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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cia Jun 21. 2020

쉽게 보이고 쉽게 잊히는 존재가 되어

[쉼표에서 발견한 것들] 18. 칠레 산티아고, 돌아가기 위한 연습

벌써 혹은 아직도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 도착했을 때 양가감정이 들었다. 지난 한 달간의 여행 추억이 떠오르며 '아쉽다'라는 생각과 위염과 장염으로 몸이 좋지 않은 터라 '얼른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라는 생각. 묘했다. 아프긴 해도 아쉬움만 남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일상에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걸 보니, 지긋한 익숙함 속에서도 얻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나 보다.


산티아고로 가는 칼라마공항에서 사 먹은 햄버거. 상추, 돼지고기 패티, 치즈, 토마토가 전부인데, 한국 돈으로 만 원이 넘는다. 배도 아팠으면서 이 비싼 걸 왜 사 먹었을까.


산티아고에서는 많은 여행자가 아르마스광장이 있는 구시가지 근처의 숙소를 찾는다. 하지만 나는 부촌인 신시가지 라스콘데스(Las Condes)에서 숙소를 잡았다. 구시가지가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은 데다가(손에 꼭 쥐어진 손전화를 눈앞에서 훔쳐 간단다), 마지막이니 좀 편하게 있고 싶었다. 2박 3일 동안 계획 없이 숙소를 나가 무작정 걸었고, 그러다 힘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우버를 불렀다. 출퇴근길 인파를 보며 오랜만에 일터 생각을 했고, 약국에서 약을 샀으며, 쇼핑몰 직원의 감언이설에 충동구매도 했다.


담백함이 슬펐던 이유


여행하면서 ‘남미 음식은 짜다’라는 편견이 생겼는데, 칠레에 오니 그렇게 짜던 치즈와 햄이 담백하다. 남미의 부국 칠레, 그 반대인 대다수 국가들. 문득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은 이들이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 소금을 미친 듯이 쳐댔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이상해졌다. 순간이지만 자극적인 것은 아픔과 괴로움을 잊게 만들기도 하니까.


산티아고에서 묵었던 호텔. 조식 포함으로 1박에 7만 원 조금 넘는 금액을 냈다. 호텔치고 저렴한 편인데, 그동안 하도 저렴한 숙소에서 묵어서 그랬나 당시에는 비싸게 느껴졌다.
여행자들을 위한 쇼핑몰 할인카드(사진 왼쪽). 하지만 적용되는 브랜드가 제한적이다. 사진 오른쪽은 충동구매의 흔적. 빅토리아 시크릿 바디로션은 도대체 왜...?
출구와 입구 방향이 명확하게 나뉘어 있는 문. 이런 건 한국에도 적용되면 좋을 것 같다. 반대편 인파와 마주쳐서 우왕좌왕하지 말고.
호텔 조식. 위염과 장염이 괜찮아지는 듯해서 먹었는데, 다시 보니 위염과 장염에 안 좋은 것들만 골랐구나.
칠레 물가는 꽤 비쌌다. (아, 과일은 싸더라!) 아이스크림(사진 왼쪽)은 우리 돈으로 5천 원, 롤 세트(사진 오른쪽)는 만 원 정도. 또 위염과 장염에 안 좋은 것들만 가득.
영어가 1도 통하지 않는 약국에서 오로지 손짓과 발짓으로 산 위장약. 하지만 별 차도가 없었다.


별것 아닌 존재가 되어


산티아고는 여행자들에게서 혹평을 받는 도시 중 하나다. 볼거리가 많지 않은 데다가 대도시인지라 서울과 많은 부분 닮았기 때문이다. 높고 현대적인 빌딩이 많은 라스콘데스는 더더욱 그렇다. 그동안 남미 어느 도시를 가도 난 늘 주목의 대상이었다.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행복하기도 했다. 누군가의 기억 한 페이지에 남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라스콘데스에서는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쉽게 보이고 쉽게 잊히는 존재일 뿐이었다. 서울에서처럼.


만년설과 야자수의 공존. 남미여행 할 때 왜 사계절 옷을 챙겨야 하는지 보여주는 듯하다.


그렇게 별것 아닌 존재가 되어 2박 3일 동안 별것 아닌 것들을 해냈다. ('해냈다'라고 표현한 것은 언어가 통하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산티아고에서의 2박 3일은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연습이 된 것 같다. 귀국 후 이틀 쉬고 출근이었는데, 신년 사업계획에 연말 행사까지 처리해야 할 굵직한 일이 잔뜩이었다. 하지만 여행 향수병을 잘 극복하고 일을 잘 쳐낼 수 있었다. 쉽게 지워지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에 서글퍼졌던 기억이 이렇게 도움이 된다.


내가 다시는 미국 국적기 타나 봐라. SSSS에 어째 유색인종만 걸리냐. 미국은 여러모로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는 나라다!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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