일생에서 수많은 단어를 만나지만 어떤 단어들은 한눈에 이해할 수 있는 데 비해 어떤 단어는 평생을 함께 지내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 자신은 이 글을 '비허구'에 포함시켰다. 사실을 사실로 말하지 못하는 금지된 사실이 밑바탕에 있다.  작가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프롤로그 제목이 '5월35일'

(숫자가 잘못 표기된줄 알았는데... 굳이 배우지 않은 사람도 인터넷 상에서는 5월35일이 6월4일 임을 안다고 한다. 1989년 6월 4일에 천안문 사태가 일어났던 날짜다. 5월31일 이후 나흘을 더해 5월35일로 표기한거다.

 대한민국에서 제주4.3이나 광주사태가 있었다고 해서 외국인들의 혐한 정서가 높아지는 게 아니듯 나는 혐중을 원하지 않는다.)


위에 인용한 문장 앞에는 '천안문 사건' 으로 기억되는 무거운 역사에 관해 언급했지만, 시간적으로 1989년으로 돌아가서 나열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지 않는다. 그로부터 2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중국의 젊은 세대 거의 대부분 천안문 사건에 관해 아는 사람이 없고, 아는 사람이 있다 해도 "많은 사람들이 가두시위에 나섰었다면서요?"라는 모호한 반문을 던지는 정도이다.


'인민'이라는 단어에서 중국 인민들이 느끼는 감정과 천안문 사건에 대해 모호한 답변을 하는 사람의 차이는 별로 없음을 자백하는 듯하다. 그 글이 바로 이어지는 문장 '한 사람과 한 단어의 '진정한 만남에 기회가 필요할 때도 있다...'라고 말한다.


단어(말)와 진정한 만남이 필요하고 절실하다그의 말에 공감한다.

말이 해체되어 간다는 것.

그래서 쓰는 사람이 알아서 맛깔나게 폼나게 버무려내면 대단해 보이는 아이러니한 효과. 그럼직한 말들이 홍수가 범람하듯 세상에 가득해서 마실 물을 찾아 헤매는 기갈을 겪고 있다.(나는)


그래서 쓰기에 시간이 길어지고 머뭇거려진다. 최근에 나는 무슨 반항심리가 올라오는지 '책에는 길이 없다'라고 중얼거리기도 한다. 작가들이 만들어 낸 길에서 길을 못 찾아 헤매고 있는 거다.

그래서 독서로는 길을 못 찾는다는 명제를 증명해보고 싶기도 하다.



나는 책 읽기를 통해 길을 찾고 싶었던가?

자문하면, 경우에 따라 달랐던 것 같다. 절박할 때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내가 원하는) 답'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책을 읽었다. 하지만,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길을 찾을 수 없었다.

굳이 책을 통하지 않고라도 세상에는 이미 많은 답이 나타났다. 애석하게 그 답이 나랑 연결이 안 된다는 문제가 있을 따름이다.

가까운 친구들한테 문제를 털어놔도 비슷한 수준끼리 오가는 대답으로는 내 속이 뚫리지 않는다. 답답함이 더해질 뿐.


답을 듣고 싶은 질문이 자발적 자의적으로 내 안에서부터 생기면 왠지 사색적으로 돌별하기도 하는 내 모습이 종종 생경한데. 그런데 나로부터 시작되지 않고도 내 문제가 되는 외부로부터의 들어온 질문은 성격이 다르다. 한 번도 고민하지 않고 살았어도 편했던 내 삶에 어쩌다 이런 문제가 생겨서 인생이 꼬이냐고 열받아봐야 그게 문제풀이는 아니다.


마치, 갈대밭 근처를 운전하던 중 새 떼들이 후드득 날아가면서 차 전면 유리에 똥을 뿌리는 것 같다. (이전에 나는 실제 이런 경험을 했다.) 그것도 아우토반 도로에서 비보호 좌회전을 하고 논두렁길로 운전대를 꺾는 순간 새 똥 세례를 받는다면 논두렁에 처박혀 랙카차를 불러야 할 수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운전석 옆문을 여는 것부터 난관에 부딪힐 거다. 만일 차가 공중으로 붕 떠서 차체 그대로 논밭 위에 얹히듯 착지하면 그나마 조금 낫지만 말이다.(그러고보니 이 경험도 있다..  사방이 논밭으로 둘러싸인 곳에 집을 매입하셨던 아버지의 혜안으로 몇년 동안 논길을 운전해야만 했었다.)




문제를 환영할 수 없는 이유는 수두룩하다.

그렇다고 숫자셈만 하고 있을 수 없는 노릇일 때가 9할 이상을 차지한다. 1번은 혼자 풀어보고, 2번은 옆 친구 거 커닝해서 쓰고, 3번은 부모님 도움을 받고, 다음은.... 인생이 숙제하다 늙어가는 게 아닌가 하는 확신이 설 때쯤 겨우 문제의 터널을 빠져나오기도 한다. 문제를 안고 살지는 않지만 문제는 언제 어디서든 나를 향해 은밀하게 혹은 저돌적으로 다가온다.


문제가 질문형으로 답을 찾아다니듯 책 역시 질문형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자의 반 타의 반 나에게로 와서 친구 하자는 문제와 화해하려면 더욱 질문하는 게 낫다고 본다. (가르치거나 주장할 생각은 없지만...)



책 읽기는 인생의 참고서 정도 되겠지

단문으로 시작해서 끝나는 인생이 없듯, 인생은 중문과 복문의 카오스라고 본다.

인생의 양팔저울에 책을 올려놓았다면, 다른 한쪽에는 책 내용의 무게만큼의 질문(생각)을 만들어서 저울이  한쪽으로만 기울지 않도록 하는 게 인생 아닐까 싶다.

어떤 날에는 책에 짓눌려 호흡이 가빠지고, 또 어떤 날엔 질문하느라 머리가 하얘지고... 그러다가 운이 좋으면 다행이고.



PS

질문이 없어도 꾸역꾸역 질문을 만들다 보면 이건 책 읽기가 아니라 고난의 행군이다. 그런데 신기한 건 시간이 누적되고 머릴 쥐어뜯는 횟수가 쌓여가면서 사람이 사람되는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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