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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연 Jul 20. 2022

Bourgeois Emotion

망할 부르주아!

STELLA I

39분짜리 스텔라 장의 앨범


처음부터 끝까지 퇴근길에 들으면 시간이 딱 맞아서 자주 듣는다. 풀렝스를 순서대로 이어 듣는 건 책 한 권을 찬찬히 읽는 느낌이라 참 좋다.


"질풍노도의 20대 후반을 지나며 저를 스쳐간 생각과 멜로디를 붙잡아 눌러 담은 앨범입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부족하고 흠 많은 인간의 산물이니 당연히 부족하고 흠이 많겠지만 저는 이 곡들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저의 입장이고 이제 험한 세상에서 각자의 운명을 개척해나가겠지요. 이번 앨범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애쓰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그리고 꿈을 업으로 삼을 수 있음에 항상 감사합니다."


라는 소개로 시작하는 앨범이다.


그중에서도 2번째 곡 Bourgeois Emotion (ENG) - 돈은 없어도 사치스러운 감정은 누릴 수 있다. 사랑하는 마음 앞에 가난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라고 소개된 곡에 요즘 꽂혀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귀족은 못 되고 부르주아는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살아온 환경이 그랬다. 부르주아는 지배력은 없지만 경제력은 있는, 소유의 욕망을 긍정하여 발전을 진보시키지만 필연적으로 자본주의 그 자체인 모순덩어리 집단.


망할 자본주의라고 욕하지만 난 그 누구보다 물질적 혜택을 누리고 살았다. 초중고 다 사립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는 어쩌다 보니 거주지 위치에서 무작위 추첨으로 재단이 있는 사립학교에 갔다 쳐도 초등학교는 중간에 전학까지 가서 사립학교를 졸업했고 고등학교는 원서를 써서 시험을 치고 학비를 내고 학교를 다녔다. 11살 이후로 20대 초반까지 아마도 인생이 상당히 부르주아 그 자체였다. 교복 입고 스쿨버스 타고 학교 다니면서 원어민 선생님들이랑 영어 공부하고 오케스트라 단원이기도 했다. 바이올린도 배우고 피아노도 배웠다. 친구들은 첼로, 마림바, 플루트 등을 연주했고 동생도 같은 학교를 다니면서 클라리넷을 배웠다. 나는 농구를 했고 우리 학교에는 골프 수업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경험할 수 있는 예체능의 폭이 넓었을 뿐 아니라 언어도 영어에 그치지 않고 제2외국어까지 배웠다. 난 그때 고작 초등학생이었는데, 전학 간 학교에서 부회장까지 하면서 학교를 졸업했다. 그 학교는 거의 회장 선거가 대선 총선 마냥 떠들썩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학교에 몇 백몇 천만 원씩 갖다 주는 것은 예삿일이었다고 한다. 그 돈이면 대학교 때 세계일주 배낭여행을 하고 지금 요가원을 차리고도 남았을 거다.


  그런 사정은 전혀 몰랐으며 부모님도 내가 회장 선거에 나가고 당선되길 원한다고 생각하셔서 물심양면 지원해주셨다. 우리 아빠는 젊었고 사업은 한창 성공가도를 달릴 때였다. 역으로 계산해보면 아버지는 당시에 한 달에 거의 1억씩 벌 때가 있었지 않으셨을까 싶다. 당시 1억이면 지금 돈으로는 좀 더 많은 돈이겠지. 아버지도 어머니도 부모님께 물려받은 재산 한 푼 없이 시작해서 당구장에 철강회사에 건설업에 인테리어업에 헬스장에 스크린골프장에 카페까지 내가 기억하는 한 아빠는 30-40대를 통과하면서 수십 개의 직업을 가졌고 거의 늘 사장님 소리를 듣고 살았다. 함께 학교를 다녔던 친구들의 부모님들은 판사, 변호사, 외교관, 재벌 회장의 아들, 지역 유지의 딸, 대기업 사장,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교수,,, 뭐 그랬고 난 그런 것에 기죽지는 않았지만 뭔가 태생적으로 우리가 귀족도 서민도 아닌 것 같고 참 애매하다는 생각을 하고 살았던 것 같다.


  외제차를 종류별로 많이도 타봤다. 외제차는 확실히 승차감도 하차감도 좋다. 어떤 차는 처음 탔을 때 비행기 타는 것 같다고 느꼈다. 난 아빠가 허세 부린다고, 사치스러워서 자꾸 좋은 차를 사는 줄 알았는데 사업 경비 처리하기 좋아서 사업하는 사람들은 그렇게들 차를 바꾸는 거였다. 20대 후반에 프라이드, 티코를 타다가 30대 후반 40대에는 벤츠 E 클래스를 몰고 다니는 급변하는 십여 년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나는 감히 짐작할 수가 없다. 거의 도박이 아니었을까, 아빠, 엄마는 그들의 젊음을 나와 내 동생에게 배팅한 것 같다고 느낀다.


