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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코아 Apr 13. 2024

행복은 결핍으로부터

그 이상한 아이러니

 주말에 열심히 해보겠다는 나의 의지와는 달리, 토요일 오전은 정말 컨디션이 안 좋았다. 사전투표도 하러 가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하는데 몸이 안 움직이고 피곤함이 몰려와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그냥 계속 누워있었던 것 같다. 배가 고파서 꼬르륵거리면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대로 계속 누워있다가는 하루가 끝날 것 같았다. 씻는 것부터 하기로 했다. 오후 2시가 다 되어서야 겨우 일어나서 먼저 씻었다. 다행히도 씻고 나니 기운이 돌아와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편한 검은 바지에 흰 반팔 티셔츠를 입고, 쌀쌀할까 봐 보라색 집업을 걸쳤다. 오후 6시 전에는 투표를 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밖을 나섰다. 밖에 나가니 날씨가 너무나도 좋았다. 온도는 적당했고, 햇살은 따뜻했다. 몸은 여전히 피곤했지만 마음은 조금 좋아졌다. 그렇게 더워하며 걷고 또 걸었다. 버스를 타지 않고, 투표소까지 걸어갔다. 도착하니 사전투표고 타 지역이라 대기 인원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투표까지는 5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투표소를 나왔다. 그리고 나온 김에 동사무소 근처 벚꽃길에서 사진을 찍다가, 동기들이 공부하고 있는 스터디 장소로 향했다. 오늘은 공부를 혼자 하기로 마음먹었었는데, 아무래도 혼자서는 책을 펼치지도 않을 것 같았다. 도착해서 30분은 수다를 떨다가, 인체해부학 공부를 시작했다. 해부학을 위한 기본 용어에 대해 열심히 백지에다 써가며 외웠다. 3~4번 반복하니 좀 외워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1시간이 지나니 집중력이 떨어져서 의식적으로 쉬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공부할 때 좀 몰아세우는 타입인데, 공부도 오래 했고 수험생활도 했다 보니 요즘은 도저히 그렇게 못하겠단 생각이 든다. 그래서 꾸준히 오래가기 위해 공부하면서도 쉬는 시간을 가지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편이 되었다. 잠시 쉬면서 젤리를 까먹는데도 죄책감 따위는 없었다. 귀엽고 쫄깃하고 달고 맛있었다.


 다시 아이패드를 들여다보았다. 다음으로 외워야 할 건 세포와 조직에 대해서였다. 고등학교 때 생명과학 1과 2를 하긴 했지만, 굉장히 오래전이라 가물가물했다. 그나마 조금 남은 기억과 설명 페이지를 꼼꼼히 읽으면서 내용을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았다. 노트에 하나씩 개념을 써 내려가고, 내 나름의 설명을 달고, 마지막으로 외워주었다. 그렇게 집중하다 보니 문득 재밌다고 느껴졌다.


 그것도 잠시 어느 정도 집중하고 나자 다시 집중력이 떨어져 가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쉬는 느낌만 가지려고 동기랑 서로 퀴즈 내가며 가볍게 공부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 세포 파트를 잘 마무리했다. 휴. 밥을 늦게 먹었는데도 머리를 써서 그런지 다시금 배가 고파졌다. 카페 자리를 정리하고 다 같이 돈가스집으로 넘어갔다. 카레 메뉴가 보여서 돈가스카레를 시켰다.


 저녁을 든든하게 먹으니 좀 힘이 났다. 그래서 공부를 더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다 같이 맥날로 가길래 따라갔다. 각자 시키고 공부할 자리도 잡았는데, 머리가 아파오면서 도저히 공부를 잘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시킨 것만 디저트 겸 잘 먹고 나서는 인사하고 먼저 나왔다. 괜히 동기들한테 민폐 끼친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래도 나를 쉬게 하기 위해 기숙사로 돌아와서 씻고 옷부터 갈아입었다. 편안한 마음이 들면서 잠이 왔다. 선잠을 붙이고 나서 머리가 맑아진 것 같아 혼자라도 오늘 못한 분량을 하려고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끝나자마자 침대에 눕고, 피곤해서 바로 잠에 든 것 같다.


