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아직도 제 몸을 감싼 저주의 기운에 마른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 글씨를 좇던 눈길을 올려 거울을 바라본 헬레나는 붉은 머릿결을 매만졌다.
"달라지려고 염색한 색이 이제는 천연이라니. 이 삶은 정말 예상하지 못할 것투성이야."
지난 생에서 오랜 시간, 은둔형 외톨이로 살아온 그녀는 뜨거운 햇빛 아래 타오르던 염색모를 떠올렸다.
헬레나, 그 이전의 송화연은 분명 나아지고 있었다.
"트럭이 그대로 돌진하지만 않았어도… 송화연의 삶이 그렇게 끝나버릴 줄 알았다면"
머리카락인지, 혈액인지 모를 붉은 것이 눈앞을 가리고 어둠으로 물들었던 지난날.
그때를 회상하는 그녀의 눈이 깊어졌다.
"미루지 말걸 그랬어."
일기의 많은 장을 수놓은 그 사람의 이름 하나를 어루만진 그녀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전생의 감정이 휩쓸고 간 자리, 그와 닮은 마음을 간직한 헬레나의 손이 서서히 움직였다.
"솔직히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자신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녀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는 아직 짙은 후회를 뛰어넘을 용기가 찾아오지 않았다.
"애초에 이런 몸으로는"
아버지인 이아로스 공작이 오래 수소문했지만, 그녀의 저주를 해결할 방법은 없었다.
그것을 생각하니 막막해진 헬레나가 펜을 들었다.
-항상 찾아오는 헬테인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런 꼴을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아. 여러 해, 아버지가 사방으로 알아봤지만 전혀 진전도 없었고 내가 여기서 벗어날 거란 희망은 놓으신지 오래야. 그렇다고 아버지를 원망하지는 않아.
작게 중얼거리며 글을 쓰던 그녀의 손과 입이 일제히 멈췄다.
펜 소리마저 사라지자 방안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 침묵은 얼마 가지 않아 깨졌다.
"내 선택이었어."
여러 번 그 말을 반복하고 나서야 다시 손에 힘을 준 그녀가 글씨를 적어내려갔다.
-아버지는 최선을 다했어. 게다가 이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도 나뿐이고.
저주를 받을 당시 8살에 불과한 그녀였지만, 그녀의 선택은 필연적이었다.
"이제는 그가 황태자여서 그랬는지, 아니면 내가 좋아해서 그런 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녀는 제국의 고귀한 신분을 가진 그를 대신해 자처한 것뿐만 아니라 그를 좋아하는 마음에 직접 나섰다는 생각도 들었다.
"전생을 마주한 직후에는 왜 그랬나 싶기도 했는데, 사람 마음이란 게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보지 못한 10년이란 세월 속에서도 쉽게 지울 수 없는 심장의 요동은 각인처럼 그녀를 맴돌았다.
"가끔은 이게 내 오랜 짝사랑인지, 아니면 저주의 효과인 건지 궁금하기도 해."
강렬한 기억이 남긴 감정의 소용돌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한편으로는, 결국 어느 쪽이든 부정하지 못할 마음이기도 했다.
방에만 있는 것은 전혀 답답하지 않은데, 그를 생각하면 갑갑하게 조여오는 느낌은 언제나 자신을 현실에 있게 만들었다.
쓰게 웃은 그녀는 침대로 돌아가 자리에 누웠다.
"이세계로 오면 할 목록을 나름 생각해 보았던 것 같은데, 오래 잠자기만 할 줄은 몰랐네."
가끔씩 읽은 웹소설의 내용을 짚어본 그녀가 높은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뭐, 여기는 책으로 본 적 없는 곳이라 괜히 무섭기만 하지. 기억하지 못하는 걸 수도 있지만, 저주 때문이 아니었어도 내가 나가는 일은"
한참을 홀로 떠들던 그녀가 어느새 잠에 빠져들었다.
비록 저주가 아니었다면 전생을 떠올리지 못했을 그녀였지만,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고른 숨결이 방을 채웠다.
수면에 취한 그녀를 깨운 것은 늘 그랬듯 동생인 헬테인이었다.
언제나 자신의 방문 앞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동생을 상상하며 서서히 눈을 뜬 그녀는 알 수 없었다.
하루에 한 번만 찾아오는 헬테인이 오늘은 두 번이나 방문한 것을.
그저 벌써 다음날이 됐다고 생각한 헬레나의 하루는 여전했다.
동생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때까지는.
"누나는 억울하지도 않아? 데미안은 하하호호 잘 지내고 있는데, 누나만 이 방에서 죽은 듯이 사는 거! 누나가 왜 안 나오는지 알지만 이건 아니잖아. 이번에 성녀는 겨우 자작 가문을 단 평민 계집인데, 황태자의 총애를 받는다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누나 혼자 힘들어하는 시간에 데미안 그 자식은!"
