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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나 Mar 12. 2016

배경음악이 등장하지 않는 영화

영화 "앙:단팥 인생 이야기" 속의 스토리의 힘

 세련된 영상 편집, 배경음악, 멋진 배우없이도 이런 영화가 가능하다니.


이 영화를 중반까지 봤을 때는 몰랐다. 일본 영화 특유의 서정적인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선율 없이 오로지 자연의 소리, 일상의 소리, 사람들의 대화 소리로 영화의 사운드가 채워지고 있다는 것을.

나뭇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 나무 사이 햇살...




<앙: 단팥인생 이야기>는 그만큼 멋을 내지 않은 영화였다.

영화의 중심 장소는 우울한 중년 센타로가 운영하는 도라야키 가게이다. 팬케이크 같은 전병 2개 사이에 팥 앙금을 한웅큼 넣어 만든 빵, 도라야키. 우리나라 붕어빵 처럼 바로바로 빵을 구워 앙금을 넣어 내놓으면 오가는 사람들이 사먹거나 하교 시간 고등학생들이 잠시 수다 떨고 가는 그런 공간이 있다.

그 곳에서 센타로는 웃음기 없이 묵묵히 장사를 한다.


하얀 벚꽃이 흩날리던 계절

그에게 한 할머니가 찾아왔다. 이 도라야키 가게에서 아르바이트가 하고 싶다고. 키키 키린이 연기한 도쿠에 상이다.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면, 자신한테 인사한다고 같이 손을 흔드는 순진해보이는 할머니였다.

그녀는 팥앙금만 50년 만들었다는 그야말로 팥앙금 장인이다. 처음엔 할머니의 실력을 못알아보고 그녀가 아르바이트로 지원했을 때 거절했지만, 이내 센타로는 할머니와 함께 도라야키를 만든다.

영화는 할머니가 앙금을 만드는 과정을 정말 세세히 보여준다.

팥을 씻고, 삶고, 또 삶고 또 당과 섞어 끌이고 물엿 넣고 다시 끓이고 그런 일련의 과정 속에 멋진 앙금이 나오고 그 날부터 센타로의 도라야키 가게는 그야 말로 "흥"한다. 감독은 이런 행복한 포인트에서 판타지를 거부한다.


벚꽃이 지고 여름으로 향해가는 계절

할머니는 사실 손을 잘 못썼다. 어릴 때 아파서 지금은 다 나았지만 손이 살짝 문드려있다. 사실 할머니는 한센병, 나병 환자 격리 센터에 살고 있었다. 가게 주인은 그 사실을 센타로에게 알리고 소문나기 전에 얼른 할머니를 해고하라고 한다. 심란한 센타로는 정면 돌파를 선택한다. 사람들에게 할머니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가판대에서 함께 계속 도라야키를 판다. 도라야키가 맛있다며 좋아하는 여고생들에게 인생의 지혜도 알려주며.


쨍쨍한 여름날

"흥"했던 가게는 금방 "망"했다.

오늘 그만 할까요? 란 센타로의 말에 도쿠에 상 할머니는 정리하고, 마지막인 듯 공손하게 인사하며 아쉬운 듯 마지막 퇴근을 한다. 할머니가 떠나고 그저 밥벌이로서의 장사로 자신의 일상을 버티고 있던 센타로는 여고생 와나카의 제안으로 할머니를 찾아간다. 그냥 할머니가 잘 계시는지 보기 위해.

할머니는 자신의 얘기를 조금씩 들려주기 시작했다. 여고생의 나이에 한센병에 걸린 것을 알게 되어 그 때부터 지금까지 이 격리 센터에서 살고 있다고 여기서 50년 동안이나 팥 앙금을 만들어왔고.. 정말 하고 싶었던 아르바이트를 짧게 나마 할 수 있었다고.

센타로와 와나카는 할머니 친구가 만들어준 단팥죽을 거리낌 없이 넙죽 맛있게 잘 먹었다.


낙엽이 다진 가을날, 벚꽃 나무가 된 할머니.

장사일도 제맘대로 안되는 가을, 센타로는 와나카와 또 할머니를 찾아간다. 하지만 할머니는 3일 전 녹음기에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벚꽃처럼 세상을 떠나갔다. 녹음기 속에서 또 한번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왜 굳이 센타로 사장님을 찾아가서 아르바이트를 했는지..

"우리는 세상을 보기 위해, 듣기 위해 온거야. 그래서 우리는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도 저마다 세상에 온 의미있는 존재들이야.. 사장님 고마워 정말 소중한 순간이었어"

사장님 눈에 눈물이 무지 뚝뚝뚝 흐른다.


영화 속 도쿠에는 소위 나병 환자였다.

그녀의 일상은 갇힌 새장 속의 새처럼 자유롭지 못했다. 그렇게 센터 안에서만 50년을 팥앙금을 만들며 보낸 일생의 마지막에 센타로에게 단순히 팥앙금 기술 뿐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과 자신의 일과 자연과 소통하며 살아가는 법을 알려준다.

감독은 나병 환자 할머니의 벚꽃 같은 짧은 세상 나들이를 보여주며 쓴물나게 버티기 어려운 삶을 그래도 웃을 수 있는 순간들로 가꾸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냥 씹으면 딱딱하고 쓰기만 한 팥을 몇번을 물에 씻겨내고 삶아 텁텁하고 쓴맛을 걷어내고 팥앙금으로 바꾸어가는 쓸데 없을 것 같아도 꼭 필요한 세밀하고 치열한 과정들이 필요하다고 말해준다. 그냥 버티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다른 사람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것. 그래서 내 안의 슬픔도 기쁨도 같이 어울러지는 것. 슬픔 속에 침전되지 않고, 물론 쓴물이 다 씻겨내려가진 않아도, 앙금을 만들어내 듯 기쁨도 같이 건져올리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이 인상 깊다.

하얀 벚꽃 아래서 살짝 웃는 듯 마는 듯한 센타로 상은 부끄럽지만 크게 외친다

"도라야키 사세요, 도라야키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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