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하면서 자랐다

이사와 재개발이 내게 남긴 기억들

by 북청로 로데

부산으로


부모님이 고향을 떠나 낯선 부산으로 건너와서 개척자처럼 가정을 이루겠다고 한 결정이 어쩜 인생 최대 모험이었을 수 있다. 부산에 무슨 연고가 있어서 이사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게 아니었다. 혹시 지역에 대한 인연이 있어서 이사했다고 한다면, 아버지가 10대 소년이었을 때 원양어선을 탔던 큰아버지를 따라 부산에 살았던 것을 인연이라고 해야 하나?

이사

부모님이 들려주신 가난했던 날들의 삶을 경험이 아닌 경청했을 뿐인데, 나는 귀로만 들었던 부모님의 흔적과 삶을 기억할 때면 가슴에 통증이 느껴진다. 심장에 신경세포가 있는 것도 아닐텐데 말이다. 두 분은 제주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울산으로 섬에서 육지로...지방을 넘나들면서 이사를 하셨다.

손재주가 좋았던 아버지는 부산 하숙집 주인아저씨로부터 시계 수리공 일을 배우셨단다. 꼼꼼하고 정교한 손재주로 아버지는 시계수리와 도장 새기는 일도 배웠고, 이발소를 운영할 정도의 미용 솜씨도 있었다. 우리 집 서랍장에서 해묵은 흑백사진 중에는 ‘금일이발소’ 가게를 배경으로 한 사진이 있다. 아버지의 함자를 따라 작명한 이발소는 장사도 잘돼서 두 명의 직원과 함께 가게를 운영하셨다.


[금일이발소] 영업종료,

[영명당] 영업개시

이발소 앞에 선 남동생
점포 앞에 계신 아버지


그리고 어느 날 이발소 가게에 영업종료를 선언하시고, 도로변에서 50여 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새로운 점포를 열었다. ‘시계&도장’ 점포였고, 이번에는 당신의 이름 대신 새로운 이름의 간판을 달았다. [영명당]. 간판이 달린 날부터 동네 사람들이 우릴 부를 때마다, 간판 이름이 우리 형제들 이름 앞자리에 따라붙기 시작했는데, 그 때는 내 이름 대신 ‘영명당집 딸’로 불리는 것을 뿌듯하게 느낀 적도 있었다.

이발소 가게 주인집은 동네에서도 큰

기와집과 넓은 마당이 있는 부잣집이었고, 우리 가족들은 그 집에 새들어 살았었는데, 단칸방에서 막내 동생이 태어나던 날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외할머니께서 딸내미(우리 엄마) 출산 뒷바라지 하시려고 일찌감치 와계셨고 단칸방은 밥상 하나 들이는 것도 비좁아 복작복작했다. 주인집 마당에 포도나무는 여름부터 탱글탱글 커지다가 가을이면 주렁주렁 탐스런 포도송이를 내놓았다. 인심 좋았던 주인 아줌마의 얼굴은 잊었지만 그분이 우리에게 베푼 온정 때문에 나는 그 집을 포근하고 밝은 곳으로 기억하고 있다.

부지런한 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시든지 열심을 다하셨다. 생활 밑천이라고는 외할머니가 딸 시집 혼수로 만들어주신 비단이불 한채와 장독 두 개였고, 아버지는 가방 하나에 담을 정도의 시계 수리장비와 손재주였다. 무엇보다 살림살이를 일으켰던 원동력은 두 분의 '부지런함'이었다.

아버지가 직종을 바꾸고 몇 블럭 떨어진 위치에 새 점포를 개점하면서 우리 가족에게도 '집’이 생겼다. 방 두칸에 부엌, 점포가 일자형으로 뻗은 집이었지만 그 집은 새 집이었다. 집짓는 아저씨가 기둥을 세우고 블록을 쌓아 올리고, 미장으로 시멘트를 발라가면서 집은 점점 그 형체를 드러냈다. 처음엔 아저씨가 무슨 일을 하시는지 궁금해서 주위를 맴돌던 나는 어느 날 완공된 집을 보면서 너무 신기해했다. 시멘트를 물과 섞어가며 농도를 조절해서 벽돌을 한칸씩 올릴 때마다 적당히 반죽한 시멘트를 중간에 발랐다. 그 때 한켜 한켜 쌓아가는 벽돌마다 아교 역할을 하는 회색빛 시멘트에서 시큼한 냄새가 났던것 같다.

