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의대에 붙으면 가시겠습니까?

5부 이 나이에, 다시 의대로 갔습니다-얼떨결에 의대 합격

by 코코넛
코코넛님 축하합니다. 2025학년도 00 대학교 의과대학에 최종합격하셨습니다.



한의대에서 예과 1학년 2학기 '한의학개론' 기말고사를 준비하기 위해 '수태음폐경(手太陰肺經)' 등 12경락을 한자로 달달 외우고 있을 때 쯤이었다. 합격 통보를 받았다. 의대 합격 통보였다. 좀 재수 없겠지만, 의대에 합격하고도 마냥 기쁘진 않았다. 고3, 19살의 고등학생이었다면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뻤을 거다. 재빨리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 친구들에게 이 소식을 알렸겠지. 하지만, 오히려 이 소식을 어떻게 부모님께 알려야 하나 전전긍긍했다. 그 이유는? 당시, 내 나이 한국나이로 서른셋이었기 때문이다.


'6년 동안 쭉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한의대에 들어갔는데, 다시 때려치우고 의대에 간다?! 이게 진짜 잘하는 짓일까? 내 인생... 왜 이렇게 복잡해지냐'


스스로도 100% 확신이 들진 않았다. 2학기에 들어보니 한의대의 교육시스템은 더더욱 견디기 힘들어서 의대에 원서를 넣었고, 운 좋게 합격이 된 거다. 이 나이에 다시 회사로 돌아갈 수도 없고, 한의대를 계속 다니긴 지긋지긋해서 남아있는 선택지는 의대에 가는 것뿐이란 생각에 의대에 지원한 것이었다. 한의대 동기들 중에 약 10명 정도가 의대 반수를 했는데, 얼떨결에 나도 거기 합류를 했을 뿐이었다.


운이 좋게 막상 붙고 보니 이미 1000만 원 단위로 이미 납부한 등록금과 1년이라는 무형의 기회비용, 의대의 공부강도를 생각하면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한의대 교수님부터 주변 친구, 전 회사 선배들, 현직 한의사 선생님과 의사 선생님들까지 주변 인맥을 끌어모아 고민상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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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한의대 그만두고 의대로 가는 게 맞을까요?'


대부분은 '무슨 사치스러운 고민이냐'라고 했지만, 사실 내 속은 꽤나 썩어 들어갔다. 결론부터 말하면, 한의대에 자퇴서를 내고 의대에 입학등록을 했다. 다행히 부모님을 비롯한 주변사람들은 모두 잘한 선택이라며 축하를 해줬다.


한의대를 떠나 의대를 선택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 째, 태어나서 한의원을 안 가본 사람은 많지만 일반 병원을 안 가본 사람은 없다. 현대인들은 인생의 시작을 병원(산부인과)에서 한다. 즉, 사회적인 수요가 한의학보다 의학이 훨씬 더 높다. 둘째, 전 세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것은 의학이다. 의학은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다. 회사 생활을 해본 사람으로서, 내가 하고 있는 일, 다니는 회사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꽤나 메리트가 있다. 그 존재 자체로 정당성을 갖는다는 것은 꽤나 매력적이다.


한의대에서 1년 동안 짧게나마 공부를 하면서 느낀 것은, 내가 만난 한의대 교수님들은 한의학에 대해 독자적인 학문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보단, 한의학과 의학과 비교를 하며 한의학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시도들이 많았다. "양방에서 이야기하는 것과~는 결국 한의학에서 말하는 00과 같다"거나 "양방은 못하지만 우린 할 수 있다"는 식이었다. 내가 한의원을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스스로 존재의 정당성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의학계에선 한의학의 과학화나 세계화가 여전히 고민거리이니, 적어도 의대에 가면 그런 고민은 안 할 수 있었다.


'의대에 미친 한국'이라며 '의대열풍'을 비판하는 다큐나 기사들, 여론이 팽배한 시절이다. 그런 비판의 목소리를 누구보다 잘 알지만, 30대의 소시민으로서 의대를 가는 게 내 인생에 있어선 최선의 판단이라 여겨졌다. 그렇게 의대로 향했다. 30대도 의대열풍에 올라탔고, 이제 그 이야기들을 차츰차츰 풀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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