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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cia Mar 14. 2020

여행기 쓰기가 망설여지는 이유

[쉼표에서 발견한 것들] 15. 라파스에서 보고 들은 것

나는 얼마나 보고, 듣고, 알고 있는 걸까.

아니, 얼마나 ‘제대로’ 보고, 듣고, 알고 있는 걸까.

스치는 것들에 늘 물음을 품는다.


언젠가부터 우물쭈물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자기 의견이 없는 사람이라는 평가가 돌아왔다. 조바심에 정리되지 않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이도 저도 아닌 말들이 바닥에 뒹굴었다. 떨어진 것들에 진짜 나의 말은 없었다.


여행기를 쓰면서도 항상 같은 고민에 봉착한다. 나는 그들을, 그 장소를 제대로 보고 경험한 것일까. 내 글이 어떤 선입견을 양산하는 것은 아닐까.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 사실 이곳에서는 숙소에서 쉰 시간이 더 많다.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도시 분위기에 겁이 나서 사진도 마음껏 찍지 못했다.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는 순간, 주위에 있는 현지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쏠렸다. 무서웠다. 하지만 이 경험이 라파스라는 도시를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왜 이곳이 내게 두려움을 주는지 이해할 수 있을까.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0에 수렴하는 스페인어 능력치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노릇.


그래서 한국에 오자마자 스페인어학원에 등록했다.
라파스에서는 동행 친구들과 장을 봐서 밥을 해 먹었다. 오랜만에 먹는 한식에 밥 한 그릇 뚝딱! (사실 음식은 스물두 살 막내가 다 했다. 게으른 누나들.. 하하...)
아주 잠깐, 라파스 근교의 '달의 계곡'에 다녀왔다. 진흙으로 된 지층이 오랫동안 침식되어 만들어진 곳이다. 규모는 작지만, 스타워즈의 촬영지였을 정도로 기이한 풍경을 자랑한다.


하지만 내 옆에는 스페인어가 전공인, 멕시코로 어학연수를 다녀온, 학원에서 스페인어를 가르치는 C가 있었다. 마침 C의 선배가 라파스에 살고 있었다. 운 좋게도 그를 만나 라파스와 볼리비아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때 알게 된 몇 가지를 적어본다. 아래 내용은 모두 2018년 11월 초 기준이다.




하나,

라파스에는 텔레페리코라고 불리는 케이블카 형태의 대중교통 수단이 있다. 우리나라의 지하철처럼 노선이 나뉘어 있고, 노선마다 상징색이 있다. 타보진 못했으나, 500원 정도로 이용 요금이 굉장히 저렴하다. 적자 우려는 없을까. 특히 최근에 노선이 많이 늘어났다고 들었던 터라 어찌 운영되는지 궁금했다. 엄청난 재정을 투여하고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대통령인 에보 모랄레스가 2019년 대선을 앞두고 재선하기 위해 포퓰리즘 정책을 마구 쏟아내고 있는데, 텔레페리코 노선 확장 및 요금체계도 그 일환이라고.


라파스의 텔레페리코. ⓒpixabay


둘,

볼리비아 전역은 대한민국 외교부가 지정한 '여행 유의' 지역이다. 빈부격차가 심하고 치안이 좋지 않아서 범죄가 빈번하게 일어난단다. 남미의 많은 국가에서 그렇듯이 볼리비아에서도 여성 인권이 바닥이다. 성범죄가 잦고 아버지를 모르는 아이도 많이 태어난단다.


셋,

라파스는 특히 빈부격차가 심하다고 한다. 지대가 낮은 곳에서는 부유층이, 높은 곳에서는 빈민층이 산다. 높은 곳에 살면 경치가 좋아서 괜찮을 것이라 예단하는 것은 금물. 라파스 역시 엄청난 고지대다. 가장 낮은 곳이 3200m이며, 꼭대기는 4100m에 달한다. 부자들이 저지대를 선점한 이유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자명하다.


라파스도 고지대다. 고산병 조심!


넷,

라파스 근교에서 가장 최빈층이 사는 엘알토(El Alto : 스페인어로 Alto는 '높은'이라는 뜻) 지역의 시장은 세 구역으로 나뉜다. 새 물건을 파는 곳, 중고 물품을 파는 곳, 훔친 물건을 파는 곳이 그것이다. 혹시 자신의 물건이 사라졌다면, 그 주 일요일에 엘알토 시장에 가면 찾을 수 있다고.


다섯,

볼리비아는 원주민 비율이 높은 편이다. 국민의 60% 이상이 백인의 피가 섞이지 않은 원주민 계통이다. 공용어도 많다. 무려 37개. 그래서인지 남미의 다른 국가에 비해 폐쇄적이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남미에서 유일하게 관광 목적의 비자를 요구하는 국가다. (발급 절차도 매우 까다롭다.) 특히 스페인 이주민에 대한 감정이 굉장히 적대적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국민이 스페인으로 일자리를 구하러 떠난다고 한다.


여섯,

(글 작성 시점 기준으로) 부정선거 파동으로 에보 모랄레스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 했지만, 재임 동안 그는 백인보다 현저히 낮은 원주민의 인권을 끌어올리기 위해 큰 노력을 했다고 한다. (모랄레스 역시 원주민 출신이기도 하고)


볼리비아의 원주민 비율은 60%를 넘는다. ⓒpixabay


일곱,

엘알토에는 짓다가 만 건물이 많다. 건물색도 천편일률적이라 그 이유가 궁금했다. 답변은 다소 황당했다. 건물을 덜 완성하고 페인트칠을 하지 않으면 세금을 내지 않을뿐더러 정부 보조금도 받을 수 있단다. 부자 동네인 칼라코토(Calacoto)의 제각각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건물들을 보니 엘알토의 그것들과 대비되어 마음이 아렸다.


여덟,

볼리비아에서는 코카콜라가 물보다 싸다. 가난한 사람들은 물 대신 콜라를 많이 먹을 수밖에 없단다. 자연스레 비만이 많아지고 건강이 나빠진다고. 빈의 대물림, 부의 대물림...


아홉,

라파스 도심 건물의 창은 대부분 반사 유리로 되어있다. 고도가 높은 데다가 분지 지형인지라 사생활 보호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한다.


라파스 전경. 전형적인 분지 지형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pixabay




스페인어로 라파스(La Paz)는 '평화'를 의미하는데, 볼리비아의 역사는 그것과 굉장히 거리가 멀다. 쿠데타와 전쟁이 빈번했고, 대통령도 수시로 바뀌었다. 남미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하다 보니 경제 상황 역시 좋지 않다.(그런데 코파카바나의 숙소는 왜...?) 내게 쏠렸던 현지인들의 시선이 조금이나마 이해되기 시작했다.


비록 짧았지만 C의 선배와의 만남은 이번 여행에서 좋았던 순간 BEST5에 들 정도로 의미 있었다. 명소를 방문하는 것도 좋지만, 개인적으로 여행지 곳곳에 숨겨진 이야기를 듣는 게 더 좋다.


여행기 쓰기가 망설여진다면서 오늘도 나는 이렇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여행기가 해당 지역이 어떤 곳인지 이해하는 데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물론, 앞서 우려한 것처럼 선입견 범벅일 수도 있다. 내가 보고 들은 것은 단면에 불과하니까. 만약 그렇다면 내 여행기를 머릿속에서 지우셔도 좋다. 다른 여행기도 많이 읽어보시길 권한다. 그러면서 여행지에 대한 퍼즐의 조각을 하나씩 맞춰보시길 바란다. 기회가 된다면 직접 가보셔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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