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을 함부로 의심하지 않기
유민서 팀장을 부산으로 떠나보낸 다음 날 오전 10시, 사무실에는 묘한 긴장감과 함께 새로운 기대감이 감돌았다. 팀원들은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새로 부임할 팀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민서 팀장이 떠난 자리는 말끔히 비워져 있었지만, 그녀의 빈자리는 여전히 크게 느껴졌다.
정각 10시, 사무실 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모두의 시선이 문을 향했다. 문가에 서 있는 남자는 유민서 팀장이 말했던 대로였다. 깔끔한 슈트 차림에, 날카로우면서도 유머러스한 인상. 연예인 신하균과 비슷하게 생긴 얼굴에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의 이름표에는 '이일호 팀장'이라고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이일호 팀장은 팀장 자리를 쓱 한번 훑어보더니, 우리 팀원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환하게 웃으며 박수를 세 번 쳤다.
“반갑습니다! 우린 돈을 남기는 것이 아닌, 사람과 신뢰, 인연을 남기는 ‘더 드림 취업고민수집팀’에 이. 일. 호 팀장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유민서 팀장만큼이나 호탕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더 유머러스하고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팀원들은 그의 유쾌한 인사에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 채민서는 이일호 팀장의 첫인상에서 묘한 편안함을 느꼈다. 유민서 팀장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지만, 그 역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이일호 팀장은 팀원들과 한 명씩 눈을 맞추며 악수를 청했다.
“채민서 사원,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 팀의 에이스라고 하더군요?”
이일호 팀장은 민서의 손을 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민서는 얼굴이 살짝 붉어졌지만, 그의 유쾌함에 저절로 미소 지었다.
“차일혁 대리, 우리 민서 팀장님 말로는 당신이 없으면 팀이 안 돌아간다고 하더군요. 잘 부탁합니다!”
“신민아 사원, 우리 팀의 마스코트이자 마음을 어루만지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들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카림 씨, 당신의 꿈에 대해 들었습니다. 이곳에서 그 꿈을 꼭 이룰 수 있도록 제가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이일호 팀장은 팀원들 각자의 특징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유민서 팀장에게서 미리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았다. 그의 유머러스함 속에는 사람에 대한 깊은 관심과 진중함이 숨어 있었다. 팀원들은 이일호 팀장의 유쾌하면서도 진중한 모습에 금세 마음을 열었다.
시간의 흐름, 그리고 팀의 진화
이일호 팀장이 부임한 지 어느덧 6개월이 더 지나, 채민서가 TF팀에 입사한 지 1년이 되었다. 이일호 팀장의 지휘 아래 더욱 활기 넘치는 곳으로 변모했다. 그는 유민서 팀장과 비슷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지만, 업무 방식은 좀 더 유연하고 창의적이었다. 그는 팀원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했고, 새로운 시도를 장려했다.
TF팀은 이제 단순히 '취업 고민 수집팀'이 아니었다. 그들은 '삶에 대한 고민을 수집하는 팀'으로 진화했다. 취업 문제뿐만 아니라, 인간관계, 가족 문제, 꿈과 열정, 그리고 사회적 편견과 차별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삶 전반에 걸친 다양한 고민들을 듣고 함께 해결책을 찾아나갔다.
김용수 씨는 새로운 직장에서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고, 지희연 씨는 심리상담학 대학원에 합격하여 학업에 매진하고 있었다. 류지혁 씨는 자신의 음악으로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뮤지션으로 성장했고, 박민영 씨는 대학원 생활과 함께 장애인 인권 운동에 참여하며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카림 씨는 이제 팀의 정식 직원이 되어, 자신과 같은 해외 노동자들을 위한 컨설팅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었다. 이 모든 변화의 중심에는 팀이 있었다.
채민서는 지난 1년간 자신이 얼마나 변했는지 깨달았다. 처음에는 완벽한 스펙과 성공만을 쫓던 그녀는 이제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그들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두게 되었다. 그녀는 더 이상 '컨설턴트'라는 직함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하는 일이 얼마나 의미 있고 소중한지 알고 있었다.
새로운 만남, 그리고 또 다른 깨달음
어느 날, 대학교에서 체험형 인턴 학생 2명이 취업고민수집팀으로 왔다. 한 명은 이쪽 일에 관심이 많아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배우려 하는 친구였고, 다른 한 명은 학교에서 가라고 해서 마지못해 온 듯한 친구였다. 그는 늘 시큰둥한 표정이었고, 업무에도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예전의 채민서였다면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을 친구였다. '왜 저렇게 의욕이 없을까?', '시키는 일이나 제대로 하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1년 동안 수많은 의뢰인들을 만나며 그녀는 달라져 있었다. 그녀는 그 친구에게서 과거의 류지혁 씨나 박민영 씨의 모습을 보았다. 겉으로는 무관심해 보이지만, 그 안에 어떤 아픔이나 고민이 숨겨져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시간, 민서는 마지못해 온 인턴 친구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혹시… 이쪽 일이 잘 안 맞아요? 아니면 혹시 다른 고민이라도 있어요?”