 컨디션이 안 좋을 때마다, 혹은 이유 모를 불안감이 차오를 때마다 나는 나라는 사람의 부족함을 온전히 느껴버리는 것 같다. 하지만, 예전과 조금은 달라진 게 있다면 내가 부족한 것도 괜찮다고 토닥일 수 있게 되었다는 점과 그로 인한 불안감도 수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컨디션이 안 좋은 건 체력 문제일 가능성도 크기에 러닝을 최대한 나가려고 노력한다는 점도 칭찬해주고 싶다. 실제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정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일요일은 일찍 눈이 떠졌다. 컨디션이 비교적 괜찮은 것 같긴 했다. 듣고 싶은 노래를 틀고, 책을 집어 들었다. 저번 주인가 교보문고에서 사 온 책을 이제야 들고 읽기 시작했다. 최근 사업자를 내고 쇼핑몰을 시작하다 보니 공부하고 알아볼 것들이 많이 생겨서 관련 책을 사 왔었다. 책을 읽다 보니 조금씩 감도 잡히고, 시도해 봐야 될 것과 할 것들이 생겼다. 슬그머니 자리 잡은 나의 일에 대한 불안감이 사라지는 기분도 들었다. 실제로 안정적으로 운영해 나가려면 멀었지만,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서 밥때에 맞춰서 반찬이랑 밥을 잘 챙겨 먹었다. 든든한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 인체해부학 책을 다시 펼치고, 세포 다음인 조직 파트를 정리했다. 구분만 짓고 최소한의 이해만 하면 돼서 빠르게 끝내고, 가장 중요한 뼈대 파트로 넘어갔다. 했던 내용이지만 다시 복습하고, 꼼꼼히 짚으며 공부했다. 생소한 영어단어도 많이 나오고, 이해도 하고 암기도 해야 하니 꽤나 어렵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래도 일요일은 공부에 흐름을 타서 그런지 저녁 시간까지 잘 집중해서 공부했고, 저녁 타임에 밥 먹고 나서는 내일 학교 갈 준비도 하고 씻으면서 쉬어갔다.


 다음 날, 서류를 준비할 것들이 있어서 동사무소랑 은행을 좀 다녀왔다. 오랜만에 올리브영에 들려서 구경하다가 페이스 각질케어 제품도 하나 샀다. 집이 아닌 기숙사라서 몇 개 빼먹고 안 가져온 것들이 있었는데 이때다 싶어서 구매한 것 같다. 그리고 마저 학교로 돌아가서 수업을 들었다. 공부하다 보니 해부학에서 모르는 게 좀 생겼었는데, 수업 이후에 동기들이랑 교수님께 질문드리고 답변을 받았다. 까먹을까 봐 최대한 빨리 정리해서 스터디 카톡방에도 공유했다. 조금 쉬다가 가계부 정리도 해보았다. 1일에 했어야 했는데, 미루다 보니 계속 미루게 된다.


 저녁을 먹고 놀고 싶어서 혼자 만화카페를 가보았다. 가볍게 1시간만 끊고 들어가서 30분 동안은 누워서 노래만 들었다. 한가로워서 너무 좋았다. 그리고 만화를 읽긴 해야 될 것 같아서 1~2권 집어서 펼쳤다. 사락사락. 술술 읽혔다. 머리가 가벼워지는 것 같아서 만화카페 올 때마다 힐링이 되는 것 같다. 레모네이드 한 모금도.


 요즘 따뜻한 거든, 차가운 거든 아메리카노를 너무 마시다 보니 레모네이드를 시키기 시작했다. 신 게 왜 당길까. 그렇게 힐링하다가 기숙사로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편맥을 하러 나왔다. 주말에 열심히 해서 그런지 공부가 너무 하기 싫었다. 동기 친구들이 모여있던 곳에 합류해서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다. 선선한 저녁바람도 불고, 먹고 싶었던 초콜릿 과자도 먹고, 맥주 한 잔 털어 넣으니 마음이 참 시원했다. 너무 늦으면 다음 날 지장이 갈까 봐 적당한 선에서 끊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하루를 다시 쉬어가니까 다시금 의욕이 생기는 듯했다. 수업 끝나고 던킨에서 도넛을 먹고 아아를 마시며 가볍게 공부했다. 그리고 내야 할 서류가 있어서 잘 챙겨서 제출을 먼저 마무리했다. 그리고 바로 스터디에 합류해서 진도를 뺐다. 문서작성이라는 수업에서 '의료문서' 작성을 위한 약어를 배우는데, 관련 용어를 정리하고 외우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그래도 다 외우고 나니 뿌듯했다.


