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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원 Aug 10. 2023

나는 이제 과거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10년 만에 돌아온 터키(튀르키예) - 하

이제 본격적으로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스탄불로 올라왔다.


결혼식을 참석하기 위해 예약을 해둔 호텔이 있어서, 그곳으로 이동을 했다.


누구 결혼식을 통해 예약을 한다고 하면 싸게 해 준다고 해서 그런지 하룻밤에 60유로 밖에 하지 않았다. (아니면 화폐가치가 떨어져서 그런 건가..)


우선 대충 짐을 풀고, 슈퍼에 면도기를 사러 갔다. 원래 전기면도기를 들고 왔었는데, 배터리가 다 나가서, 일반 면도기를 하나 사러 갔다. 그렇게 바깥을 걷는데, 기온이 36도까지 올라가서, "이 날씨에 결혼식을 어떻게 하려고 하지..."라는 걱정이 먼저 앞섰다.


그렇게 숙소로 돌아와서 면도를 하고, 좀 땀 좀 식힌 다음에 1층에 있는 카페로 내려가서 맥주 한잔을 마시면서 혹시 다른 친구들이 왔는지 연락을 해봤다.


먼저 이탈리아에 사는 알버트라는 친구에게 연락을 했는데, 바로 답장이 없었다. 그리고 그냥 혼자 맥주를 마시면서 길에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알버트에게 연락이 왔다.


그래서 1층에서 맥주 마시고 있으니까, 이리로 오라고 했고 우리는 만나서 밥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알버트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건 노르웨이에서 석사를 할 때였다. 5년 정도 된 것 같은데, 그때 알버트의 고향 밀라노에 갔고, 마침 그때도 10년 전 교환학생 그룹에 있던 친구들 한 5명 정도가 모였던 것 같다. 당시 밀라노에서의 기억도 정말 좋았는데, 알버트가 밀라노 구석구석에 있는 로컬들만 아는 맛집과 여러 고급스러운 식당들을 모두 데려가 주었다.



그렇게 1층 로비에서 기다리니 알버트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그리고 본인 여자친구도 같이 데려왔다. 우리들은 만나서 정말 반갑게 포옹을 하고 인사를 주고받은 뒤에 식당으로 이동했다.

이번에도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이는 식당에 갔다. 아마 이 친구 취향이 이런가 보다.


음식을 주문하고 우리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와 요즘은 뭘 하고 지내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원래 알버트는 맞춤형 수제 구두를 제작 및 배송해 주는 스타트업을 했었는데, 그 사업은 접고, 이번엔 화장품을 추천해 주는 스타트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현재 노르웨이에서 박사 과정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를 하고, 어떤 분야를 하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대화를 하면서 뭔가 달라진 걸 느꼈다.

"원래 우리가 이렇게 말이 잘 통했었나?"


왜 그런지 생각을 해보니, 지금까지 3번의 장소에서 알버트를 만났는데, 10년 전 서울에서, 5년 전 밀라노에서, 그리고 이번에 이스탄불에서. 그렇다 보니 만날 때마다 나의 영어 실력이 달랐었다.


서울에서는 거의 사실 영어를 잘 못했고, 5년 전 석사를 할 때도 예전보다는 많이 늘었지만,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았었다. 그리고 이제야 어느 정도 편해졌는데, 이렇게 영어가 늘고 나서 다시 알버트와 이야기를 하니 나를 더 잘 표현하기도, 그를 더 잘 이해하기도 쉬어졌다.


그리고 알버트의 여자친구는 정말 상냥한 친구였는데, 처음 이야기 하는데도 정말 잘 맞았다. 이것도 아마 영어가 예전보다 늘어서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계산을 하려고 했는데, 알버트 커플이 이미 내 것까지 계산을 해줬다. 이렇게 또 얻어먹는다...



식사를 하고 다시 호텔로 돌아와 이제 정장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날씨가 진짜 더워서 걱정이었는데, 또 해가 지기 시작하니 금방 선선해졌다.


우리는 호텔에서 다 같이 셔틀을 타고 선착장으로 이동을 했다.


아, 위에서 이야기를 안 했는데, 결혼식은 어떤 섬에서 했다.


한 100여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모였던 것 같은데, 보통 터키 결혼식보다는 인원이 적었던 것 같다.

신랑이 독일인이라 하객이 적은 건가?

보통 서-북유럽 사람들은 결혼식을 엄청 조촐하게 한다고 한다. 한국처럼 축의금 개념이 없고 신랑-신부가 결혼식의 모든 비용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정말 친한 사람만 부른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안드레라는 미국인 친구도 다시 재회했다. 아 그리고 오늘 신랑의 이름은 니클라스다. 니클라스와 안드레는 대학교 때 농구동아리를 같이하면서 친해졌고, 그렇게 친해진 뒤에 지금의 교환학생 친구들과 함께 놀게 되었다. 안드레와도 반갑게 인사를 하고, 우리는 배를 기다렸다.

그리고 우리는 배를 타고 이동을 했다.


배로 한 20분 정도 가서 Sedef라는 섬에 도착했다.


이미 도착한 사람들도 있었고, 아직 식 시작 전에 웰커밍 드링크를 마시면서 대기하고 있었다. 사람들 국적도 엄청 다양했던 것 같은데, 아마 니클라스 유학을 여기저기서 많이 해서 다 초대를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약간 터키 사람들이 인종이 엄청 다양해서, 더 다양해 보였던 것 같다.


그렇게 식장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바로 우리 교환학생 패거리의 친구 중 한 명인 론형이었다. 론형과도 5년 전 밀라노에서 보고 처음 보는 건데, 론형은 파트너와 함께 왔다. 론만 계속 형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실제로 형이기도 하지만, 론 형이 한국어를 잘해서, 형이라고 한국에서 많이 불러서 이게 더 편해졌다.

