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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da May 05. 2020

마흔이 되기 전에 다짐하고 싶은 것들



몇 달 후면 만으로 사십을 맞이 하게 되었다. 외국에 있다는 이유로 만 나이를 굳이 고집하지만, 이제는 만으로도 사십이다.


서른이 될 때도 최대한 선고를 유예하려는 심리는 비슷했던 것 같은데, 마음가짐은 꽤나 다르다. 서른은 잘은 모르지만 보다 성숙하고 정서적으로도 안정적인 어른이라는 이상향을 향해 달려가는 마일스톤이었다면, 마흔은 그 이상향의 허구에 대해 살짝 깨달았지만 그러면서도 또 그 밑에 침전된 달콤함과 씁쓸함에 대해 음미하는 시점인 것 같다.


어찌 되었던 마흔을 맞이하며 나에게 다짐한다.



1. 내 이야기, 옛날이야기,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가장 쉬운 꼰대 감별법이 있다. 점심 식사 자리에서 50% 이상 이야기하는 사람이 바로 꼰대라는 것. 그런데 스스로를 돌이켜보면 정말 아찔하고 식은땀이 흐를 때가 있다. 밥 먹다가 내 접시에만 차갑게 식은 음식이 남아있는 경험을 한 사람이라면 더욱 조심.


이렇게 도입부가 시작하는 말은 본론을 들을 필요도 없다고 한다. ‘내가 주니어 때는..’ ‘내가 예전에 했던 프로젝트에서는..’ 아닌 척하는 이런 도입부도 조심해야 한다. ‘주말 재미있게 보냈어요?’ (1초 후) ‘저는요..’ 옛이야기는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교훈이나 감동을 주는 일은 1%도 없다. 그리고 추억 이야기는 그 추억을 공유하는 사람들하고만 하는 것이 모두에게 좋다.


나는 특히 내가 본 영화나 드라마,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다 보면 감독의 전작 이야기도 나오고 역사적 배경 이야기도 나오고.. 차갑게 식은 내 플레이트와 50%는커녕 80%는 훌쩍 넘은 대화 점유율을 보고 반성한다.


<한자와 나오키>가 일본 단카이 세대의 집단 경험에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판타지이건, <홈랜드> 시즌4가 미국과 파키스탄 간의 아슬아슬한 동맹 관계를 잘 드러내는 것이건,


나한테는 참 재미있는 이야기인데, 세상에 이 이야기를 듣고 즐거워할 사람, 혹은 고개를 끄덕이며 찾아볼 사람은 0.1%도 되지 않는걸 이제는 나도 잘 안다.



2. 소년이 아니다, 소년처럼 행동하면 안 된다


조던 피터슨은 숱한 오해를 받고, 또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인물이지만, 각론을 떠나 그가 가장 전달하고 싶어 하는 키워드는 바로 ‘책임감’이다. 현대인은 자유에 대해는 충분히 보장받고 때로는 지나치게 누리고 있지만, 반면에 책임감은 필요악처럼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삶에 있어 자유만큼 책임감도 중요하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일하고 살아가는가, 자유는 이를 위한 전제조건이지 답을 줄 수는 없다. 책임감을 가진 사람은 이에 대한 답이 있다. 자신이 믿는 신념에 대한 헌신일지도, 가족에 대한 의무일수도, 소속된 집단의 성장일 수도 있는 것이다.


어른이 되기를 유예한 청춘은 네버랜드의 피터팬처럼 되어버린다. 비슷한 의미로 일본에서는 ‘모라토리엄 인간’이란 말이 한 때 유행했다. 책임감을 지닌 독립된 어른이 되길 거부하고, 소년처럼 살아가는 청춘에게도 시간을 흐르고, 결국 유예는 영원할 수 없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에게 있어서 마흔은 더 이상 유예할 수가 없는 최후의 마지노선과 같은 시간이다. 이제까지의 인생에 있어 조금은 스스로에게 관대했던 부분, 특히나 ‘이 모든 경험은 성장을 위한 것’이라는 논리는 이제 통하지 않는다. 소년이 아니고, 소년처럼 보일 필요도 없다.


나의 성장도 여전히 중요하지만, 동시에 시작한 일, 혹은 맡은 일에 대해 주인 의식을 가지고 뚜벅뚜벅 걸어가야 한다. 눈 앞에 펼쳐진 험난한 길이 추후에 더 좋은 기회로, 성장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이 길을 내가 가야 하는 길이다.



3. 절대주의의 도그마와도, 상대주의의 허무함과도 거리를 둔다


청춘의 특권 중 하나는 극단적인 생각과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엔, 내 주위엔 너무 많은 문제가 있고 이는 절대적으로 타도하거나 바꿔야 할 대상이다. 이에 분노하고 또 표현한다. 이는 특정 개인이 될 수도 있고, 세대, 집단, 국가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경험이 쌓일수록 이와 반대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세상의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고, 문제가 딱히 누구의 잘못만은 아니다. 그리고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들도 다 나름의 사정이 있고 논리가 있다.


표현도 이에 따라 바뀐다. ‘최악의’, ‘바꾸지 않으면 말도 안 된다’는 ‘완벽하진 않은’, ‘검토해봐도 좋을 것 같다’가 되고

완곡 화법은 비겁함이 아니라 성숙함의 지표가 된다.


이런 패턴이 반복되면 결국 상대주의의 함정에 빠지고 그 안에는 허무주의라는 심연의 친구가 기다리고 있다. 아무리 매력적이고 사연 있는 빌런이 등장해도 결국은 히어로와 마지막 결전을 치러야 엔딩을 볼 수 있듯이, 마흔 정도가 된 우리에겐 결론이 필요하고 이를 지탱하는 중심축이 있어야 한다.


이 축은 언제나 옳을 수 없고 또 생각보다 자주 바뀔 수도 있다. 그리고 앞서 말한 책임감과도 연결이 된다. 기준,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논리가 이제까지 내가 살아온 인생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니 마흔까진 좀 시간이 남았는데, 벌써부터 호들갑을 떨고 있는 내 모습도 보인다.


어디까지나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니 생각나면 추가하고, 설익은 생각이라면 다듬고 또 그러면서 한 발자국씩 나아가야 할 수밖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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