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시험 기간, 회사로 그냥 돌아갈래!-한자 까막눈의 고백
"십이간지 한자를 순서대로 쓰시오"
한의예과 1학년 1학기 중간고사 문제였다. 갑(甲) 을(乙) 병(丙) 정(丁) 무(戊) 기(己) 경(庚) 신(辛) 임(壬) 계(癸), 자(子) 축(丑) 인(寅) 묘(卯)....를 모두 쓸 줄 알아야 풀 수 있는 문제였다. 물론, 나는 다쓰지 못했다.
한자 까막눈이다. 글을 쓰는 직업으로 6년 넘게 먹고살았던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니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렇다. 기사 제목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與, 野, 尹(...) 정도만 안다.
내 인생에 있어 '한자'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초등학교 저학년 때 구몬 한자를 했고 비슷한 시기, 아침 자습 시간에 담임선생님이 써주는 한자를 한자공책에 받아 적곤 했다. 고학년 때는 만화책 <마법천자문>을 재밌게 봤으며, 고등학교 2학년 때는 '한문' 교과목을 들었다. 그렇지만 한문에 익숙한 세대는 아니다. 떠듬떠듬 읽을 줄 아는 한자는 '월수화목금토일'을 포함해 50자나 될까. 읽고 쓸 줄 아는 한자는 더더욱 얼마 되지 않는다.
한겨레신문은 창간을 할 때부터 '한글전용'을 외쳤으니, 지금껏 살면서 한자를 몰라 글을 읽는데 불편함을 겪었던 적도 없다. 한문보다는 차라리 영어가 편하다. 한문은 그저 나에게 제2외국어에 불과하다. 우리 부모님 세대라면 모를까, 보통의 90년대생들이라면 나와 한문 수준이 비슷하지 않을까 변명을 해본다.
한자를 알아야 어휘력이 좋다는 의견이 많지만, 난 어휘력/문해력과 한자는 크게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평생 한자와 한문을 등한시한 죗값을 나이 서른 넘어 치르게 되었으니... 한의대에 입학한 한 후 한자, 한문 때문에 고생 길이 시작됐다.
한의학과에는 '원전학'이라는 세부 전공이 있다. 원전학에 대해 들어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여기서 말하는 원전은 한울원전 1호기, 체코원전할 때 그 원전(原電)-원자력 발전소가 당연히 아니다. 영어로 쓰인 책을 원서라고 하듯, 한문으로 쓰인 책을 원전(原典)이라고 부른다. 원전이 영어로 'Original text'라고 말하면 무슨 뜻인지 더 쉽게 이해될 거다.
쉽게 말해, 허준의 <동의보감>이 원전인 셈이다. 한문으로 쓰인 책을 해석하고, 그 원전에 담긴 한의학적 의미를 발굴해 내는 게 원전학이 추구하는 바다. 원전학을 전공한 교수님은 "한의대에 들어왔으면 <동의보감> 정도는 원문 그대로 읽을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신학과 학생들은 <성경> 원문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히브리어를 배운다는데, 한의학과에서 한문을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동의보감이 성경만한 가치가 있나싶지만, 가치판단은 잠시 멈추도록 한다)
3월, 두 번째 새내기이긴 하지만 설레는 마음을 안고 들어간 대학 강의실은 흡사 서당과 같았다. 교수님이 한문으로 쓰인 글을 읽으면, 학생들이 그대로 따라 읽는 식으로 수업이 진행됐다.
교수님 : "고지욕 명명덕 천하자는~ "
학생들 : "고지욕 명명덕 천하자는~"
원전학 수업이었는데, 사서삼경을 원문으로 읽고, 해석하는 법을 배웠다. 스무 살 친구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한자와 친하지 않기 때문에 교수님은 다소 우스꽝스러운 맞춤형 강의를 해주셨다. 단순히 한자를 읽고 쓸 줄 안다고 한문으로 쓰인 글을 해석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한의예과 1학년 때는 한문 문법도 배운다. 무엇이 주어고, 서술어인지, 어조사는 어떻게 쓰이는지 등을 말이다. 교수님을 따라 한자를 읊을 때면, '아 내가 진짜 퇴사하고 한의대에 온게 맞긴 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의학과에 합격하고 입학 전, 초등학생용 '일일한자' 책을 사서 한두 페이지만 끄적이는 예습도 했지만, 나의 예습은 턱없이 부족했다.
天命之謂性이오 率性之謂道요 修道之謂敎니라
道也者는 不可須臾離也니 可離면 非道也라
是故로 君子는 戒愼乎其所不睹하며 恐懼乎其所不聞이니라
<중용 1장> 중
위 중용을 그대로 읽고 해석하는 것이 한의예과 1학년의 주요한 임무였다. (물론, 학교마다 배우는 원전은 다르다) 사서삼경을 원문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기에, 사서삼경을 원문으로 공부한다는 건 꽤나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1학기때는 <대학>을, 2학기때는 <중용>을 배웠고, 추가로 공부하고 싶어서 교양으로는 <논어> 교과목을 신청해 배웠다.
'공자왈', '맹자왈'이 울려 퍼지는 한의학과의 커리큘럼은 낭만적이다. 동시에 원시적이기도 하다. 초등학생처럼 한자를 깜지로 써서 내는 과제가 있는가 하면, 주관식 문제에선 획 하나를 잘못 쓰면 감점을 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한문공부가 하기 싫어 투덜거리자 날 보던 스무 살 친구는 이런 말을 내뱉었다.
"누나는 90년대 생이니까 한자 잘 알지 않아요? 좋겠다"
05년생 눈에는 90년대생도 '옛날 사람'인지라, 내가 한자네이티브인 줄 알았나 보다. 그랬으면 참 좋았으련만 불행히도 한자 까막눈일 뿐이었다. 그래도 한의예과에 몸을 담다 보니, 한자실력은 예전보다는 늘었다. 길거리 간판에 있는 한자란 한자는 다 해석하려는 버릇도 생겼다. 마치 한글을 처음 배운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한의학과 커리큘럼 내 한문교육, 그리고 원전학에 대해선 한의학계에서도 의견이 갈리고 있다. 이런식의 교육이 맞는지 나뿐만 아니라 의문을 갖는 사람들도 꽤 있나보다. 개인적 호불호를 떠나 어쨌거나 덕분에 인생에 다시 못해볼 경험을 했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서당을 다니는 것처럼 공부를 해보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