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괜찮지 않다면

by 미니

언젠가 내 손과 발을 사진 찍은 적이 있었다. 먼 훗날, 내 젊은 시절의 손과 발, 탱탱한 피부, 촘촘히 박혀있는 털을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걱정에 당장 핸드폰을 꺼내 찍었다. 나도 나이를 먹어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기 때문일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엔 주름이 가득하고 머리가 듬성듬성 남아있는 어른들을 보면 나와는 다른 존재라고 생각했었다. 마치 '어른'이 하늘에서 뚝-떨어진 것 마냥 다른 생명체 같았다. 심지어 사촌언니가 22살이라고 했을 땐, 아 정말 나이가 많다 라고 어렴풋이 생각했던 게 기억난다. 웃기게도 지금 내 나이는 22살보다 많은 25살이고, 하늘에서 뚝-떨어질 거 같았던 어른이 되어있다. 나도 얼굴에 주름살을 걱정하게 되었고, 피부 노화에 좋은 습관에 귀가 솔깃해진다. 그래서인지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면 그 사람들의 젊은 시절을 상상하게 된다. 어른은 한순간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내가 시간이 지나면 저렇게 된다는 걸 자각했기 때문이다. 아 저 할머니도 피부가 곱고 아주 아름다웠을 시절이 있었을 거야. 저 할아버지도 머리카락이 풍성하고 멋을 내고 다녔던 20대 시절이 있었을 거야. 하면서 할머니 얼굴에서 주름살을 지우고, 약간 촌스러운 디자인의 옷을 지워내며 멋대로 20대 모습을 지어내 본다. 나는 25살을 살면서 내 나름대로는 일이 참 많고 속 시끄러운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60살이 넘은 어른들을 보면 저 사람은 내가 힘든 거보다 갑절은 더 힘들었을지 궁금하다. 나는 내 25년을 뒷바라지하는 것조차 힘든데, 저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대단하다, 그래 내가 힘든 건 인생을 사는 과정 중의 하나야 라면서 스스로를 위로 아닌 위로하기도 한다.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정지오는 이렇게 말한다.


"산다는 건 늘 뒤통수를 맞는 거라고..
인생이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어서
절대로 우리가 알게 앞통수를 치는 일은 없다고... 나만이 아니라 누구나 뒤통수를 맞는 거라고 그러니 억울해말라고.. 어머니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니 다 별일 아니라고.. 하지만 그건 육십 인생을 산 어머니 말씀이시고 아직 너무도 젊은 우리는 모두가 다 별일이다. 젠장..."


나는 과연 육십 인생을 살았을 때, 저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있을까. 정말 모든 게 다 별일 아닐 아닐까.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힘들어할 필요가 없을까. 하지만 만약 그 때도 별일이 아니면 어떡해야 할까. 그때도 힘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서 나는 지금 당장 괜찮아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괜찮지 않으면 시간이 흘러도 괜찮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있었던 일을 없었던 일로 하기 힘들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나는 좀 운이 없었다고 되뇌는 것이다. 그러면 내 탓이 아니게 되고, 길바닥에 있는 모난 보도블록에 발을 걸려 넘어지는 것처럼, 그렇게 모난 운이 잠깐 나의 길에 있었구나- 하고 생각할 것이다. 결국엔 그 모난 보도블록을 빼내어 다시 콘크리트를 발라 제대로 끼워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육십 인생을 산 정지오 엄마도 이 모난 보도블록을 다시 끼워 넣고 평평하게 만들고서야 위에 처럼 말할 수 있던 게 아녔을까. 그러면 나도 육십즈음엔 모든 건 다 별일이라고, 다 지나가는 바람일 뿐이라고 젊은이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툭툭 뱉을 수 있을까.


나에게 콘크리트를 발라 제대로 끼워 넣는 행동은 지금 내 보드라운 살결을 사랑하는 것이다. 조금 통통해서 옷핏이 예쁘게 받지 않는 몸매일지라도 스스로 비난하지 않고 가꾸며 노력하며 아끼고 싶다. 소녀시대 윤아처럼 가는 뼈대가 아니라 울퉁불퉁하면서도 짧아서 객관적으로 별로 예쁘지 않은 내 손가락을 좋아하고 싶다. 스물다섯 치고는 양호한 내 피부를 앞으로 마음껏 쓰다듬고 싶다. 폭식으로 스트레스를 풀지 않을 것이고, 자학행위마냥 술을 들이붓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새벽 밤을 지새우지 않을 것이고, 커터칼로 내 예쁘고 탱탱한 피부를 더 이상 긋지 않을 것이다. 중학교 때 들었던 폭언을 자꾸 떠올리지 않을 것이며, 고등학교 때 들었던 나에 대한 가십거리를 들었던 기억은 이제 고이 접어 귀퉁이에 버릴 것이다. 나에게 자신만의 기준을 강요하는 부모님에게 좀 더 자유로워질 것이고, 내가 좋아하는 취미를 하고 언젠가 고양이를 꼭 키우겠다는 희망을 간직한 채 지금을 더 즐길 것이다.


아픈 기억보다는, 좋은 기억을 많이 떠올리고 싶다. 내 소중한 대학시절, 그 시절만의 공기와 웃음소리를 더 소중히 기억하고, 잔디밭과 테라스와 별이 반짝 빛나는 밤을 함께 기억할 거다. 친구 자취방에서 열명이 넘게 빼곡히 앉아 자취방엠티를 했던 것도, 학교 앞 호프집에서 일을 했던 것도, 맛있는 이모밥을 매주 금요일마다 먹을 수 있었던 것도, 토론대회를 했던 것도, 동아리 활동을 했던 것도, 1년에 백 명이 넘는 사람을 만나볼 수 있었던 것도, 기타 배워보겠다고 동아리 3개를 전전했던 것도, 연애한다고 공부 뒷전으로 해서 에프 받아본 기억도, 미친 듯이 데이트만 했었을 때도, 미친 듯이 공부만 했을 때도, 미친 듯이 술만 퍼마시고 하하호호 떠들고 놀 때도, 복학했을 때 여행 동아리에서 있었던 복잡한 인간관계들까지.......... 모두 다 잊어버리지 않고 내 방을 빼곡히 채우게 할 거다.



나는 나를 좋아하고 싶다. 육십 인생까지 가는 길을 꽃으로 가득 채워 내가 지나온 길을 흐뭇하게 바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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