동생의 과격한 말을 전해 들은 헬레나의 안색이 어둡게 변했다.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란 거 알고 있었어. 그런데 막상'
그의 소식에 그녀의 마음이 크게 울렁였다.
"누나, 듣고 있지? 이대로 계속 방에만 있을 거야? 그 정도는 옷만 잘 입어도!"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 앞에 선 헬레나의 기척을 느낀 헬테인의 말이 멈췄다.
보통 드러나는 옷을 입는 동부의 문화권에서 모든 것을 가리라는 말은 스스로 부끄럽다는 증명과도 같았다.
물론 헬레나는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녀가 그렇게 나온다면 뒤에서 떠들 말들이 많을 거란 걸 그로서는 더욱 속이 답답해졌다.
"도대체 그 빌어먹을 숲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버럭 화를 내는 동생을 말리지 못하고, 그저 문 위로 작은 손길을 얹은 헬레나가 쓰게 웃었다.
'영물이 산다는 진귀한 숲이 헬테인에게는 누나를 저주한 숲에 불과하니까.'
그의 분노를 이해하는 한편으로는, 그런 발언이 혹여나 그에게도 불똥이 튈까 걱정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문을 작게 두드리는 것뿐이었다.
"그래. 진정할게."
주르륵. 문에 기대어 바닥에 앉은 헬테인이 너머의 누나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누나도 언제까지고 방안에만 있을 수 없다는 건 알아야 해. 데미안이, 하. 어쨌든 황태자비를 맞이하는 연회에 아무리 우리 가문이어도 전부 참석해야 하니까 말이야."
그동안 건강상의 이유로 웬만한 행사는 피했으나, 헬테인이 짚은 것들은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누나가 이제껏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았지만, 우리가 반역하지 않는 이상 불참은 허용하지 않을 테니까. 본보기를 위해서라도 데미안이라면 분명"
뒷말을 작게 중얼거린 탓에 헬레나는 듣지 못했지만, 동생의 말을 이해한 그녀는 직감했다.
'결단을 내릴 때가 온 거겠지.'
목덜미를 어루만진 헬테인이 느리게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 그의 몸이 뒤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어?"
"오랜만에 보네."
어느새 자신보다 곱절로 커진 헬테인의 등을 간신히 붙잡아 버틴 헬레나가 눌린 채로 인사를 건넸다.
"누우나?"
놀란 헬테인의 몸이 반동으로 앞으로 쏠렸다가 빠르게 틀어졌다.
"진짜 누나네?"
헬테인의 우직한 손에 양어깨를 붙잡힌 그녀가 어설프게 마주 웃었다.
"성녀가 테이샤라고 했지?"
"가서 조지게?"
"…나야 방에만 있느라 예법을 잘 모른다지만, 이아로스 공자께서는 다시 배울 필요가 있어 보이네요."
헬테인의 손에서 벗어난 헬레나가 차갑게 대꾸했다.
"가서 만나는 건 맞지만, 조…지는 건 아니야. 오히려 나는 그녀와 좋은 관계를 맺어야"
"오랜만에 말해서 목이 아픈 거야?"
"콜록. 아니야. 괜찮아. 아무튼 빠른 시일 내에 만나게 해줘."
걱정스레 바라보는 동생을 밀어내고 다시 문을 닫은 헬레나가 자신의 목을 문질렀다.
'이 정도도 말하면 안 되다니.'
어린 시절 만난 영물이 떠오른 그녀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흠. 날 해친 건 얘지만, 네가 시킨 거라고?'
'네, 맞아요! 제가 강요했어요!'
'그렇다면야. 벌은 네가 받아야겠네?'
'커억-'
하늘로 떠오른 어린 몸뚱이가 순식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이 저주는 쉽게 풀지 못할 거야. 그래도 어린 것이니 감안해서 기회를 주지.'
'살,살려주세요.'
'죽이는 건 아니야.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면 신의 사랑을 받거나 신의 사랑을 받는 이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할 거야.'
바짝 다가온 사슴이 어린 헬레나를 가소로운 눈길로 내려다봤다.
'아. 이 방법을 알았으니 금방 해결할 거라고 생각하지? 아쉽지만, 이 내용은 절대 발설할 수 없어. 그리고 이곳에는 신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이가, 나오기 어렵겠네. 그럼 잘 버텨보라고.'
유유히 떠난 사슴을 뒤로하고, 한참 전에 정신을 잃은 데미안을 데리고 나온 헬레나는 자신의 모든 곳에 새겨진 화상 자국을 바라보다 기절한 그에게로 눈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