아 그리고 론 형은 대만인이다. 그리고 지금은 캐나다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10년 전에 영국에 갔을 때, 론 형이 런던에서 유학을 해서 론 형 집에서 잤던 기억이 있는데, 그 당시에는 약간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은데, 어른이 돼 보니 그렇게 재워준다는 게 사실 큰 정성이 필요한 것 같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나중에야 그때의 배려에 대해 감사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론형도 보고 몇몇 빠지기는 했지만, 다시 2013년 신촌에서 놀고 다니던 그때의 이야기를 하면서 즐겁게 식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신랑 신부가 입장을 시작했는데, 계단 위쪽에서 걸어 내려오기 시작했는데, 정말 아름다웠다. 신랑 신부 그리고 분위기 모든 게.


그렇게 둘은 결혼 서약을 하고 모두의 축하를 받았다.

사실 나는 식을 보면서 처음으로 눈물을 글썽였는데, 나도 정확히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식장이 너무 예뻐서 그랬던 건지, 니클라스 형에 대한 마음이 애틋해서 그랬던 건지, 예전의 추억들이 생각나서 그랬던 건지...


그런데, 식을 보면서, 행복해져서 너무 다행이다 ㅜㅜ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니클라스 형은 한국에 1년 정도 있었는데, 두 번째 학기 때는 같은 하숙집에 살기도 했다. 니클라스 형은 한국에 정말 잘 적응을 했었는데, 그 나라의 문화를 경험하는 것을 엄청 좋아했다.


그렇게 우리는 1년 동안 정말 재밌게 지냈었고, 나는 한국에 있으면서 오히려 교환학생들처럼 지냈던 것 같다. 니클라스 형이 떠나가고도 나는 혼자 형과 친구들과 같이 다니던 술집이나 클럽을 다니면서 그 당시처럼 재밌게 놀려고 노력을 했었는데, 잘 안 됐던 것 같다. 정말 내 대학생활의 큰 추억중 하나를 만들어줬던 형이다.


그렇게 식을 마무리하고, 이제 식사를 했다. 한국과 다르게 이쪽 결혼식은 거의 하루 종일 진행된다. 식사를 하고 이제 또 신랑 신부를 시작으로 춤을 추기 시작해서 모두가 다 춤을 추는 그런 분위기가 되었다. 그렇게 다 같이 춤을 추다 보니까 10년 전 서울에서 재밌게 놀던 그 시절이 떠올라서, 갑자기 20대가 된 기분이었다.



그렇게 신나게 놀다가 나이가 나이인지라 힘들어서 혼자 앉아 있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거지?


이 결혼식의 참석의 시작은 어디서부터 된 거지?
10년 전의 농구 동아리에서 인연이 시작되어, 노르웨이에서 석사를 하면서 또 인연을 이어가고, 그리고 지금은 터키의 결혼식에서 이렇게 파티를 즐기고 있네..
그렇게 노르웨이에서 불평 불만 하고 지냈는데, 결국에는 이곳까지 올 수 있게 되었네..


지난 8개월 동안, 이래저래 우울했는데 내가 갖고 있던 것들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그저 내가 그동안 그것들을 못 보고 있었을 뿐...


뭔가 조금 더 마음의 평화에 한 발짝 다다간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파티를 마치고 새벽 두 시가 되어서 다시 배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나는 아침 비행기가 있어서, 미리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다음에 만나기를 기약했다.


알버트는 밀라노로 오라고 했고, 니클라스 형은 바르셀로나로 오라고, 그리고 론 형은 캐나다 캘거리로 초대했다.


그렇게 나의 노르웨이 삶 뽀개기의 시작이었던 터키 여행은 성공적이었다.


나는 커리어를 상당히 돌고 돌아서 쌓고 있는데, 뭐 의도했다기보다, 뭔가 항상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마다 이상한 선택을 했던 것 같다. 약간 스포츠 토토 같은 걸로 치면 역배에 건다고 해야 하나? 뭔가 정배에 걸면 너무 뻔하니까, 역배에 거는 걸 좋아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선택의 기로에는 항상 사람들이 있었고, 나는 나의 커리어 보다 늘 사람들을 선택을 했던 것 같다.


한동안은 이렇게 늦거나 꼬인 나의 커리어에 불안감을 느끼고는 했다. 동기들은 이미 한 직장에서 7년 넘게 일을 하고 있거나, 쭉 학계에 있던 친구들은 이미 교수를 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주변의 박사를 같이하고 있는 친구들 중에는 정말 어린 친구들도 있다. 그래서 일이 잘 안 풀릴 때면, 잘못된 선택들로 이렇게 뒤쳐졌다고 생각을 하면서 자책하고는 했었다.


노르웨이 돌아와서 점심을 먹으며 친구들과 식사를 하다가 나이 이야기가 나왔는데, 한 친구가 24살이라고 한다. 예전 같았으면 24살에 나와 같은 박사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 뒤쳐졌다고 느꼈을 법한데, 이번에 터키 여행을 뒤로 내가 바로 들었던 생각은, "아, 24살 때 니클라스 형이랑 진짜 재밌게 놀았었는데!"라는 생각이 자동적으로 들었다.


항상 특정 나이에는 어느 정도 성취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면서 압박감을 느끼곤 했었는데, 나는 그 나이들을 좋은 기억과 경험들로 채워가고 있었다.


예전에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면서 특정 결정의 순간으로 돌아가서 다른 결정을 내려봤어도 좋았을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이제는 그 추억들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Photo by Engin Yapici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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