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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야파티

잴 수 없는 사랑의 거리

2023_이야챌린지_055

by 이야
임시 표지

"정말 사랑한다면 다시 만나 내게 증명하라고."


​헤라의 말이 체드의 심장을 관통했다.


​"네가 오랜 시간 연인이 다시 태어나는 그 순간을 기다려 그때까지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오직 그녀만을 바라며 이 삶을 보낼 수 있다면 나도 인정해 주지."

"별로 어렵지도 않네요. 제 심장은 이미 그녀만의 것이니까요."


​오만한 대답에 헤라의 입매가 가소롭다는 듯 올라갔다.


​"그래. 꼭 그러기를 바라지. 많은 신들이 이루지 못한 업을 꼭 보여주길 빌어."


​헤라는 날선 눈빛으로 한시바삐 인간계로 돌아가는 체드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의 인영이 사라지자 몸을 돌려 자신의 자리에 앉은 그녀는 곧 들려오는 발소리에 웃음을 흘렸다.


​"웬일로 여기까지 걸음을 해줬네?"

"인연과 질투의 신, 헤라. 그대는 지금 나의 사명에 개입하고 결정권을 탈취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될 것입니다."

"그 말 하려고 오랜만에 찾아온 거야, 로드 오라버니?"

"계속해서 선을 넘는다면 지켜만 보지는 않을 거야, 헤라."


​앉아있는 헤라를 내려다본 로드가 차갑게 경고했다.


​"아무렴. 죽음과 인도의 신께서는 제가 체드의 연인인 로제의 환생을 결정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 본데, 거기에 사적 사유는 없는 거겠죠?"

"…신은 신을 만나야 해."

"오라버니께서 다루는 분야가 거룩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겠지만, 사랑은 쟁취하는 거랍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동생이 꿰뚫어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 로드가 작게 기침했다.


​"그녀가 행복한 걸로 충분해."

"허어. 정말이지, 숙맥이라니까. 그녀가 오라버니를 보려면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네~"


​답답한 로드를 쫓아낸 헤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찼다.

오늘따라 유난히 타오르는 붉은 머리카락을 넘긴 그녀는 탁자에 놓인 물건을 응시했다.

화살에 꽂힌 사과였다.


​"사랑하는 과거에 얽매여 제대로 보지 못한다면 또다시 나의 승리가 되겠네."


​이윽고 강렬한 빛을 뿜은 그녀의 눈동자가 다시 원래 색으로 돌아왔다.


​"그렇다고 용서할 생각은 없지만 말이야. 그러니 너의 선택을 기대할게."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한참이나 느린 신의 하루는 단조로웠다.

끼이익.

미술실의 문이 열렸다.


​"오늘도 그리는 거야?"


다영은 붓을 잡고 있는 ​해린을 발견했다.


​"응. 계속 떠올라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

"그렇겠지~ 비록 얼굴은 모르지만, 딱 봐도 잘생긴 것 같은 운명의 남신이 늘 지켜보고 있나 봐!"

"놀리지 마~"


그림을 다 그린 해린은 물통을 챙겼다.

다영과 화장실로 향하는 그녀.

​장난 어린 말에 핀잔을 주던 것도 잠시.

그녀가 묘한 눈으로 복도를 걸었다.


​"나도 오랜 연인을 그리워하는 기분이긴 하지만, 되게 이상하다고."

"그러시겠죠~ 신의 사랑을 받는 해린님~ 아, 맞다."


화장실 앞.

​아침부터 한껏 친구를 놀리던 다영이 우뚝 멈춰 섰다.

해린도 발을 멈추고 친구를 바라봤다.


​"아까 오는 길에 들었는데, 오늘 전학생 있나 봐!"

"그래? 나도 아침에 새로운 교생 선생님을 만났는데."

"어? 저번부터 온다고 했던 교생쌤을 벌써 봤어?"


물을 버리고, ​다시 미술실로 돌아온 둘은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잘생겼더라고."

"푸하핫. 아니, 남신님 두고 한눈팔아도 되는 거야?"

"아오. 진짜, 강다영. 그걸로 계속 우려먹기야?"

"네가 엄청난 눈빛으로 그림을 그리는 걸 어쩌겠어~ 그런데 웬일로 네가 외모 칭찬을 다하냐."


금방 ​뒷정리를 마치고는 교실로 가는 둘.

