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그러진, 어쩌면 숨기고 싶은 우리의 자화상
인간은 늘 더 높은 곳 그리고 더 많은 것을 향유하고 누리고 싶어 한다.
어쩌면, 그것은 욕심이 아닌 순수한 인간의 본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드라마 펜트하우스에 열광하는 이유 또한, 아주 적날하지만 어쩌면 숨기고 싶은 우리들의 진실된 모습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누군가 나보다 잘 나가게 되면 박수를 쳐주지만 속으로는 나는 저렇게 되지 못할까? 부러워하기도 하며 누군가 절망에 빠지면 위로를 해주면서 마치 내가 그들보다 더 월등한 존재가 된 것처럼 연민의 눈빛으로 동정하기도 하며 나의 선의가 누군가에게는 위선으로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착각을 하기도 한다.
드라마 펜트하우스는 인간의 본연의 감성을 왜곡하지 않고 에둘러서 표현하지도 않으며 캐릭터 하나하나에 잘 녹여내서 표현하고 있다. 때로는 그 감정과 묘사하는 장면들이 너무 지나치다고 느껴지는 분들은 '아, 막장드라마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100층의 펜트하우스는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누군가를 감시하고 지켜볼 수 있는 위치를 상징하기도 나의 권력의 높이를 은유적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끝없는 동경의 대상 그래서 감히 함부로 쳐다보면 다치는 그런 존재의 부각 등... 부정적인 면도 많은 100층의 펜트하우스이지만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한 번쯤은 그곳을 동경한다. 아니 수없이 위를 쳐다보며 갈망하고 있다. 단지, 그 욕망의 발톱을 서로 숨기기 급급할 뿐이다.
이곳에는 흔히 말하는 '착한 자'는 없다. 오히려 '나의 욕망을 이루려고 하는 자'들이 서로 뒤엉켜 헤라 펠리스(고급 아파트)라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감옥에서 처절하게 생존을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나가는 곳이다.
만약 당신이 어떤 캐릭터를 통해서 선의의 행동을 보았다면, 그것은 진실된 선의가 아니다. 단지, 내 목적과 욕망을 이루기 위해 타협하고 잠시 양보를 할 뿐, 내 목적과 욕망이 틀어지게 되는 순간 그들은 다시금 그들이 숨긴 발톱을 보이며 매섭게 상대방의 목을 조여 온다.
인간은 항상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가지고 살아간다. 어쩌면, 그런 사고방식은 아주 먼 옛날부터 우리가 생존을 위한 적절한 사고 메커니즘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존하지 못하면, 미래도 꿈도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욕망의 덩어리다. 하지만 우린 교육과 사회화라는 과정 속에 거친 욕망을 숨겨야 하는 학습을 통해 서로의 욕망을 숨기는 연극을 할 뿐... 곧 그 욕망은 본성과 만나 더 강하게 표출될 시점이 있다.
그 누구도 '선한 자'가 없다는 현실이 잔혹해 보일 수 있지만, 애써 펜트하우스에서는 인위적으로 절대적인 착한 자의 이미지를 가진 캐릭터를 만들어내지 않는 점도 나는 좋았다. 부정하고 싶지만 그것이 냉혹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진심으로 선행을 하는 것을 깊이 들여다보면 결국 그것은 '자기만족'이 깊숙이 자리 잡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살아가면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린 무엇을 위해 펜트하우스와 같은 곳을 동경하며 꿈꾸며 그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한발 한발 움직이는 것일까? 단순한 욕망? 가지고 싶은 욕구? 대우받고 싶다는 자기만족?
어쩌면, 지금 저 펜트하우스를 영위하고 있는 저 사람을 대신해 나에게도 기회가 올 것이라는 욕망과 희망이 만난 탐욕적 기회가 만들어내는 신기루에 우리는 쉽게 현혹되고 그것을 맹목적으로 따라가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들은 언제나 성공하고 싶고 한 손에는 명예 다른 한 손에는 부를 거머쥐며 남들이 함부로 올라오지 못하는 권좌에 앉아 세상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존재, 펜트하우스라는 매개체를 통한 또 다른 신이 되려 하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드라마 펜트하우스 오프닝에서 보면 헤라 여신(펜트하우스)이 있는 곳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뒤엉켜 올라가고 있는 조각상들이 보일 것이다. 그 정점에 위치한 헤라 여신의 표정은 정말 표정을 알 수 없는 모습으로 뒤엉켜 올라오고 있는 인간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녀가 인간을 불쌍히 여기는지, 인간이라는 존재를 무섭게 보고 있는지, 그저 자신의 자리에 누가 먼저 올라오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녀 자체의 모습이 차가우면서도 무섭게 느껴졌다.
그녀는 인간들에게 '어리석은 인간들아, 더 올라올 수 있으면 올라와보거라, 결국 너희들이 뒤엉켜 너희들을 밀어내고 결국에는 너희 스스로 무너져 내가 있는 곳에 와 나의 손끝을 직접 만질 인간이 없겠구나'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나는 보였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결국 펜트하우스는 그 누구에게도 기쁨과 행복이 아닌 늘 불안과 초조 그리고 나 또한 이곳에서 누군가에게 이끌려 내려갈 수 있다는 걱정과 불안의 곳이라는 것을 도달한 인간들만이 느끼고 스스로 추락하게 되는 결과를 되풀이할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곳에 올라가 보지 못한 사람들은 오늘도 펜트하우스를 동경하고 쳐다보며 그곳으로 한발 다가가려고 할 것이다. 이는 나도 욕망이 계속 살아있는 한 예외가 아닐 것이다.
펜트하우스가 배우의 연기와 빠른 전개의 스토리도 한몫하고 있지만 결론은 이 드라마는 우리들의 일그러지고 마주하고 싶지 않지만 언젠가는 마주하여야 하는 현재 대한민국의 자화상 그리고 우리들의 모습을 적날하지만 너무 날카롭지는 않게 그렇다고 가볍게 다가가지는 않기 때문에 우리는 펜트하우스를 나도 알게 모르게 시청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오늘도 각자의 펜트하우스를 지향하며 쳐다보는 우리들은 어쩌면 드라마 펜트하우스가 말하는 부제처럼 '삶의 전쟁'에서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