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에서 발견한 것들] 18. 칠레 산티아고, 돌아가기 위한 연습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 도착했을 때 양가감정이 들었다. 지난 한 달간의 여행 추억이 떠오르며 '아쉽다'라는 생각과 위염과 장염으로 몸이 좋지 않은 터라 '얼른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라는 생각. 묘했다. 아프긴 해도 아쉬움만 남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일상에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걸 보니, 지긋한 익숙함 속에서도 얻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나 보다.
산티아고에서는 많은 여행자가 아르마스광장이 있는 구시가지 근처의 숙소를 찾는다. 하지만 나는 부촌인 신시가지 라스콘데스(Las Condes)에서 숙소를 잡았다. 구시가지가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은 데다가(손에 꼭 쥐어진 손전화를 눈앞에서 훔쳐 간단다), 마지막이니 좀 편하게 있고 싶었다. 2박 3일 동안 계획 없이 숙소를 나가 무작정 걸었고, 그러다 힘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우버를 불렀다. 출퇴근길 인파를 보며 오랜만에 일터 생각을 했고, 약국에서 약을 샀으며, 쇼핑몰 직원의 감언이설에 충동구매도 했다.
여행하면서 ‘남미 음식은 짜다’라는 편견이 생겼는데, 칠레에 오니 그렇게 짜던 치즈와 햄이 담백하다. 남미의 부국 칠레, 그 반대인 대다수 국가들. 문득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은 이들이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 소금을 미친 듯이 쳐댔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이상해졌다. 순간이지만 자극적인 것은 아픔과 괴로움을 잊게 만들기도 하니까.
산티아고는 여행자들에게서 혹평을 받는 도시 중 하나다. 볼거리가 많지 않은 데다가 대도시인지라 서울과 많은 부분 닮았기 때문이다. 높고 현대적인 빌딩이 많은 라스콘데스는 더더욱 그렇다. 그동안 남미 어느 도시를 가도 난 늘 주목의 대상이었다.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행복하기도 했다. 누군가의 기억 한 페이지에 남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라스콘데스에서는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쉽게 보이고 쉽게 잊히는 존재일 뿐이었다. 서울에서처럼.
그렇게 별것 아닌 존재가 되어 2박 3일 동안 별것 아닌 것들을 해냈다. ('해냈다'라고 표현한 것은 언어가 통하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산티아고에서의 2박 3일은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연습이 된 것 같다. 귀국 후 이틀 쉬고 출근이었는데, 신년 사업계획에 연말 행사까지 처리해야 할 굵직한 일이 잔뜩이었다. 하지만 여행 향수병을 잘 극복하고 일을 잘 쳐낼 수 있었다. 쉽게 지워지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에 서글퍼졌던 기억이 이렇게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