 서류 제출도 마무리하고, 시험공부도 어느 정도 되어가는 듯하고, 컨디션도 괜찮다 보니 문득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행복에 의문이 들었다. 나는 왜 토요일과 달리, 지금 이렇게 다시 행복해졌을까. 내 생각이지만 내가 부족하다고 느낀 점에 대해 인지하고, 받아들인 뒤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해나갔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업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니 책을 읽고 실행에 옮겼으며, 공부가 어렵더라도 해야 할 분량을 계속해서 해나갔다. 놀고 싶을 때는 그 리듬에 맞춰서 하고 싶은 걸 했다. 동기인 친구들과 나를 같은 선상에 두지 않았다. 비교의 관점보다는 각자 주제는 같아도 목차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동기들이 사랑스러웠고 예뻤고 나의 하루하루도 의미 깊은 시간들로 채워지는 것 같다고 느꼈다.


 나는 이미 투표를 했기 때문에 선거일은 공부하는 날로 정했다. 당일, 스터디 멤버끼리 오전 10시부터 카페에 모여 공부를 시작했다. 해부학이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그런지 집중이 정말 잘 됐다. 꼼짝없이 오후 6시까지 카페에서 공부하느라 돈을 좀 많이 썼다. 도서관이 아니라서 괜히 눈치 보였기 때문. 나에겐 도서관은 낮에 공부하기엔 좀 힘든 곳이다. 도서관이 더 편한 사람도 있던데, 돈도 굳고 집중도 하고 일석이조인 셈이라 좋을 것 같기는 하다.


 공부하고 배고파서 떡볶이도 먹고, 서브웨이에서 쿠키랑 아아도 먹다 보니 공부 흐름이 깨져서 내일을 기약하고 스터디를 파했다. 하지만, 목요일은 정말 바쁜 날이었어서 학교 수업이 끝나고 해부학 동아리를 갔다 오니 금세 저녁 시간이 되었다. 저녁 학식이 치맥이 나온다고 해서 먹고, 바로 러닝을 하러 가려고 버스를 탔다. 그래서 목요일 공부는 물 건너갔다.


 러닝 때, 저녁이 헤비 해서 잘 못 뛸까 봐 걱정했는데, 7:00 조에 합류한 이래 처음으로 가장 오래 뛰었다. 다만 끝까지 가진 못했고, 반환점부터는 혼자 뛰었다. 그러느라 목표는 5km였는데, 알고 보니 6km 정도 뛰고 온 듯하다. 카이스트교 근처 갑천을 달렸는데, 날씨가 좋고 시원하고 빛이 비치는 저녁 강물이 너무 예뻐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은 들었지만, 뿌듯한 마음으로 마지막 스트레칭을 하고 크루와 헤어졌다. 버스 타고 오는 길에 멍 때리다가 유튜브도 보다 보니 어느새 기숙사에 도착해서 오자마자 씻고 잠에 든 것 같다.


 다음 날 피곤했는지 조금 늦게 일어났지만, 잠을 슬슬 깨고서 나갈 준비를 했다. 귀찮은 11시 교양 수업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막상 가니 또 재밌게 들었다. 게다가 수업이 평소보다 일찍 끝나서 점심도 빨리 먹을 수 있었다. 그간 못한 공부 진도를 내보려고 1시에 스터디를 하기로 했다. 모인 건 1시고, 공부를 시작한 건 2시였지만 그 이후로는 집중해서 열심히 진도를 뺐다. 그래도 해부학에서 이해해야 하는 부분과 최소한으로 외워야 하는 부분은 본 것 같다. 이제 시험까지 남은 시간 동안은 다른 과목도 병행해서 공부하면 될 것 같다.