민서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친구는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당혹감과 함께 묘한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아… 아니요. 그냥… 제가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요. 학교에서 여기 오라고 해서 오긴 했는데….”
친구는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감 없는 말투가 묻어났다. 민서는 그에게서 류지혁 씨의 내성적인 모습을 보았다.
“괜찮아요. 저도 처음에는 그랬어요. 제가 뭘 잘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잘 몰랐죠. 그런데 이곳에 와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저 자신을 알아가게 됐어요.”
민서는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녀는 그 친구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의 마음을 이해해 주려 노력했다. 그녀는 그 친구에게서 어떤 스펙이나 능력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가진 고민을 들어주고, 그가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며칠 동안 민서는 그 친구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의 가족 이야기, 친구 관계, 그리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까지. 친구는 처음에는 경계했지만, 민서의 진심 어린 공감에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그는 자신이 왜 이쪽 일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스스로 깨달아갔다.
민서는 그 친구의 변화를 보며 다시 한번 깨달았다. TF팀은 단순히 취업 고민을 해결해 주는 곳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의 내면에 숨겨진 가치를 찾아주는 곳이었다. 그녀는 이제 '취업 고민 수집'이 아니라 '삶에 대한 수집'이라는 이일호 팀장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변치 않는 인연, 유민서 팀장
유민서 팀장은 부산센터로 발령받은 후에도 종종 TF팀에 전화를 걸어왔다. 그녀는 여전히 호탕하고 직설적이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팀원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어이, 채민서! 잘 지내고 있냐? 너 없으니까 여기가 좀 심심하네?”
어느 날, 유민서 팀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민서는 환하게 웃었다.
“팀장님! 부산은 어떠세요? 잘 지내시죠? 저도 팀장님 없으니까 좀 허전해요!”
“하하하! 뻥치시네! 너 요즘 이일호 팀장이랑 죽이 잘 맞는다고 소문 다 났더라? 아주 그냥 물 만난 고기처럼 날아다닌다며?”
유민서 팀장의 농담에 민서는 웃음을 터뜨렸다.
“팀장님도 부산에서 잘 지내시죠? 혹시… 이번 여름휴가 때 부산에 놀러 갈까 하는데… 괜찮으세요?”
민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유민서 팀장은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호탕하게 웃었다.
“뭐? 놀러만 와서는 안 된다! 이왕 오는 김에 부산센터에서 특강이라도 하나 해주고 가야지! 하하하!”
유민서 팀장의 농담에 민서는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유민서 팀장과의 관계가 단순한 상사와 부하 직원을 넘어선, 깊은 유대감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꼈다. 그들은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자, 인생의 동반자였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
TF팀 사무실. 채민서는 자신의 책상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셨다. 모니터에는 새로 들어온 취업 고민 상담 신청 메일들이 빼곡하게 쌓여 있었다. 카톡 알림음이 울렸다. 지희연 씨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민서 사원님, 저 대학원 첫 시험 잘 봤어요!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민서는 미소 지었다. 그녀의 마음은 평화로웠다. 지난 1년간 그녀는 많은 것을 잃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었다. 완벽한 스펙과 사회적 성공이라는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진정한 자신의 가치를 찾았다.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들의 삶에 공감하며,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진정으로 원했던 일이었다.
이일호 팀장은 회의실에서 차일혁 대리와 카림 씨와 함께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신민아 사원은 의뢰인에게 전화를 걸어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고 있었다. 사무실에는 활기찬 에너지가 가득했다.
채민서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두 손을 깍지 꼈다. 그리고는 크게 외쳤다.
“아자! 파이팅!”
그녀의 목소리에 팀원들은 모두 그녀를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피곤함 대신, 내일을 기대하는 설렘과 열정이 가득했다.
창밖으로 따뜻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어제는 어제의 해가 졌지만, 오늘은 새로운 해가 떴다. 그리고 내일은 또 다른 해가 뜰 것이다. 채민서는 그 사실을 믿었다. 그녀는 자신이 하는 일이 얼마나 가치 있고 소중한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치를 함께 만들어가는 팀원들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 그리고 취업고민수집팀은 오늘도, 내일도, 사람들의 삶을 수집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을 것이다. 채민서는 그 미래가 기대되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진정한 자신의 길을 찾았고, 그 길 위에서 영원히 빛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