  매일 거의 유기농 음식만 먹고 백화점에서 가격표를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쇼핑을 하고 10대에 이미 미국 일본 중국은 다 다녀오고 그렇게 딱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가세는 차츰차츰 기울었고 모은 재산 없이 기반 재산도 없이 거의 교육과 생활에서 최상의 환경을 누리고 지낸 후 우리 집은 살 집이 없는 걱정까지도 해야 했다. 다행히 나는 집 가까운 국립대에 다니고 있었고 돈 들어갈 일이 크게는 없었으니 열심히 아르바이트하면서 하고 싶은 공부도 활동도 다 하고 살았다. 가세가 기울었다고는 해도 한번 늘어난 씀씀이가 줄어드는 데는 수년의 시간이 걸렸다.


  이제 나 하나는 스스로 책임지고 싶어서 독립을 결심했을 때 나는 실험을 해보고 싶어졌다. 난 얼마만큼의 물질로 삶을 지탱할 수 있으며 동시에 현실 속에서 얼마 큼의 물질을 창조할 수 있는가. 4년 정도에 걸쳐서 월세가 아주 싼 두 집을 찾아 살면서 부지런히 도 벌었다. 대학교 다니면서 만들었던 대학생 햇살론 계좌도 착착 갚아 해지해나갔다. (아직 조금 남았다.) 대학교에 가서는 우리 학교 특성상 연극도 그랬고 운동권에서 이어지는 사상들의 영향이 많았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대표하는 듯 사고했고 우리 집에는 실제로 대학을 다니는 동안은 돈이 없었지만 우리 집은 도대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회집단이 아닐까 싶었다. 부르주아의 기분을 내는 건 돈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습관이다.


  다시 10년이 지나 대학을 졸업하고 조용하고 햇살이 잘 들지만 너무나 너무나 계단을 많이 올라가야 하는 고양이가 많은 지금 사는 동네의 집 계약기간이 이제 4개월 정도 남았다. 돈이 차고 넘쳐도 시시하게 사는 어른들을 어릴 때 너무 많이 봐서 나는 돈 같은 시시한 것에는 쫄지도 매이지도 않는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팡팡 써봤기 때문에 백화점도 어색하지 않지만 돈과 인성 혹은 돈과 일상을 맞바꾸는 어리석고 시시한 짓은 안 하는 쿨하고 멋진 인간이 되어가는 줄 알았다. 겁이 없었고 열정이 가득했고 돈보다는 빛나는 것들을 지천에서 찾을 줄 알았다.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돈에 기죽지도 돈을 갈구하지도 않았다. 얼마간은 정말 돈 없어도 잘 살았다.


  다음 집은 어디로 이사를 가지 고민을 하다 다시 아파트로 가고 싶어졌다. 새로 생긴 아파트들 임장을 다니면서 좀 신나고 재밌었다. 어릴 때부터 드림카였던 미니쿠페를 10년간 잊고 살았는데 30대에는 꼭 몰아야지 계획했다. 이제 소망이 아니라 계획이다. 물질을 창조하는 능력은 결코 시시한 능력이 아니었다. 돈이 시시한 게 아니었던 거다 그냥 어릴 적 만난 그 어른들의 세계가 납작하고 시시했을 뿐이다. 나는 이 역할놀이에 흠뻑 빠져있다. 다시 욕조가 있는 좋은 아파트에 살면서 대중교통이 아닌 자차를 타고 룰루레몬에 부디무드라를 입고 요가를 하면서 대학원도 다니고 싶은 거다.


  욕망에 솔직해지면서 얻게 된 자유는 인정하게 된 것이다. 명예도 기반도 없어서 귀족도 아니고 없으면 없는 대로 만족하고 소박하게 살질 못해서 서민도 아니며 끊임없는 합리화를 지속하는 부르주아가 맞다고.


  어쩌겠는가 부족하고 흠 많고 모순투성이지만 나는 이런 내가 좋다. 내가 모순 투성이라는 걸 인정할 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좋다. 머리를 한대 콩 쥐어박고 싶다가도 합리화를 너무 잘하고 어쨌든 저 살길을 계속 찾아서 할 말이 없다. 이제 나 하나는 먹여 살리고 아파트도 차도 계획해보지만 이 물질적 굴레의 습관에서 벗어나야 진짜 독립이 아닐까 싶다.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고 내가 나를 먹여 살린 들 그들이 배팅한 젊음은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없으면 없이 살 줄 모르며 없으면 만족할 만큼 벌어야 한다. 모르면 배워야 한다. 만족하기란 쉽지가 않고 이런 나는 고요히 멈출 줄을 모른다.


좋고 나쁨을 넘어 이대로라면 이번 생에 완전 소멸은 글렀다. 이렇게 철 없이, 신나게 역할 놀이하다가 결국은 다음 생에 또 태어나게 생겼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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