버젓한 우리 가게는 작은 시계방이었지만 해가 잘 들어왔고, 진열장 한 쪽에는 금붕어가 헤엄치는 어항도 있었다. 나는 물고기도 하루 세끼를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금붕어가 우리처럼 하루에 세끼를 다 먹으면 배가 불러서 죽는다고 늘 조심하라셨다. 그래서 먹이를 줄 때면 내가 얼마나 주는지 아버지는 감시의 눈빛으로 날 지켜보셨다. 다행히 아버지는 생명체들을 잘 살리는 능력이 있어서 금붕어는 우리 가게에서 안전하게 잘 먹고 잘 살았다. 방 두 칸은 부엌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었고, 가끔 친구가 놀러 와서 같이 잘 때는 건넌방에서 친구랑 둘이서 잘 수 있는 호사도 누렸다.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이 돌고 돌아도 시골 아이들은 매일 색다른 놀이를 만들며 놀았다. 늦여름 길가에 코스모스 가로수 길을 걷다가 신었던 고무신을 벗어들고, 코스모스 꿀을 빠느라 한 눈 팔고 있는 벌을 신발로 낚아채 잽싸게 팔을 풍차돌리다가 땅에 냅다 팽개친다. 그리고 고무신 안에서 어지러워 날지 못하는 벌의 날개를 잡고 똥침을 빼고 꿀을 빨아먹었다. 지금이야 벌을 보면 쏘일까봐 몸을 피하지만 모든 자연환경이 놀이터였던 시절에는 벌마져도 간식을 제공하는 구멍가게 같은 존재였다고나 할까?!


학년이 올라가고 세월이 흐르면서 마을을 떠나 타지로 이사가는 집들이 늘어났다. 앞전에 살던 기왓집엔 어느 겨울 밤 ‘불이야~’하는 소리와 함께 불길이 밤하늘을 타고 올라가는 광경도 목격했다. 친한 친구가 살던 다가구 주택에서 부부 내외가 연탄가스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주검이 되어 떠나는 사건도 일어났다. 친구의 가족들은 외삼촌과 외숙모를 허망하게 떠나보낸 뒤에 마을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

마을에서 한 정거장만 들어가면 버스종점이었는데, 그 뒷길을 공장지구와 연결하는 산업도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국민학교(현재는 초등학교로 부르지만)에서 매년 운동회가 시작되면, 그 날이 마을 잔칫날이었고 마을 사람들의 운동회 날이기도 했다. 큰 솥을 학교 운동장 나무그늘에 걸고 장작을 패서 한 솥 가득 국수를 삶아내면 최소 수 십 명의 점심 한 끼가 만들어졌다. 애들과 마을 사람들이 아침부터 해 기우는 오후까지 열심히 뛰고 웃음이 가시지 않기도 했지만, 간혹 아차상조차 받지 못해 속상한 맘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친구들도 있었다.

바닷가로 내려가는 골목길


그렇게... 마을엔 빈집들이 늘어났고 우리 부모님도 이사 갈 곳을 찾으러 버스타고 다른 곳을 다녀오기도 하셨다. 내가 5학년으로 진급하는 해에 대일마을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대일마을은 지금의 장생포 방향으로 버스를 타고 가다가 삼양사 설탕공장이 있는 동네 이름이었다. 그곳 역시 현재는 재개발로 인해 마을이 사라졌지만, 내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나의 성장을 도와준 추억으로만 남아있는 마을이 되었다. 대일마을에서 아버지 가게의 출발은 눈에 띄지 않았지만 부모님이 2년 동안 알뜰하게 저축한 돈으로 삼양사 입구 삼거리에 있던 긴~ 집을 매입하셨다. 그렇게 가게는 번창했고 우리 형제들은 돈 부족한 것 모르고 생활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운영하셨던 시계방은 동네분들에게 참새방앗간 같은 사랑방 역할을 했던 장소였다. 밥 먹으러 온 이웃과 밥을 먹을 수 있었고,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면 일심단결하여 감시했고, 집에서 자식들을 부르며 ‘밥 먹으러 들어와라’, ‘그만 놀고 공부해라’고 소리지르면 금새 보이지 않던 아이들이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갔다.

가을 억새풀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