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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야파티

악녀라서 미안해

2023_이야챌린지_052

by 이야
임시 표지

오랜 고문으로 몸도, 마음도 엉망이 된 여인의 녹안이 번뜩였다.


'이 세상에서 꽤나 고귀한 신분으로 꼽혔던 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비릿한 피 맛을 느끼며 간신히 입꼬리를 올린 그녀가 작은 숨결을 뱉었다.

철창 뒤로 죽음이 흐르는 순간, 그와 대비되는 뜨거운 태양빛이 조그만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이제 와서 그 화려한 시간이 무슨 의미겠어. 그냥 이 순간에도 너를 그리는 내가 악녀라 낙인 받은 때에, 어쩌면 그 이전부터 어울리지 않은 자리에 있었나 보지.'


피부에 닿아 따가운 햇빛을 피하지 않은 그녀가 체념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그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생전의 추억이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래서 지금에서야 이리 어울리는 곳에서 끝을 보는구나.'


어느새 바래진 은빛의 머리카락이 미약한 바람에 흔들렸다.

늦은 걸음으로 감옥에 도착한 헤르바는 이미 떠난 로슈아의 곁을 지켰다.


"어째서 제 말을 믿지 않으셨어요? 그녀는 절 죽이려고 하지 않았는데, 제가 멍청해서 일어난 일이란 걸 왜 믿어주지 않으세요?"


헤르바의 눈물이 바닥을 적셨다.


"미안해. 로슈아. 나는 그저"


지난날, 피부가 푸석해진 자신이 멋모르고 마셨던 로슈아의 차에는 독이 가득했다.

그로 인해 이제야 정신을 차린 헤르바는 친구의 아픔을 외면하고 있던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황태자 전하. 더는 만나지 말아요, 우리. 그게 제가 로슈아에게 할 수 있는 속죄니까요."

"로슈아의 부재로 황태자비 자리 역시 공석입니다. 안젤리나 공녀. 그녀의 뒤를 이어 제국의 모후가 되어주세요."


자신에게 내밀어진 테시안의 손길을 보고 머뭇거리던 헤르바는 결국 그의 손을 잡았다.


'로슈아, 나를 용서하지 마.'


테시안과 헤르바가 떠난 뒤, 한 인영이 나타났다.

그는 꽤 오랜 시간 동안 감옥의 벽에 기댄 채로 잠자듯이 죽은 로슈아를 바라봤다.

한편, 어느 조용한 정원.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네, 로아나."


상대의 말에 로아나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렸다.


"무슨 생각을 그리 심각하게 해?"

"이번에 읽은 책들에 대한 생각."

"역시. 완전 독서광이 따로 없네."


발밑에는 책들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제목을 보니까 어째 다 비슷한 부류의 책 같다?"


표지를 확인한 남자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맞아. 다 회귀를 소재로 한 이야기야."

"과거로 돌아가는 거?"

"응. 기구한 운명을 위한 보답인 걸까. 아니면 그냥 이야기의 전개를 위한 도구인 걸까."


책을 내려다보던 그녀가 다시 찻잔을 들었다.


"그만큼 간절하게 필요했나 보지. 죽는 순간에 후회한다면 바라게 되는 희망 아니겠어?"

"그래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절망이지만 말이야."


온몸 가득 퍼지는 독을 즐긴 로아나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돌아가는 바늘 끝이 무료한 일상을 건드리는 날이었다.


"커억-"


침대에서 눈을 뜬 로슈아가 연신 기침을 토했다.


"허억. 진짜 회귀한 거야?"


놀란 눈으로 자신의 몸을 둘러본 그녀가 중얼거렸다.

곧 탁상으로 팔을 뻗은 그녀의 손이 종을 잡았다.


"안나!"

"부르셨나요, 공녀님?"


항시 대기 중이던 하녀가 바로 부름에 답했다.


"지금이 언제야?"

"네? 날짜를 말하는 건가요? 제국력 467년 8월 13일입니다."

"467년?"


로슈아는 자신이 언제쯤으로 회귀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손짓으로 축객령을 내렸다.

안나가 나가자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화장대 앞에 앉았다.


"아직 황태자비를 뽑지 않았어. 이제 어떡해야 하지?"


자신의 상황을 정리한 그녀가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며 고민에 빠졌다.

그것도 잠시.

문 너머 안나의 목소리가 울렸다.


"공녀님, 안젤리나 공녀가 방문했습니다."

"아, 곧 간다고 전해줘."


대답한 로슈아는 빠르게 머리 손질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그래. 일단 헤르바와 오붓한 시간을 보낸 다음 생각하자. 어차피 돈 때문에 황태자비는 내가 확정일 테고, 나도 황실에 볼일이 있으니까 다른 선택지는'


복도를 걸으며 마저 생각을 정리하던 그녀의 눈앞으로 작은 손이 튀어나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로슈아?"

"어머. 헤르바, 방에서 기다리지."


로슈아가 헤르바의 머리를 쓰다듬자, 그녀가 로슈아의 팔을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로슈아를 좀 더 일찍 만나고 싶어서 그랬어! 그런데 오늘따라 생각이 많아 보이네, 내가 괜히 방해한 걸까?"

"그럴 리가. 너와 티타임 보내는 게 내 낙인 걸~ 그리고 지금은 이 시간이 더 그립고 간절하기도 했고."

"응?"


로슈아의 아련한 뒷말을 듣지 못한 헤르바가 되물었다.

