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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연 Sep 13. 2020

기생충

어디에도 기생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가능할까?

기생충을 보았다. 희망을 읽으려 애썼다. 막 웃으면서보다가 정색하고 상영관을 나섰다. 봉준호 감독은 인간에 대한 따뜻하고 애정어린 시선과 서늘하고 비판적인 시선이 공존하는 이야기를 잘 쓴다. 이 이야기로 황금종려상을 받았으니 이 이야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 사람들이 다 공감할 수 있다는 사실이 슬펐다. 인간이 세우는 계획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가능성은 참으로 희박해 보인다. 바닥을 치고 또 치고 내려가면 솟구쳐 오를 수 있을까, 솟구쳐 오를 수 있다면 무엇이 어디로 솟구쳐 오르는 걸까. 얼마 전 독서모임을 하다가 일상 생활에서 주기적으로 "약발"을 채우는 나만의 방법이 있다면? 하는 질문에 사우나를 가요, 노래를 들으면서 길을 걸어요, 영화를 보러 가요 다양한 대답들이 나왔다. 요가 하는거 말고 앞에서 나온 대답빼고 또 내가 자주 하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백화점에 가요. 딱히 물건을 구매할 목적으로 가는건 아니고 그냥 가요. 자주 들러요. 서면을 지나면 일부러 백화점을 통과해서 지나가요. 아이쇼핑을 하기도 하고 물건이 아니라 사람들을 관찰하기도 해요. 평소에 머리를 밀고 산에 들어가고 싶다는 충동을 자주 느끼는데 백화점에 들어가 걷다보면 현실감을 회복하게 돼요. 내가 발 붙이고 살고 있는 도시가 어떤 곳인지 인식하게 도와주고 물욕도 생기게 해요. 그럼 아 속세 좋지, 좋아. 하면서 열심히 일할 의지를 불태워보기도 해요. 그 곳에 진열된 어떤 물건도 제 것 아니지만 그래서 더 자유로운 감각이 들어요. " 아무것도 내 것이 아니지만 내 것이 될 수도 있다고 가정한 공간이니까 내가 하기에 달렸다. 나는 물건을 구매할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안 사고 나올 수도 있다. 물건을 내게 판매하기 위해 다가오는 정보와 호의를 받아들일 수도 거절할 수도 있다. 백화점을 구석구석 돌아보다보면 세상에는 이런 물건들도 있구나, 이런 것도 사는 데 필요할 수 있구나. 자연스레 돈을 이런 데에 지불하는 삶과 이런게 세상에 존재하는지 알 겨를도 없는 삶에 대해 교차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초등학교 마지막 3년을 교복을 입고 스쿨버스를 타고 다니고 원어민 선생님이 영어를 가르치고 방과후에 바이올린을 배우는 학교에 다녔다. 초등학교 처음 3년은 집에서 제일 가까운 학교에 다녔다.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의 반은 학원에 갔고 반은 집이나 놀이터로 갔다. 이사를 하고 학교를 옮기면서 많이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그렇지만 새로 간 학교에 잘 적응해서 살았다. 나는 생각보다 어느 곳에도 빠르게 적응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아빠의 사업 성공 실패 정도에 따라 다니는 학교의 환경 변화처럼 삶의 환경 전반이 변화했다. 외제차를 타고 다니다가 차는 물론 살 집과 생활비를 걱정하기도 했다. 자영업자에게 계획이란 필수적이지만 동시에 아주 무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 나를 먹여살리기 시작하면서 부쩍 더 백화점에 자주 간다. 살 물건이 없는데도 이유없이, 나는 백화점을 지나며 무엇을 수혈받고 있는걸까.  잘 모르겠다. 그냥 깨끗한 화장실이 좋아서 굳이 그리로 들리는 것일 수도 있고 필요 이상으로 쾌적하고 정돈된 물질들 사이에서 안정감을 느끼도록 나고 자랐는지도 모른다. 회복하려하는 현실감이 무엇인가,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 내가 나에게 만들어주는 그늘이 결국은 이런 모양인가. 영화를 보다가 나의 습관에 대해서 곱씹어 봤다. 지하철이랑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백화점에 들러 안정감을 느끼는 모순덩어리. 속세에 살면서 어디에도 기생하지 않고 사는 것은 가능할까. 중심으로 더 중심으로 들어가다보면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벗어날 수 있다면 무엇이 어디로 벗어날 수 있는거지?


작년에 영화 기생충을 본 직후에 쓴 감상이다. 어디에도 기생하지 않는 독립적인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 나는 얼마만큼의 돈을 벌면 될까, 일정 금액 이상의 돈을 번다면 어디에도 기생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아닐 것 같다.


사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 부터 모체의 양분을 잔뜩 빼먹고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나, 인간은 어디에도 기생하지 않고는 애초에 존재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구의 자원을 마음껏 낭비하고 동물과 대기를 착취하고 편의를 취하며 주인행세를 하지만 인간은 모두 모체로 부터 기생하다 태어나 지구에 기생하고 있는 존재들이 아닐까. 봉 감독은 이 이야기를 '같이 살아가는 것에 대한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영화에서 표면적으로 보여지는 세 가족의 경제적 계급 격차에 대한 이야기도 웃기고 공포스럽고 애잔하고 슬프지만 영화가 개봉한 지 1년만에 많이 달라진 세상에 살고 있는 요즘, 주인도 아니면서 주인행세를 하고 있는 비극의 현장에 나는 어디에 위치하고 있을까 생각하면, 태어나서 부터 죽을 때까지 기생하지 않고는 살아남지 못하는 존재이면서 주인행세를 하고 살고 있구나 싶어 아찔해진다.


기생이 아닌 공생은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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