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우리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연극에 열광한 진짜 이유
나는 이 연극을 보기 위해 무려 두 달 전부터 ‘피켓팅(피 튀기는 티켓팅)’이라는 전쟁을 치렀다. 단순히 지브리 스튜디오의 명성에 기대거나, 어린 시절의 추억을 소비하려는 가벼운 마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연극이라는 아날로그 무대 위에서 이 명작이 어떻게 재탄생할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버튼 하나면 AI가 이미지를 생성하고, 디지털로 모든 것이 매끄럽게 대체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나는 그 매끈함에 지쳐 있었다. 투박하더라도 사람의 손길이 닿은 것, 땀방울이 모여 만들어낸 ‘수작업의 결실’이 그리웠다. 이번 지브리 연극은 거대한 디지털 스크린 대신 오로지 사람의 호흡과 움직임으로 채워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직감했다. 이것이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던 ‘어떤 본질’을 건드려줄 것이라고......
우리는 사회라는 거대한 온천장 (아부라야(油屋)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가 일한 온천장 )에 들어서는 순간, 진짜 내 ‘이름’을 잃어가는 것은 아닐까? 연극을 보는 내내 이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우리는 직책이나 직급, 혹은 누군가의 역할로 불리는 것에 익숙하다. 단순히 ‘내 이름’ 석 자로 불리는 것의 가치에 대해 잊고 산 지 오래다. 유바바가 치히로의 이름을 빼앗아 그를 노동력(센)으로만 취급했듯, 우리 사회 역시 개인의 본질보다는 기능과 효율을 우선시한다. 잃어버린 이름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치히로의 모습은, 어쩌면 스펙과 경쟁 속에서 진짜 ‘나’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우리 90년 대생들의 자화상이 아닐까.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지브리를 만나며 자란 90년대 중후반 세대에게 치히로는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이토록 뜨거운 열기는 단순히 추억 때문만은 아니다.
기술 만능주의와 초연결 사회 속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또 다른 고립과 존재감의 상실을 겪고 있다. 빠르게 대체되어 가는 세상 속에서, 연극은 스크린 너머의 CG가 아닌 ‘사람의 몸’으로 부딪쳐 만들어내는 숭고함을 보여준다. 이 연극은 단순히 영화의 재현을 넘어, 우리가 잊고 지냈던 ‘본질’과 ‘관계’의 회복이라는 메시지를 무대 곳곳에 심어두었다. 그것이 2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가 이 이야기에 반응하는 이유다.
극의 후반부, 치히로는 유바바의 쌍둥이 언니 제니바를 만난다. 효율과 이윤을 추구하는 유바바와 달리, 제니바는 치히로에게 본질을 잃지 않는 삶을 격려한다.
“치히로라고? 거참 좋은 이름이구나. 소중히 간직하렴.”
제니바가 치히로의 이름을 듣고 멋지다고 칭찬한 것은 단순한 덕담이 아니다. 그것은 성과나 능력이 아닌, 오로지 ‘당신’ 그 자체로 존귀하다는 확인 도장이었다. 수많은 관객이 이 연극을 보고 싶어 한 것은, 화려한 무대 장치보다 어쩌면 제니바가 건네는 그 다정한 ‘위로’를 느끼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른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다시는 지브리 연극을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특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우리나라 무대에서 만나는 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토록 간절히 티켓팅을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연장을 가득 메운 수많은 사람이 기꺼이 지갑을 연 것은 단순히 팬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 시대 치히로와 함께 성장했지만, 어른이 되어버린 후 잊고 살았던 ‘나의 이름’과 ‘순수함’. 그 짙은 향수를 다시 한번 마주하고 싶었던 간절함 때문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