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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청로 로데 Feb 19. 2023

물고기가 죽고

일상


해가 바뀌면 일분이라도 시간을 잡고 싶은 심정이 다. 그래서 어항 속 물고기를 보며 하루 일분 조차 어멍(鱼蒙. 제주도 방언 '엄마'라는 뜻 아님)할 겨를이 없었다.


 한 달 전 먹이를 주려고 하는데 암놈이 보이지 않아서 자갈 바닥을 휘~ 한번 저었더니 죽은 물고기 몸이 저항도 받지 않고 두둥실 수면 위로 떠올랐다. 순간 <어쩌냐;;>하는 마음은 잠깐. 물고기 입장보다 내 입장에서 쳐다보니 이런 생각이 스쳐갔다. <그래도 한 마리가 남았네>

암놈의 몸을 수습하고 난 뒤에도 수놈 물고기는 혼자서 가로 30cm* 세로 20cm* 높이 20cm의 어항을 한가로이 유영하더니. 지난주에는 먹이가 떨어지는 위치를 향해 꼬리 치며 움직이는 동작이 아주 굼떴다. 그리고 다음 날엔 몸에 <헤엄치기도 귀찮다!>는 현수막을 달아놓은 듯 어항 중간 지점에 멈춰서 버렸다.

<그때 내가 물고기 짝을 맺어줬어야 했나?> 급기야 지난주 금요일 아침. 먹이를 주려고 어항을 살피다가, 굼뜨고 정지하기를 거듭하던 물고기가 보이지 않아서 어항 속 식물들을 하나씩 바깥으로 꺼냈다. 꺼내다 보니 식물 이파리 뒤에서 둥둥 떠있는 물고기를 발견했다.


5월까지 살아 있었다면 일 년을 맞는데... 우리 집에서 일 년을 못 채우고 물고기가 사라졌다. 죽은 물고기에 대한 내 기분은 슬퍼하기보다 아쉬운 마음이었다. 다소 기운이 빠졌던 나는 손바닥으로 죽은 물고기를 건져내 베란다 화분에 묻었다. 혹시 베란다에 봄기운이 가득해져서 그 화분에 심은 금전수에 녹색이 짙어진다면, 그것(물고기)의 몸이 썩어 흙과 어우러져 양분이 되어 다행이라 여길 생각이다.


어릴 적에 나는 아버지 가게에서 키우던 황금색 비늘을 지녔던 금붕어 두 마리에게 나름 애정을 줬었다. 사람은 밥 세끼를 먹지만 금붕어한테는 <하루에 한 번만 먹여라!>며 인간과 물고기의 생태가 끼니에서부터 다르다고 말해주셨던 아버지. 그래서 나는 물고기 먹이를 줄 때면, 가능한 듬뿍 티스푼으로 한 번 주려고 했었다. 아버지 몰래 끼니를 더 챙겨줘서 과식으로 죽었을지 모를 금붕어가 어항에서 사라졌을 때도, 나는 물고기의 부재가 슬프지 않았다. 어항을 한가로이 유영하던 물고기가 사라지고 텅 빈 유리 화병처럼 자리를 지키던 어항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항도 물고기와 함께 사라진 이후로 가게에는 어류종의 생명체를 키우지 않았다.




물고기를 보내고 빈 어항을 깨끗하게 씻어서 수경식물들 몇 가닥을 물에 심었다. 물고기가  죽었으니 앞으로 먹이를 넣지 말라고 가족들에게 사실을 알렸다. '허전함 약간, 아쉬움 약간'으로 물고기의 부재를 털어냈다.   나는 어항 아구까지 물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다시 산소발생기 전원을 켰다. 작은 물레방아에서 물 떨어지듯 낙숫물 소리가 조심스럽게 들린다. 이제 저 어항이 가습기가 될 거라고 선언을 해야 할까? 아니면, 새 물고기를 사다 넣어야 할까?


우리 집 거실 한 귀퉁이에 있는 어항에는 당분간 생명의 이야기를 볼 수 없다. 주다만 먹이는 눅진하게 뭉쳐갈 텐데 <나는 살아있는 물고기가 어항 속을 헤엄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건가?> 당분간 어항에 꽂아둔 수경식물들이 자라는 것 만으로 만족하고 싶다. 요즘 나는 '어멍'할 여유가 없다. 어떤 식으로든 '쉼'이 되기만 해도 족한 '여유'가 있으면 만족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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