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운 건 취재뿐이라, 한의원 잠복취재 다녀왔습니다

1부-취재하던 기자, 한의대에 들어가다-환자일까요 한의대생일까

by 코코넛

한의대에 들어가서 제일 열심히 한 건, 공부가 아니었다. 공부는 뒷전이오, 제일 열을 올린 건 한의원을 직접 방문하는 일이었다! 고백하건대, 한의대에 합격하기 전엔 한의원에 자주 가지 않았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중학생 시절 엄마 손을 잡고 한의원에 방문했던 게 마지막 방문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한의학을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오해는 말라. 워낙 튼튼한 건강체질이라 한의원은커녕 일반 병원도 잘 갈 일이 없었다. 인공눈물을 처방받으러 안과에 가고, 감기가 심할 때 동네병원을 간 정도가 전부다.


과거 행적이 어떠했든, 이제 한의사가 되기로 결심했으니 한의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의사가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했다. 궁금할 때는 무조건 행동으로 옮겨야 직성이 풀린다. 그리고, 학교 밖, 책 밖의 세상에 답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현장 취재를 하는 느낌으로 한의원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지난 몇 년 동안 기자로 일하면서 배운 건, 무조건 현장에 가면 작은 것 사실 하나라도 얻을 수 있다는 거다! 새로운 장소에 가고, 다른 사람이랑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뭐라도 배우는 게 있기 마련이다. 한의원을 피부로 느끼기 위해, 취재하듯 한의원들을 찾아다녔다. 이른바 '직업 취재'를 다닌 셈이다. 물론, 이 시기 목과 어깨도 아팠기 때문에 치료 목적으로 한의원을 방문했다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한의대에 합격하자마자, 동네에서 침을 잘 놓기로 유명한 A한의원에 찾아갔다. 사실, 이 시기엔 한의대를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던 때였다. 한의원은 허름했지만, 오히려 허름한 그 장소에서 고수의 기운이 느껴졌달까. 게다가, 더욱 반가웠던 건 A한의원 원장님도 '나사'였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알았냐면, 한의원 내부엔 자랑스럽고 빛나는 '서울대 졸업장'이 걸려있었다. 서울대는 한의학과가 없기에, 해당 원장님도 서울대를 졸업한 후 다시 한의대에 진학한 케이스였다! 난 서울대 출신은 아니지만, 괜히 반가웠다. (역시 나사끼리는 통하는 게 있다!)


원장님의 서울대 졸업장 덕분에 고민을 털어놓을 용기가 났다. 엎드려서 침을 맞으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저 진로고민도 들어주시나요..? 제가 회사원인데, 한의대에 붙었어요"라고 말이다. 차마, 한의사 선생님 앞에서 '한의대를 가는 게 맞나요?'라는 질문은 하지 못했다. 곧이어 A 원장님은 "축하한다"는 인사와 함께 '찐 조언'을 쏟아내셨다.


"한의학 교수들 중 시대에 뒤처진 사람들이 너무 많거든요? 학교 들어가서 <황제내경>이런 거 너무 열심히 공부하지 말고, 믿지도 말아요. 현대의학-양의학 공부를 많이 하세요"


이 말을 들을 때만 해도, 정확히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황제내경'도 낯설었고, 한의대 교수들의 수준이 어떤지도 알턱이 없었다. 매우 슬프게도, 입학 후 한 달쯤 지나, 당시 원장님의 말씀이 무슨 의미였는지 바로 깨달아버렸지만 말이다. (첨언하자면, 일부교수님들은 기원전 쯤 쓰여진 황제내경을 진리처럼 떠받들곤 하는데, A원장님의 조언은 그런 태도를 경계하라는 의미였다)





입학 후 방문한 학교 근처의 B한의원도 기억에 남는다. 내가 한의대생인걸 밝힌 생각은 없었으나, 어쩌다 보니 내 정체를 털어놓게 됐다. 목 어깨가 안 좋다고 하니, B한의원 원장선생님이 "무슨 일을 하냐"라고 물어본 것이다.


거짓말을 할 수는 없어서 "여기 옆 00 대학교 다니는 학생이에요. 공부해서 어깨가 계속 아픈가 봐요"라고 답했다. 그러자 원장님이 조금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진료차트에 쓰여있는 나이는 30대인데, 대학생이라니...?' 원장님의 속마음이 읽혀서, 사회생활을 하다 뒤늦게 들어온 한의대생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러자 원장님은 굉장히 흥미로워했고, 본의 아니게 진료실에서 수다꽃이 폈다. 만학도의 경제사정을 고려하여 비싼 약침도 저렴하게 놔주셨다!


이후, 이런저런 사정으로 이 한의원은 자주 못 가긴 했다. (무슨 사정인지는, 기회가 닿으면 밝히도록 하겠다) 그렇지만 학교 나사 친구들에게 많이 소개했다. 친구들이 갈 때마다 만학도 한의대생인걸 밝히면 매우 반갑게 맞아주시며, 한의사로서의 조언도 많이 해주신다고 전해 들었다.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가장 자주 방문한 곳은 자세교정을 전문으로 하는 C한의원이다. 목어깨 만성 통증을 호소하자 '도침'을 권유한 유일한 한의원이기도 하다. 재밌었던 건, 이 한의원 원장님이 날 당연히 '직장인'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일하실 때, 너무 컴퓨터만 보지 말고 스트레칭도 하시고요. 사무실 의자에 앉을 때도 자세를 꼭 신경 쓰셔야 해요"


그도 그럴 것이, 이 한의원은 오피스 밀집지역인 광화문에 위치해 있다. 게다가 내 나이라면, 대학생보다는 직장인일 확률이 훨씬 높다. 누가 30대 환자를 한의대생일 거라고 지레짐작할 수 있겠나. 한의대생인걸 먼저 밝히지 않는 이상, 원장님들이 먼저 알아챌 방도가 없으니 먼저 알아주실 바라는 것도 너무 큰 기대다.


해당 한의원의 인테리어와 콘셉트 등이 마음에 들었기에 원장님께 '원장님 같은 한의사가 되고 싶어요'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끝끝내 한의대생인건 말하지 못한 채 한의원을 들락날락했다.




한의대생인걸 밝힐 걸 그랬나 싶은 순간도 있었다. D한의원에는 인체실험 삼아 '다이어트 한약'을 처방받으러 갔다. 진료를 하며 "이 한약엔 뭐가 들어갔어요?"라고 물었다. 아주 얕게나마 다이어트에 효과가 좋은 마황 등 한약재를 배웠던 터라 정확한 약재명이 궁금해졌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은 "혈액순환 도와줘서 살 빠지게 하는 성분이에요"라는 답변뿐이었다.


이 답변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주 쉽게 풀어서 설명한 환자맞춤형 대답이었다. 다만, 한의대생인걸 밝혔다면, 조금 더 자세한 약재 이름을 들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았다. 사실, 신분을 밝히고 캐물어서까지 한약재를 알아내고 싶은 학구열은 없었기에 조용히 한의원을 나왔다.



이밖에도 한의원을 열심히 돌아다니며, 보고 배운 것들이 많다. 분명한 건, 학교 강의실에 앉아서 배운 것들보다 한의원을 돌아다니면서 배운 것이 훨씬 많다는 점이다! 한의사로서 한자 하나를 더 아는 것보다, 환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이고, 그게 치료의 시작이라는 걸 배웠다. 역시나, 답은 현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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