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연 Sep 13. 2020

선과 악

예술과 외설

에곤쉴레는 회화가 진실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성(性)과 죽음에서 그 진실을 보았고 성과 죽음을 표현하여 구원에 이르고자 했다. 외설과 예술의 차이는 무엇일까 고민할 때마다 떠오르는 작가. 오늘 수련이 끝나고 찻자리에서 배꼽을 기준으로 상체가 동하면 예술, 하체가 동하면 외설이라는 해석을 들었다. 조금은 그럴듯하다 싶기도 하다. 예술과 외설, 더 나아가 미와 추를 나누는 분별의 경계에 있는 것들은 종종 선과 악의 분별에서 악의 것이라 취급받는다. 정말 추한 것이 악한 것인가.


인스타그램에 보이는 삶의 대부분은 아름답고 반짝거리고 예쁘고 화려하고 좋은데 반해 실제 삶은 때로는 추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고상한 척 에곤 쉴레 그림으로 시작하는 글을 쓰고 있지만 이 순간에 실제 나는 눈곱을 달고 양치도 안 한 채로 침대에 누워 엄지손가락만 움직이고 있다.

아무튼, 악마가 전쟁, 질병, 가난, 기근과 같은 형태로 나는 너희 인간들과 항상 함께 해 왔는데 왜 이제 와서 나를 없애려 하냐고 했다는 영화 속 대사처럼 형태만 다를 뿐 언제나 미 추 선 악 은 균형을 이루며 함께 해왔다. 슬프지만 기근이나 질병 자연재해가 없었다면 늘어난 인류로 지구는 멸망했을지도 모른다.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비극이라고 생각하지만 인류사의 가장 큰 진보와 발견은 사실 전쟁 전후로 이루어졌다. 아무도 서로를 해하지 않고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탐하지 않는 그런 세상을 꿈꾸지만 그런 세상이 온다면 완전히 세상은 그대로 멈추어 버릴 것이다.  멈출 필요가 있다고 느끼지만 진보만이 선이라고 믿는 수직적 가치를 따르는 문화권에서 멈춤은 곧 죽음이고 악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친구는 딸기 과육이 선이라면 우리가 보통 먹지 않는 딸기 꼭지 같은 부분이 악, 귤로 따지면 알맹이는 선 껍질은 악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우리는 필요/불필요, 아름답다/추하다 로 분별해서 선과 악을 나누지만 사실 세계는 언제나 그것들이 공존하고 있다고.


맞아, 양 극단은 서로 공존하고 통한다.

어느 길을 택할지는 각자의 몫이지만,

나는 삶이 기본적으로 추하고 고통스러운 것이라 믿는 관점을 더 좋아한다. 삶은 죽음과 언제나 맞닿아있고 우리가 가진 육체의 껍데기는 병들고 약하고 심지어 늙는다. 모든 인간은 대개 자주 아프고 가끔 멀쩡하다. 몸이든 마음이든 정신이든, 온전하고 평온하였다가도 금세 불안정하고 불완전하며 혼란스러운 존재로 돌아온다. 그러니 삶은 기본적으로 추하고 고통스럽다. 아침에 눈을 뜨면 입냄새도 나고 먹고살려면 비효율적 이게도 음식물을 속에 채워주어야 하며 채우면 또 잘 비워줘야 한다. 제때 비워주지 않으면 병이 날 것이고 심하면 썩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모든 인간은 다시 흙으로 물로 돌아간다. 이 반복은 멀리서 바라보면 아름다울지 모르나 가까이서 보면 아프고 냄새나고 추하고 고통스럽다.


그렇지만 나는 인생은 찬란하기만 한 것이며 젊음은 영원할 것이고 번영은 끊임없을 것이라 믿는 관점보다 생은 추하고 본질적으로 고(苦)라고 믿는 관점이 훨씬 진실에 가까울 뿐 아니라 따뜻하다고 느낀다. 삶은 원래 괴롭고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반드시 행복해야만 하고 아름다워야만 한다고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강요하는 것보다 따뜻하다. 진실을 보여주는 것, 진실이 추하고 괴롭다고 해서 외면하지 않는 것.


삶이 살아볼 만한 것은 그런 태도 덕이라고 믿는다.

2019.03.10 제주에서 쓴 글을

2020.09.13.에 부산 에서 수정하였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기생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