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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cia Jun 23. 2020

여전하지만, 그래도 꼭 말하고 싶은 것

[쉼표에서 발견한 것들] 19. 에필로그


귀국하던 날, 댈러스에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에서 내 옆자리에 20대로 보이는 미국 국적의 여자분이 앉았다. 그녀는 무척이나 들뜬 모습이었는데, TV에서만 보던 한국에 가게 되어 정말 행복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쉴 새 없이 내게 한국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피곤하고 아팠던 나는 조금 짜증이 났고, 최대한 짧게 대답했다. 무미건조한 표정과 함께.


지나고 보니 웃어주지 못한 게 후회가 된다. 그녀에게 한국의 첫 경험이 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페루 약국에서의 기억이 떠오르며 살짝 부끄러워졌다. 나 역시 웃어주고 친절했던 사람이 좋았는데.


낯선 땅에서의 한 달이 지났다. 많은 것을 보았고 겪었으며, 생각했다. 프롤로그에 '낯선 곳에 자신을 가져다 두면, 그간 몰랐던 나만의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다'라고 거창하게 썼는데, 지금 보니 참 낯간지럽다. 그래도, 제목까지 '쉼표에서 발견한 것들'이라고 지은 마당에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쓰면 안 될 것 같다.


  동안 어떤 상황이 와도 여행은 계속되었다.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는 ) 내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여행은 멈추지 않았다.  과정에서 생략하거나 보지 못한 것도 있지만, 그것에 너무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이번 여행에 예의가 아닌  같아서.


삶도 마찬가지다. 어떤 상황이 와도 포기하지 않는 한 삶은 계속해서 흘러갈 것이다. 어쩌면 많은 것을 잃거나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순간이 올 수도 있겠지만(이미 왔을 수도 있고), 그것을 앞으로의 날들에 지나치게 투영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내 삶과 자신에게 예의를 지키고 싶어서.


물론 쉽지는 않다. 여전히 나는 지난날을 곱씹으며 종종 후회 타령을 한다. 하하.




“조금만 더 더 하는 바람을 없애는 겁니다. 이럴 리가 없다, 이렇게 됐어야 했는데 같은 생각도 일절 하지 않고요. 지금 이렇게 있을 수 있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이야. 정말 기적같은 일이야라고 생각하면 쓸데없는 욕망이 사라지고 금세 편안해져요."

내게 던져진 수많은 일들, 좋았던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것은 예측할 수 있었지만 막지 못한 것도 있고, 틀린 선택으로 후회할만한 결과를 얻은 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숙한 어른은 그것도 인생의 한 부분으로 수용한다. 원치 않은 일이 있었던 만큼, 감사한 일도 있고, 행운의 영역으로 볼 것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니. 많은 이들이 감사와 행운의 사건을 당연히 일어날 일로, 불운과 후회스러운 일을 일어나서는 안될 일로 여기면서 인생을 평가한다. 그런 이들의 표정을 보면 어딘지 모르게 찌뿌둥하고, 짜증이 깊이 박힌 유리조각같아서 영원히 통증이 존재할 것 같은 얼굴이다. 그에 반해 키키 키린의 얼굴은 어떤가? 꼭 스크린에서의 연기로만 볼 것이 아니라해도,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잘 나이든 노인의 좋은 표정이 깊이 스며져있다. 연기를 넘어서 인생의 깊이가 스크린을 채우기에 말년의 영화들이 국경을 넘어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렸으리라 믿는다.

- 하지현 '던져진 인생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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