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 그리고 키보드의 향연
피부로 느끼고, 손으로 만지고, 호흡으로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가. 오감을 자극하는 것들이 가져다주는 순간의 행복과 신선함이 일상의 큰 힘이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만질 수 있는 것들보다 만질 수 없는 것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형태가 없는 것들을 접할 때와 형태가 있는 것들을 접했을 때 느껴지는 감각은 차원이 다르다. 음악을 MP3나 노트북 등 전자기기를 통해서 들을 때와 LP판을 직접 구매하여 들을 때의 감각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마찬가지로 키보드로 글을 작성할 때와 손글씨로 글을 작성할 때의 감각 역시 큰 차이가 있다. 키보드로 글을 쓰면 확실히 글쓰기가 편하다. 지우고 다시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양의 글도 어렵지 않게 완성할 수 있다. 하지만 손으로 글을 쓰는 맛은 뭔가 다르다. 손글씨를 많이 써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현대 사회는 스마트폰, 태블릿 PC, 데스크톱 노트 등 디지털 기기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필기를 할 수 있다. 필기구도 디지털화가 이루어지는 시대인 만큼 트렌드에 맞게 도구를 활용하여 변화에 적응하는 것도 중요하다. 요즘은 전자책(e-book) 도 많이 나와서 책 구매를 할 때 굳이 종이책을 구매하지 않고 전자책을 구매하는 사람들도 많다. 심지어 전자책이 종이책보다 가격도 저렴하다. 근데 나는 아직까지도 전자책이 쉽게 잘 읽히지 않는다. 왜 그럴까? 업무를 하다 보면 인터넷의 문서나 자료를 참고하게 되는데 이 경우에는 글을 읽고 이해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전자책으로 뭔가를 읽으려고 하면 쉽게 집중이 되지를 않는다. 뭔가 붕 떠 있는 느낌이 든다. 반면에 종이책을 읽으면 종이의 촉감이 느껴져서 그런지는 몰라도 읽은 내용이 쉽게 떠오른다. 완벽하게 떠오르지는 않아도 글이 전달하려는 내용이 무엇인지는 누군가에게 간단하고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기억한다. 무슨 차이일까? 암튼 나는 전자책보다는 종이책을 더 선호한다. 뭐랄까? 만질 수 있고, 촉감이 있으며, 편안하게 감각을 자극할 수 있는 것들이 내 생각과 감정을 잘 정리해주는 것만 같다.
감각을 자극할 수 있는 것들이 또 뭐가 있을까? 사랑? 만남? 뭐 이런 것들 아닐까? 요즘은 카톡이나 SNS로 소통하는 시대이다 보니 비대면 만남이 많다. 옛날에 버디버디라는 것이 있었다. 사이버 채팅, 인터넷 채팅이라는 키워드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하던 시기에 부담없이 친구를 사귀거나 새로운 사람과 교제할 수 있는 메신저였다. 삐삐와 전화로 연락을 주고받던 과거의 방식과 달리 메신저를 통해 온라인 상에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혁신적이었다. 채팅할 당시에 느꼈던 신박함과 설렘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얼굴을 보지 않는 비대면 대화인데도 그렇게 긴장하고 설렐수가 있다는 게 신기했다. 지금은 이 메신저 문화가 지금은 SNS로 이어지고 결국 숏폼까지 나아갔는데 이제는 내가 알지도 못하고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의 삶을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대면 소통에 대한 부담과 스트레스는 과거와 비교했을 때 훨씬 더 커지지 않았나 싶다. 비대면보다 대면으로 사랑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의 설렘과 기쁨을 느낄 때 훨씬 더 많은 자극을 느낀다. 반대로 싫어하는 사람, 피하고 싶은 사람을 만났을 때의 불쾌감과 거리감은 극에 달한다. 하지만 여기서 생각해볼 것이 있다. 피하고 싶은 자극에 대한 경험을 줄이고 느끼고 싶은 자극만 추구한다면 어떻게 될까? 감각은 여러 가지의 의미를 내포한다. 감각의 깊이라는 게 내가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만 한다고 해서 깊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행착오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과정을 통해 감각이 살아나고 더 예리해진다. 하지만 내가 피하고 싶은 상황들 특히나 사람과 사람 사이, 편리함에 젖어 익숙해진 디지털 기기 사용으로 인해 시간이 지날수록 감각이 예전보다 더 둔해질 수도 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류의 삶은 더 편해졌다. 하지만 그 편안함에 취하다 보면 어느 순간 감각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과정이 중요하다. 듣고, 맛보고, 만지고, 보고, 냄새나 향기를 맡는 활동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산이나 바다를 가면 자연 특유의 내음새를 맛볼 수 있다. 나무와 풀들이 가져다 주는 내음새 그리고 바닷물이 가져다 주는 내음새. 느낄 수 있는 것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감각의 깊이는 삶의 방식과 흐름이 결정한다. 감각이 무뎌져 있다면 공감각을 느낄 수 있다. 보통 천재들이나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이 이 공감각을 많이 느꼈다는 내용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자신의 감각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없다. 다만 경험을 통해 감각의 상태가 어떤지 확인할 수는 있다. 감각은 중요하다. 단순히 정량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지표도 아니다. 기술의 발전으로 편안하고 자유로운 일상을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자신의 감각을 일깨워야 할 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