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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ya Apr 28. 2022

정원가의 열두 달

카렐 차페크




차페크 형제의 그림과 글이 담긴 이 책을 읽고 매력에 빠지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요제프 차페크의 그림은 그들의 정원과 닮았다.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너무나 사랑스럽다. 그리고 차렐 차페크의 글은 그야말로 검고 푸슬푸슬한 흙처럼 아름답다. 차페크의 글이 만져진다면 나는 그 글을 한 움큼 집어 들고 손가락으로 마구 부비며 말할 것이다. “베이컨처럼 기름지면서 깃털처럼 가볍고 케이크처럼 폭신하게 갈라지면서 빛깔도 참 곱네. 너무 마르지도 질척이지도 않고, 어쩜 이리 촉촉할까.”


정원에 관한 책이지만 이 책에 나오는 수십 가지의 식물을 알 필요는 없다. 식물에 대한 예찬을 늘어놓는 카렐 차페크의 모습을 보고 그저 미소 지으면 된다.  


수많은 예찬 중 차렐 차페크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흙의 아름다움이다. 우리는 일생동안 많은 시간을 땅에 발을 딛고 살고 있지만 그것에 대해 한 번도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 무구한 땅 위에 조그마하게 솟은 것들만 찬양하며 살았다. 흙이 얼마나 변화무쌍한지, 우리가 더럽다고 치부하는 썩은 낙엽, 거름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미래를 선사하는지, 겨울잠을 자는 듯이 조용한 땅 속에는 얼마나 분주하게 봄을 준비하고 있는지에 대한.


그리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부분은 정원가의 모습이다. 여유롭게 흙을 만지고 땀을 닦는 정원가의 모습이 아닌 아집스럽고 집착스러운 정원가의 모습은 웃음을 터트리게 한다. 정원가는 지금 자신의 정원에 묻힌 식물들이 3월에 싹을 트고 작년보다 더 크게 자라나기를 기대하기도, 내심 식물들이 죽어 그 자리에 새 식물을 심은 기대를 품기도 한다. 지인에게 정원을 맡기고 휴가를 와있는 내내 편지를 보내는 모습,  눈이 쌓이는 12월에 식물 카테고리를 보고 100가지가 넘는 식물을 주문을 하는 모습, 매일같이 정원을 가꾸지만 정작 하루하루 바삐 잡초를 뽑고 흙을 일구느라 정원을 바라보는 일조차 못하는 정원가의 모습은 이 책에 빠지게 하기에 충분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리오? 그저 이 순간을 지켜보며 감탄할 뿐.




바짝 마른땅에 차가운 물을 찰박찰박 흩뿌릴 때의 기쁨을 아는가. … 정원 전체가 잔뜩 목말랐다가 물을 마신 나그네처럼 촉촉한 숨을 내쉴 때의 기쁨을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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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가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리오? 그저 이 신비로운 순간을 지켜보며 감탄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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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식물은 씨앗 아랫부분에서 움튼 다음, 씨앗을 모자처럼 머리에 쓴 채 고개를 밀어 올린다. 머리에 엄마를 이고 자라는 아이의 모습을 그려보라. 자연의 신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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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은 일 년 중 가장 짧은 달. 열두 달 가운데 가장 덜떨어진 애송이 달이다. 하지만 꼴에 변덕스럽기 그지없을 뿐 아니라 교활하기로는 열두 달 가운데 단연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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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에 보다 깊이 발을 담그면서, 진정한 정원가란 ‘꽃을 가꾸는 사람’이 아니라 ‘흙을 가꾸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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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손바닥만 한 정원이라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딛고 있는지 알기 위해선 작은 화단 하나는 가꾸며 살아야 한다. 그러면 친구여, 그대는 저 구름들조차 우리 발밑의 흙만큼 변화무쌍하지도 아름답지도 경외할 만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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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흙은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낸다. 미끌거리고, 축축하고, 딱딱하고, 차갑고, 척박한 흙을 그저 추하다고, 썩었다고, 구제불능이라고 치부하지 말라. 이를 인간에게 내려진 저주라 속단하지 말라. 과연 그 존재가 인간의 영혼에 깃든 냉담함과 잔인함과 사악함만큼 추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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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은 언제나 미완의 존재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인생살이와 꼭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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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겨울잠에 대해 더 알고 싶은가? 모든 것을 거꾸로 보면 된다. 자연의 뿌리를 위로 들어 올리고 한번 찬찬히 들여다보라. 맙소사, 이게 잠을 자는 거라고? 이걸 휴식이라고 부른단 말인가? 너무 바쁜 나머지 위를 향해 자라는 걸 잠시 보류한 상태라고 보는 게 훨씬 정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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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이미 우리 곁에 있다. 지금 우리 곁에 자리하지 않은 것들은 미래에도 우리와 함께할 수 없다. 단지 땅속에 숨어 있기를 새싹을 보지 못하듯, 우리 내부에 자리하고 있기에 우리는 미래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정원가의 열두 달 - 카렐 차페크> 22.03.27 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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