 저녁으로는 닭갈비를 먹었는데, 마지막에 볶아먹은 볶음밥은 역시 너무 맛있었다. 이걸 위해 간 듯하다. 배고프다 먹으니 더 맛있었다. 2차로는 베라를, 3차로는 투다리에서 얘기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금세 밤 11시가 넘었다. 내일도 공부를 해야 하니 쉬기 위해 11시 반인가 되어서 파하고, 헤어졌다. 동기 중 몇은 공부하겠다고 24시간 하는 맥날로 향했지만, 나는 반드시 쉬어야 했다. 남은 시험기간은 단 9일이므로, 시간을 잘 써야 할 듯싶다.


 내가 하려는 작은 사업도,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쓰는 작가 활동을 시작한 것도, 20대 후반의 나이에 다시 시작한 공부도, 새로운 지역에서 나이 어린 동기와 선배들을 만나는 것도, 주 1~2회 꼭 챙기고 있는 운동인 러닝도 모두 나에게 없는 무언가로부터 시작되었다.


 사업은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있지만 물리치료사 이후에 클리닉을 운영할 때가 상상이 잘 안 돼서 경험이 될 것 같아서 시작한 것도 있다. 그리고 수험생활 하느라 힘들었어도 지쳐서 쉬이 내 마음을 정리할 글조차 쓸 시간이 없었는데, 그때 우울함이 주기적으로 찾아왔었다. 이런 나를 도와주었던 게 브런치의 글들이었고, 앞으로는 힘든 일이든 좋은 일이든 나의 시간들을 기록해나가고 싶어서 브런치 작가에 도전할 수 있었다.


 나는 언어 공부를 나쁘지 않게 했으나, 너무나도 좋아해서 일로 정착시키고 싶을 만큼 간절하진 않았던 것 같다. 언어 강사 분들을 보면 해봄 직해 보이다가도 막상 가르치기 위해 준비하고 갈고닦을 시간을 생각하니 재밌을 거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참 고민이 많았고, 단순히 회사를 갈 것만 생각했다. 대학을 다니거나 휴학했을 때도 그 어떤 것도 나는 좋아하는 일이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어서 정말로 많이 답답했고, 뭘 해도 부족하다고 느꼈다. 인턴이나마 다녀봐도 내가 할 일은 별로 없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하나라도 찾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기에 그래서 스물여섯 인 시절에도 나는 내가 잘할 수도 있을 것 같은, 그러면서도 좋다고 느낄만한 게 무엇인지 지속적으로 고민하며 지냈다. 어느 순간 그게 의료가 아닐까 하는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 들었을 때, 여러 가지 선택지 중에서 돌고 돌아 물리치료학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렇게 수능을 다시 공부했으며, 신입학이라는 무모해 보이는 선택을 강단 있게 할 수 있었다.


 언어 전공을 선택한 경우는 대학 수업 자체가 갠플이 많고 팀플이 적은데 그런 수업들이 때로는 매우 지루했다. 때문에 언어를 살리든 그렇지 않든 간에 사람들과 함께 협업할 수 있는 일을 나의 업으로 삼고 싶은 마음이 강해졌었다. 그런 이유가 있어서인지 나이는 좀 어린 친구들이라도 이런 동기들과 함께 생활을 해나가는 게 꽤 즐겁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힘든 순간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한편으로, 운동은 지속적으로 하고 싶지만 체력이 부족해서, 지속하기에 가장 쉬워 보이는 러닝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에게 없던 무언가로 인해 '있음'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되고, 자연스럽게 따라가다 보면 없다가도 있게 되는 것들이 생긴다. 그렇게 작은 것들부터 채워나가면 소소한 행복을 느끼게 되고, 나중에 작은 게 모여 큰 것들이 쌓인다면 성취감도 맛보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미래를 기대하며 현재를 즐겁게 살아가고, 과거는 추억으로 남겨두는 것이 '결핍'의 상태가 주는 선물 같은 마음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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