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신호등에서 멈춰야 하는 색은 레드
정열적인 사랑의 상징하는 색도 레드
이 묘한 일치는 수긍이 가는 부분이 있다.
어릴 적 막장드라마를 보는 걸 비웃었지만
막장드라마보다 더 막장으로 치닫는 영화를 보는
아주 이율배반적인 나는
사랑을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라고 보겠다고
다짐했으면서도
습관처럼 자극적인 사랑 영화를 보게 되었다.
좀 보면 어떠한가 관찰자 입장에서 보다 보면
일일연속극처럼 하루 빼먹어도 괜찮을 정도로
사랑이란 감정에 무뎌지겠지
합리화 같아 보이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안 보는 건 억압이다
(억압의 문제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루겠다)
차라리 막장 멜로 영화를 재밌게 본 후
그 영화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살펴보고
부적절한 생각과 감정을
기적 수업의 방식으로 용서하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다
잡설이 길었다 영화 리뷰를 시작한다
주인공은 부유한 집에 시집을 가서
가정을 꾸리는 전업주부이다.
겉보기엔 육체적으로 힘든 건 전혀 없어 보인다.
주인공은 모든 게 완벽한 환경 속에서
미묘하게 기분 나쁜 대우를 받으며 살아간다.
아주 희미하게라도 누군가가 나를 하대한다면
그 누군가가
그 어떤 물질적 풍요와 즐거움을 주더라도
상종하지 말아라.
그 누군가가 혈육이어도 마찬가지이다.
이게 행복을 위한 첫 번째 단계이다.
이 첫 번째 단계를 지키지 않고
하대를 감내하며 물질적 풍요와 즐거움을
누리려 하는 자는 불행을 피할 수 없다.
자신의 존엄보다 관계가 우선시 될 수 없다
주인공은 남편의 부부동반 행사에 갔는데
우연히 전 애인을 만난다.
둘은 바로 키스를 박아버리는데.
만나자마자 불륜 데이트
주인공은 전 애인의 권유로
전 애인이 다니는 건축회사에 다니게 된다.
회사 직장 상사는 주인공에게 작업을 건다.
직장 상사는 주인공에게
부모님이 이혼하고 어머니 손에 자라지 않았냐고
물어본다.
주인공이 그렇다고 말하자
직장 상사는
'내가 사귄 여자들의 80%가
부모님이 이혼하여 어머니 손에서 자랐다'라고
말한다.
사랑에 빠지는 건 정해져 있는 것일까?
유물론적 인과율에 따르면
누구와 사랑에 빠지는 건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정해져 있다
관념론적 인과율에 따르면
누구와 사랑에 빠질지는
개인의 의지에 달려 있다
관념론적 인과율은 타당도가 떨어지는데
관념론적 인과율은
개인의 의지 또한 유물론적 인과율에 따른
뇌의 화학작용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을
방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물론적 인과율에 따르면
인생이란 운전대가 없는 자동차를 타고
자신이 차의 방향을 결정하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낭떠러지 끝으로 굴러가는 것이다.
유물론적 인과율은 꽤 논리적이고 치밀해 보인다.
영리한 사람들은 유물론적 인과율을 믿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삶이 이미 정해져 있기에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해도 그 결과는
그 이전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우울해지기 쉽다
기적 수업에 따르면
인간은 선택의 순간마다
수많은 인생의 각본을 선택할 수 있다
단 그 샐 수 없이 많은 각본은 이미 완성되어 있다
시공간 우주는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이론을 떠올려보라
마치 한 그루의 나무처럼
시공간 우주의 시작부터 끝은
선택의 분기점마다
각본이 나무의 가지처럼 갈라져 나온다
이 나무가 한순간에 만들어졌고
우리는 과거에 만들어진 나무의 아주 작은 일부분을
보고 있을 뿐이다
중요한 점은 이 나무가 상상 속의 이야기처럼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수업에서는
사랑을 선택한다는 착각을 할 뿐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랑의 각본을 선택하든지
그 각본은 이미 완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업을 믿을지 말지는
유물론적 인과율이나 관념론적 인과율을
선택하는 것처럼
개인의 자유이다
나는 의심이 많기에
처음에는 기적 수업의 신학을
지적으로만 공부하고 이해했을 뿐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았다
그래서 기적 수업의 가르침을
전적으로 따르고 실천하면
그에 필요한 물질적인 수단은 모두 주어진다는
수업의 내용을 읽었지만 돈은 따로 벌었다
요즘은 수업의 가르침이 옳고
내가 틀렸다는 걸 경험을 통해
여러 번 확인했기 때문에
수업에 대한 의심을 거두고
경제활동을 아예 놓았는데
수업의 말이 옳은지 틀린 지는
대략 3년 후 나의 미래가 증명할 것이다
3년 동안의 생활비만 있기 때문이다
수업이 맞다면
나는 수입이 없어도 수업에 관한 글을
계속 쓰고 있을 것이며
수업이 틀리다면
나는 SNS 상에서 사라져 어디에선가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직장 상사는
주인공의 전 애인 또한 주인공과 같은 가정환경에서 자라고
모든 것에 애정이 없어 보인다는 점에서
주인공과 주인공의 전 애인이 닮았다고 말한다.