씁쓸한 미소를 지운 로슈아가 그녀를 방으로 데려와 앉혔다.


"디저트 맛있게 먹자구~"

"이러다 내가 너무 통통해져서 테시안이"

"눈치 볼 거 없어, 헤르바. 너희 둘이 서로 좋아하는 거 아는데, 뭘~"

"하지만 로슈아도 나처럼 황태자비 후보니까."

"어허."


헤르바의 의기소침한 모습을 본 로슈아가 짐짓 엄한 얼굴로 그녀의 입에 달콤한 케이크를 전달했다.


"나는 테시안보다는 황실 자체가 목적이라"

"그렇지. 로슈아는 야망가니까."


헤르바의 말에 그저 웃음을 흘린 로슈아였다.

실상은 인간이 되기 위해 황실, 정확히는 모르테인의 핏줄이 필요한 것뿐인 그녀는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라 손을 멈췄다.

포크가 허공에 있자 의아한 헤르바가 로슈아를 바라보다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로슈아, 역시 오늘은 내가 괜히 찾아온 것 같아."

"응? 아니, 전혀 아닌데."

"하지만 또 좋은 생각이 떠오른 거지? 로슈아는 똑똑하니까 할 일이 많잖아! 나도 이제 집에 가봐야 하고"

"나는 정말 괜찮지만, 헤르바야말로 테시안과 데이트가 있는 거지?"


로슈아의 물음에 얼굴을 붉힌 헤르바가 눈동자를 굴렸다.

소리 없는 대답을 들은 로슈아가 웃음을 머금고는 돌아왔다.

그녀는 곧장 소파에 몸을 기댔다.


"모르테인에 사생아가 있다는 사실을 좀 더 일찍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회귀한 보람이 있겠어."


수감 당시 알게 된 테리온 모르테인의 존재를 되뇐 로슈아가 작게 미소를 띠었다.


"솔직히 테시안, 이 녀석이 괘씸하긴 해."


안나는 오랜만에 들리는 웃음소리를 반갑게 여기며 주방으로 향했다.

한편 전과는 비교되는 녹안이 거울을 향했다.


"골탕 좀 먹여볼까?"


그녀는 감옥에서의 처절한 시간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곧 그의 입장도 이해가 되었다.


"테시안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 헤르바의 부모님이 극성이니 말이야. 일단 정보 길드에 의뢰해서 테리온에 대해 알아야겠네."


생각을 마친 그녀는 안나가 가져다준 찻잔을 잡으며 쓰게 웃었다.


"이거 때문에 괜히 헤르바만 위독해졌네."


주기적으로 독을 섭취해야 하는 자신의 차를 몰래 마신 헤르바가 떠올랐다.

같은 공작 가문임에도 부유하지 않은 안젤리나 가문은 사제를 데려올 수 없었고, 의심스러운 디아볼로가 보낸 성직자를 받아들이지 않은 헤르바의 부모님은 사경을 헤매는 딸을 그저 지켜보아야 했다.


'그나마 테시안을 통해 보냈으니 마지막에라도 괜찮아졌단 소식을 접할 수 있었지. 황실 역시도 오랜 사치와 향락으로 빚만 가득했으니, 테시안 속도 말이 아니었을 거야. 하지만 한평생 내 물건에 손을 대지 않은 헤르바가 그 차를 마실 줄은 정말 몰랐다고.'


공녀로서 당연한 처사였지만, 집안의 부가 극명히 차이 나는 둘이었기에 헤르바가 자신의 것을 원한다면 언제든 내어줄 수 있던 로슈아도 그 차만은 줄 수 없었다.

그것은 자신에게는 회복제와도 같지만,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인 독이 든 음료였기 때문이다.


'이러니 안젤리나 가문에서 나와 헤르바의 관계를 원하지 않았던 거겠지.'


헤르바가 데뷔탕트를 치를 때, 디아볼로에서는 안젤리나에 선뜻 도움을 내주었지만 안젤리나는 항상 디아볼로를 탐탁지 않아했다.

그 사실을 아는 로슈아는 제 욕심에 헤르바의 곁에 있던 날들이 조금은 후회됐다.


'하긴. 헤르바와 테시안이 뻔히 사랑하는 것을 아는데도 인간이 되고 싶어 황태자비가 된 난데, 나도 정말 욕심이 많구나.'


과거를 회상한 그녀의 눈이 어느새 촉촉해졌다.


'테리온의 존재를 미리 알았더라면 달랐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꽁꽁 숨길 수 있었던 건지.'


테시안과 닮은 듯 미묘하게 다른 테리온을 떠올린 로슈아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울고 있을 때가 아니지. 두고 봐. 이전에는 나와 헤르바가 황태자비를 두고 경쟁했다면 이제는 테시안 네가 너의 형제와 황제위를 두고 보여줘야 할 거야."


로슈아 자신의 목적을 위해 테리온이 굳이 황제가 될 필요는 없었지만, 테시안을 이해하는 한편으로 원망하는 그녀로서는 조금 짓궂은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물주는 나잖아?"


테리온과 만날 계획을 세우며 바쁜 날을 보내는 불순한 황태자비 후보는 다시 보게 된 넓은 하늘을 보며 여유를 만끽했다.

그 시각, 테리온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조용히 반란을 준비하고 있었다.


"기분이 묘하군."


왠지 모를 오싹한 기운을 느낀 그의 눈이 잠시 하늘을 뒤덮은 구름들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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