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거나 또 다른 시작이거나
대표실은 낮게 드리워진 햇빛과 묵직한 가구들로 인해 일종의 밀실처럼 느껴졌다. 벽에 걸린 동양화 한 폭만이 유일한 생동감을 부여할 뿐이었다. 우민호 대표는 책상 위에 놓인 태블릿 PC를 가볍게 탭 했고, 맞은편 소파에 앉은 이일호 신임 팀장의 눈빛은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이 팀장, '취업 고민 수집'이라는 명칭, 다소... 위장막 같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 대표가 미소를 지었다.
이 팀장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명칭 그 자체보다, 저희가 수집해야 할 '고민'의 종류가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표면적인 취업 정보를 넘어선, 일종의 사각지대에 놓인 목소리들 말입니다."
"정확합니다." 우 대표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팀의 본질은 데이터 분석이 아닌, '해결사'의 전 단계입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당신 팀의 첫 번째 공식 임무를 전달하겠습니다."
우 대표는 태블릿 PC를 이 팀장 쪽으로 밀었다. 화면에는 익숙한 조직도가 떠올랐으나, 한 부분이 붉은색으로 강조되어 있었다. 바로 부산센터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유민서 팀장'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유 팀장에게서 최근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부산 지역에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들 사이의 취업 고민, 특히 인력 공급망의 구조적 문제와 관련된 심각한 사각지대 보고서입니다. 유 팀장은 이 문제를 직접 파헤치려다 공식적인 채널로 접근하기 어려운 민감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우리는 그녀를 보호하고, 그녀가 파악한 현장 정보에 힘을 실어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투명한 데이터를 원합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의 진짜 목소리를..."
이일호 팀장은 자료를 빠르게 훑었다. 유민서 팀장의 보고서는 매우 구체적이었고, 단순한 민원 수준이 아닌, 지역 사회의 노동 시스템 깊숙한 곳에 뿌리내린 어두운 그림자를 암시하고 있었다.
"미션은 간단합니다. 유민서 팀장과 합동하여, 이 사각지대의 고민을 '수집'하고 그 이면의 구조적 문제를 파헤치는 것. 그리고 이 일은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되어야 합니다. 공식적인 출장이 아닌, 내부적으로 처리되는 특급 임무입니다."
"적임자는 누구로 보십니까?" 이 팀장이 물었다.
우 대표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손가락으로 팀원 두 명의 이름을 가리켰다.
"채민서와 카림입니다."
이 팀장은 순간적으로 의아함을 느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채민서의 학습력과 카림의 다국어 능력, 그리고 이질적인 환경에 대한 이해도가 이 미션에 가장 적합합니다. 유 팀장의 현장 경험과 결합된다면, 완벽한 시너지를 낼 것입니다. 이들의 공식적인 명분은 '부산센터 업무 지원을 위한 특별 파견'입니다."
우 대표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즉시 준비하여 이들을 부산으로 보내겠습니다.
그리고 대표님 임무명은… '블라인드 스팟(Blind Spot) 프로젝트'로 명명하겠습니다."
이일호 팀장은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블라인드 스팟.. 블라인드 스팟이라... 이 팀장님은 작명 하나도 센스 있게 잘 짓는군요"
우 대표는 이일호 팀장의 작명 센스에 감탄하며 이일호 팀장의 열정적인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며칠 뒤, 부산행 KTX 열차 안.
채민서는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푸른 풍경을 바라보았다. 옆자리에는 카림이 조용히 앉아 헤드폰을 통해 음악을 듣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부산센터 직원용 출입증과 함께, 이 팀장에게 전달받은 문자 메시지를 읽고 있었다.
‘고민 수집은 수단일 뿐. 목표는 진실을 보는 눈을 갖는 것. 유민서 팀장은 이 프로젝트의 핵심 조력자이며, 이미 현장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진실에 근접해 있습니다. 그녀의 지침과 판단은 절대적입니다. 그녀를 중심으로 움직여 현장의 모든 사각지대를 밝혀내십시오. 그리고 이번 특별 임무의 작정명은 '블라인드 스팟 프로젝트'로 명명하겠습니다. 부디 많은 것을 배우고 복귀하길...’
이일호 팀장 특유의 냉철함이 묻어나는 지시였으나, 유민서 팀장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강조하고 있었다.
"카림, 부산 도착하면 유민서 팀장님 만나러 가기 전에, 우리 먼저 어디부터 가봐야 할까?"
채민서가 속삭이듯 물었다.
카림은 헤드폰을 벗고 특유의 무심한 눈빛으로 채민서를 바라보았다.
"유 팀장의 보고서에 언급된 외국인 전용 식당, 거기부터요. '고민'은 보통 배를 채우는 곳에서 가장 솔직하게 나오니까. 하지만 우리는 유 팀장이 안전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주변을 정리해야 합니다."
그들의 대화는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출장 직장 동료들의 대화였다.
하지만 그들의 가슴속에서는 이미 '블라인드 스폿 프로젝트'라는 비밀 작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부산의 항구와 공단 깊숙한 곳에 숨겨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목소리들을 찾아서...
기차가 부산역에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채민서와 카림은 짐을 챙겨 플랫폼으로 내려섰다.
늦여름의 습한 공기와 바다 냄새가 그들을 맞았다. 이곳이 그들의 새로운 무대였다.
채민서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중얼거렸다.
"좋아, 부산. 우리가 유민서 팀장님을 도와 숨겨진 고민들을 수집해 주지."
그때, 그녀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유민서 팀장이었다.
채민서는 망설임 없이 전화를 받았다.
"팀장님, 저희 방금 부산역에 도착했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유 팀장의 활기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서 씨, 카림 씨, 부산에 온 걸 환영해요! 나 지금 부산역 4번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짐 풀 시간 없어요, 미안하지만." 유 팀장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도착하는 대로 새로운 업무 바로 시작해 볼까요?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고민'들이 많거든요."
채민서는 카림과 눈을 마주치며 입가에 묘한 웃음을 지었다.
카림 역시 미소로 화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특급 임무는, 부산역에 발을 딛는 순간 이미 시작된 것이다.
- The End or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