동병상련으로 시작되는 사랑은
그건 상대방의 현재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과거의 상처를 좋아하는 것이다
과거의 상처를 되새기면서 행복할 수 없다
게다가 과거의 상처를 좋아한다니 난센스 아닌가?
그런데 왜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한 상처를 가진 사람과
사랑하게 되는 것일까?
그건 마음이 원래 그렇다.
마음이 처음부터 그렇게 절망스런 사랑에 빠지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누가 마음을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만들었단 말인가?'라는 질문은 글의 주제에 벗어나므로
'마음이 이런 사랑에 빠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좀 더 초점을 맞추겠다.
우리의 마음(에고, 자아)은
좋은 기억이든 나쁜(상처받은) 기억이든
이 세상을 진짜처럼 믿게 해줄
자극적인(특별한) 기억이면 모두 간직하려고 한다.
왜냐면 이 세상이 가짜이면
자신(마음)도 가짜라는 걸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처받은 기억을 되살려주는 대상은
마음이 진짜라는 믿음을 유지시켜주는
상처를 잊지 않게 해주기에
마음은 비슷한 상처를 지닌 대상에 끌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마음의 다른 수준에서는
나와 비슷한 상처를 겪은 사람이야말로
나를 잘 이해해 주고
나를 구원해 주고
나의 안식처가 되어줄 거라는
착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함께 아파하는 건 구원이 아니다
이제 마음의 이런 원리를 알았으니
마음의 이런 원리로 인한
고통스런 연애의 반복을 멈추는 방법을 살펴보자
스스로 과거의 고통스런 기억을 바라보고
그 기억 속의 장면과 일어난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자신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여
과거에 일이 자신에게 상처가 되게 했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된다
비유를 하자면
과거 나와 누나들은 2차 성징이 발달되기 전에는
큰 대야에 목욕물을 받아서 같이 들어가서
때를 불렸다
그런데 어머니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누나들은 항문의 구조가 궁금하다며
내 영덩이를 벌려서 쳐다봤었다
자 이 기억은 어떻게 보면 수치스러울 수 있겠지만
이 기억이 수치스럽다면
왁싱이나 대장 내시경을 받을 때도
수치스러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왁싱이나 대장 내시경은 수치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모든 일어난 일의 의미의 결정은
남이 아닌 자기 자신이 부여하기 때문이다.
어릴 적 항문을 관찰당한 경험을
나 자신이 부정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그 경험은 수치스러운 경험이 되지 않는 것이고
대장 내시경을 수치스러운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면 수치스러운 경험이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경험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데 어떤 경험이 고통스럽게 지각된다면
기존의 과거 기억을
더 이상 감정이 일어나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고
'그 기억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라고
자신이 부여한 의미를 부정하면
웬만한 기억은 스스로 극복 가능하다
이 원리를 PTSD에도 적용 가능하다
*격한 분노가 일어나서 이성을 잃게 하거나
발작을 일으킬 수 있는 기억은
혹시 모를 사고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을 곁에 두고 이 원리를 적용하는 것이
안전하다
주인공이 가장 밝게 웃을 때는
이 직장 상사와 있을 때지만
주인공은 전 애인과 만난다.
심지어 전 애인과 만났을 때 잘 웃지도 않는다
사람이
자신과 비슷한 상처를 품은 사람을 선택하는
다른 이유를 살펴보자
사람의 마음의 설계도를 펼쳐보면
마음은 우월성을 추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래서 상대를 가련하게 여겨서 우월함을
챙기기 때문에도 상처를 품은 사람에게 끌린다
병약함과 우월함은 대극처럼 서로 끌린다
병약한 자는 스스로 아프기로 선택함으로써
우월한 자의 사랑(관심)을 받고
우월한 자는 사랑(관심)을 줌으로써
병약한 자보다 우월한 느낌을 얻는다
뭐 내 말이 틀리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의 뜻대로 하시라
말리지는 않겠다
원칙적으로는
이 세상의 모든 경험은 의미가 없기에
행복한 사랑도 불행한 사랑도 없다
내 말이 타당하다고 생각되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동병상련을 조심하시라
그렇다면
상대방의 상처를 품어주는 모든 사랑은
병적인 사랑인가?
