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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ya Mar 26. 2022

데미안

헤르만 헤세




나는 삶이 흰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희미한 선으로 스케치하고 지우개로 지우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색연필을 골라 색칠해 마침내 그림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 오래 그림을 그리지 않았지만 언젠가부터 알았던 것 같다. 내 그림은 내가 스케치한 대로 그려지지도 수정되지도 않는다. 삶은 마치 완성된 그림에 덮인 검은색 크레파스를 살살 긁어내서 나한테 주어진 그림이 무엇인지 맞춰야 하는 숙제 같았다.


삶은 주어진다. 누군가 내 손에 그림을 쥐어준다. 우리는 부지런히 검은 종이를 긁어내 우리의 그림이 무엇인지 알아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자 직분이다.


하지만 앎의 과정은 고독하고 불안하다. 부지런히 긁어낸 그림이 나의 마음에 들지 않을까 봐, 과정의 고독과 불안이 두려워서 많은 사람들은 다른 그림을 힐끗 훔쳐보기를 선택한다. 저 그림이 내 그림인 것처럼, 내 삶인 것처럼 다른 사람의 삶을 산다. 모순적이게 나의 삶을 오롯이 살아내는 것보다 남의 삶을 흉내 내는 편이 편하기 때문이다. 혹은 과거에 부지런히 긁어놓은 그림 조각을 손에 쥐고 안주한다. 그 작은 그림 조각이 내 큰 종이에 그려진 전부인 것처럼.


사람마다 그림이 다르듯 그림을 긁어내는 방식도, 도구도 다르다. 누군가에게 그 도구가 음악일 수도, 사람일 수도 있다. 또 같은 음악이라는 도구를 사용해도 누구는 듣는 방식으로, 누구는 창작의 방식으로 사용한다. 나의 도구는 '글'이다. 다른 사람이 쓴 글을 부지런히 읽어내고, 부지런히 내 글을 써 내려가는 방식으로, 그렇게 부지런히 긁어낼 것이다. 그것만이 나의 직분이다.


나는 나의 그림을 잘 알고 있을까. 나는 지금 겨우 작은 그림 조각을 손에 쥐고 있다.






나의 문제가 모든 인간의 문제, 모든 삶과 생각의 문제라는 통찰이 갑자기 신성한 그림자처럼 나를 뒤덮었다. 그리고 가장 나다운 개인적인 삶과 생각이 얼마나 깊이 거대한 사유의 영원한 흐름에 관여되어 있는가를 보고 갑자기 느끼게 되자 두려움과 경외감이 나를 압도했다. 그 통찰은 즐겁지 않았다. 확인해 주고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었는데도 왠지 즐겁지 않았다. 그 통찰은 가혹했다. 떫은맛이었다. 그 안에는 일말의 책임의식이, 이제는 어린아이 일 수 없다는, 홀로 서 있다는 울림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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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우리 누구나 자기 스스로 찾아야 해,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금지되어 있는지, 자기에게 금지되어 있는지. 금지된 것은 결코 할 수 없어. 금지된 것을 하면 대단한 악당이 될 수 있지. 거꾸로 악당이라야 금지된 일을 할 수 있기도 하고 말이야. 사실 그건 그냥 편안함의 문제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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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오래 내가 맹목적이고 둔감하게 웅크리고 있었기에, 그토록 오래 내 마음은 침묵하고 가난해져 구석에 앉아 있었기에 이러한 자기 고발, 이 전율, 이 모든 영혼의 불쾌한 감정도 환영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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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트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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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들이 떠오르고 자네 영혼 속에서 목소리들이 말하기 시작하거든 곧바로 자신을 그 목소리에 맡기고 묻지는 마. 그것이 선생님이나 아버지 혹은 그 어떤 하느님의 마음에 들까 하고 말이야. 그런 물음이 자신을 망치는 거야. 그런 물음들 때문에 인도로 올라서고 화석이 되어 가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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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가 죽이고 싶어 하는 인간은 결코 아무개 씨가 아닐세. 그 사람은 분명 하나의 위장에 불과하네. 우리가 어떤 사람들 미워한다면 우리는 그의 모습에서 바로 우리 자신 속에 들어앉아 있는 무언가를 보고 미워하는 거지. 우리 자신 속에 있지 않는 것, 그건 우리를 자극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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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영들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지만, 내 꿈속에서 살고 있어. 네가 그걸 감지했구나. 다른 사람들도 꿈속에서 살아. 그러나 자기 자신의 꿈속이 아니야. 그게 차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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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나를 내면적으로 키워 준 것은 학식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기분 좋았던 것은 나 자신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나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힘에 대한 앎이 늘어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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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기서 갑자기 예리한 불꽃같은 인식이 나를 불태웠다. 누구에게나 하나의 ‘직분’이 있지만, 누구도 직분을 자의로 택하고 고쳐 쓰고 마음대로 주재해도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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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를 짓기 위해, 설교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또 다른 인간이 되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은 다만 부수적으로 생성된 것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진실한 직분이란 단 한 가지였다. 즉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 … 누구나 관심 가져야 할 일은 아무래도 좋은 운명 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는 것이며,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히 그리고 굴절 없이 다 살아 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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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연이 던진 돌이었다. 불확실함 속으로, 어쩌면 새로운 것 속으로, 어쩌면 무로 던져졌다. 그리고 측량할 길 없이 깊은 곳으로부터의 이 던져짐이 남김없이 이루어지게 하고, 그 뜻을 마음속에서 느끼고 그것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만이 나의 직분이었다. 오직 그것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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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니체와 함께 살았다. 그의 영혼의 고독을 느꼈다. 그를 그침 없이 몰아간 운명의 냄새를 맡았다. 그와 함께 괴로워했다. 그토록 가차 없이 자신의 길을 간 사람이 존재했다는 것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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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연대라며 저기 저러고 있는 것은 다만 패거리 짓기일 뿐이야. 사람들이 서로에게로 도피하고 있어. 서로가 두렵기 때문이야. 신사는 신사들끼리, 노동자는 노동자들끼리, 학자는 학자들끼리! 그런데 그들은 왜 불안한 걸까?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한 거야. 그들은 한 번도 자신을 안 적이 없기 때문에 불안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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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겁을 먹고 서로 뭉친 사람들은 두려움과 악의로 가득해. 아무도 남들을 신뢰하지 않아.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이상이 되지 못하는 이상들에 매달려있어. 그러면서 새로운 이상을 내세우는 사람에게는 돌을 던지지.



<데미안 - 헤르만 헤세> 22.03.22 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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