그렇다
상대방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상대방을 병적인 관계의 사슬에서 풀어줘라
건전한 관계란
공동 목표를 가지고
그 누구도 피해 보지 않으며
함께 이득을 취하는 관계이다
일반적인 거래적인 관계도 나쁜 게 아니다
손님이 식당에서 잠시 식사를 하고 나오는 것은
거래적인 관계의 보편적인 예이다
아씨 뭐야 눈이 왜 저렇게 나왔어;;; 함께 출장 나와서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운동 많이 하는 주인공과 주인공의 전 애인
주인공은 퇴근이 늦어져 딸을 늦게 데리러 갔는데
딸이 주인공을 기다리다가 다치게 된다.
남편은 주인공을 책망한다.
삶이란 뜻하지 않는 일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주인공이 전 애인을 좋아했을 때는
전 애인이 유부남이었고
주인공이 돌싱이 된 전 애인을 다시 만났을 때는
주인공이 유부녀가 되어있다.
주인공이 부잣집 남자와 사귈 때는
부잣집 남자가 은근 좀생이 마마보이인 줄은
몰랐을 것이다
주인공이 쓰러트린 거 아님
(몸 아픈데 운동 격하게 하니까 쓰러지지ㅋㅋㅋ)
주인공의 전 애인은 시한부 환자인 게 밝혀진다
주인공처럼
병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을 본다면
조언하지 말고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 돼라
주인공은 새해 가족행사에 친어머니를 부른다
주인공의 친어머니는
주인공의 시아버지가 남편 데리고 오라는 요구에
기분 나빠 자리를 뜬다
주인공의 어머니는 아버지와 이혼을 한 상태이지만
주인공은 시부모님에게 이를 감췄다
불륜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마음의 성질이 원래 그렇다
마음은 변화를 추구한다
주인공의 어머니 말이 맞다
뭘 하든지 선택에 따른 결과는 피할 수 없다
그러니 저 주인공의 어머니처럼
지나가는 사람이 되어라
사람의 마음(에고, 자아)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선택만으로 인한
실패를 겪지 않으면
(실패에서 남 탓할 거리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절대 자신에게서 실패의 원인을 찾지 않는다
(남 탓을 한다)
그래서 남을 위해서
가르치려 들지도 도우려 들지도 마라
역설적이게도 당신의 그 간섭으로 인해
상대방은 실패를 하게 되면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지 않고
당신이 간섭해서 또는 방해해서 그렇다고
당신 탓을 하게 된다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옛말이
아직도 살아있는 이유는
인간 마음의 본성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의 몸으로 인간의 사고방식을
부지불식간에 쓰고 있는
꿈을 꾸는 자다.
그러니 인간의 사고방식(자아)에서 벗어나라
벗어나는 방법은 기적 수업에 있다
남편이 이런 파국의 원인이 자신 때문이냐고 묻자
주인공은 자신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아의 관점에서는
육안으로 보이는 일의
좋고/나쁨, 옳고/그름을 판단하지만
수업의 관점에서는
육안으로 보이는 모든 게 환영이기에
판단의 불필요함을 가르친다
수업의 관점에서는 이 모든 게 환영이기에
판단하지 않고 환영을 묵묵히 지나가라고 한다
여정의 끝에
오직 신과 그리스도의 전일함만이 존재한다
자아의 관점에서는 각자 옳다고 여기는 정의가 있다
정의는 개별적인 마음마다 다르다
그래서 꿈속에서 정의를 쫓으면 갈등을 피할 수 없다
성령의 관점에서는
허상은 사라져 버릴 허상일 뿐이기에
정의 내리지 않는다
당신은 며칠 전에 먹었던 점심 메뉴에
특별한 이름을 붙여서
매일 그 메뉴를 기억하는 게
필요하다고 여기는가?
성령은 바보가 아니라서
항상 성령에 의지하여 성령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갈등이 있을 수 없다
인간적인 사랑은 정말 달콤한 환영이며
예수 또한 막달라 마리아와
인간적인 사랑을 즐겼다
다만
그 둘의 관계의 목표는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었다
타협하지 않고 성령의 인도만을 전적으로 따르는 것이
그들의 공통 목표였다
수업의 성령과 기독교의 성령은 뜻이 다르다.
그리고 수업은 다른 종교를 배격하지 않는다.
단지 예수가 자신의 가르침의 주인이기 때문에
기독교의 무지로 인해 오염된 자신의 가르침을
교정하기 위해 수업을 새로 내놓았을 뿐이다.
과거의 사실로 여겨졌던
아인슈타인의 정적 우주 모델이
현대에 이르러 거짓으로 밝혀졌듯이
사실로 믿어지고 있는 기독교의 오류도 이제
맹목적인 믿음에서 벗어나 다시 살펴볼 때가 되었기에
예수는 기적수업으로 우리에게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