대화는 계속 전학생을 맴돌았다.


​"진짜로 잘생겼으니까 그렇지. 뭐."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나도 궁금하다~ 빨리 보면 좋겠네!"

"강다영, 조심해!"


​뒤로 계단을 올라가던 다영은 미처 내려오는 남자를 피하지 못했다.


​"으앗!"

"큼. 언제까지 안겨 있을 거야?"

"헉. 죄송합니다!"


​남자의 품에 그대로 묻힌 다영이 스프링처럼 튀어나갔다.


​"끄아. 강다영, 뭐 하는 거야."

"하하. 미안."


​덕분에 그런 다영을 떠안은 해린이 그녀와 부딪힌 팔을 어루만졌다.


​"네가 오해린이야?"


​한편 다영과 충돌한 남자는 해린의 명찰을 확인하고는 물었다.

"어, 그런데요?"

갑작스레 다가온 남자를 향해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한 해린이 다영의 팔을 잡았다.


"아. 나는 전학생이야. 장수원이라고 해. 나도 미술 입시를 하는데, 선생님이 널 소개해 줘서."


​해린이 경계하는 것을 알아챈 수원이 무해한 얼굴로 설명했다.


​"안 그래도 미술실 가는 길이었는데."

"우리는 거기서 올라오는 중이었어."

"그래, 아쉽네."


​정말 아쉬운 얼굴로 내려가는 수원.

짧게 고민한 해린이 입을 열었다.


"괜찮으면 점심때 내가 소개해 줄까?"

"정말? 그러면 난 좋지."


끝내 약속을 잡고 돌아선 해린은 옆에서 반짝이는 눈길을 보내는 다영을 피해 교실로 도망쳤다.


"교생쌤에 이어 전학생까지? 해린아, 남신님은 널 그렇게 키우지 않았다~"

"뭐래~ 나는 부모님이 키워주셨거든?"

"예, 그렇겠죠~ 이나, 하이! 벌써 왔네?"


가방을 정리하는 해린을 야무지게 놀리던 다영은 앉아있는 이나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나도 궁금한데? 이제 해린이도 연애하는 건가?"


다영의 소리를 들은 이나는 얼추 짐작 가는 얼굴로 해린을 바라봤다.


"이나, 너까지? 너무해!"


친구들의 장난에 얼굴이 빨개진 해린이 토라졌다.


"아, 삐지기야~ 미안해~ 점심에 따로 약속을 잡길래 아, 나는 그럼 누구랑 보내야 하지?"

"으으. 너도 가면 되잖아!"

"헉. 데이트를 방해하는 파렴치한이 될 수 없지."

"미술실 안내가 무슨 데이트란 거야?"


평소처럼 티격태격 대화를 주고받는 둘을 바라본 이나가 웃었다.


"진도는 전학생이 빠르네~ 보니까 교생 선생님도 훈훈하던데?"

"뭐야, 이나 너도 벌써 만났어? 나만 못 봤네!"


이나의 감상에 다영은 더욱 교생 선생님이 궁금해졌다.


"너도 곧 볼 수 있을 거야. 우리 반도 담당하신대~"

"그래? 그러면 해린이의 삼각관계, 아니 사각관계를 지켜볼 수 있는 건가?"

"자꾸 엮지 말라고요~"


해린의 반응이 재밌어 쉽게 그만두지 못한 다영은 한참 놀린 다음 자리로 돌아갔다.


"안녕하세요~"


담임이 들어오자 반 학생들이 함께 인사했다.


"오늘은 두 명을 소개할 건데, 한 명은 전학생이고 한 분은 교생 선생님이야."

"나는 장수원이고, 미술 입시생이라 오해린하고 친해지고 싶어."

"오오~"


전학생에게 언급된 해린이 숨고 싶을 때, 다영을 비롯해 반 친구들이 환호했다.


"저는 이번에 교생으로 온 정성훈입니다. 과목은 수학입니다. 해린 학생은 또 보네요."


수원이 빈자리에 앉자 학생들을 보며 자신을 소개하는 성훈이었다.

또 한 번 더 자신의 이름을 들은 해린의 귓가가 불타올랐다.


"앞으로 7반 친구들하고 잘 지냈으면 좋겠네요."


7반의 담임과 같은 과목을 담당하는 터라 이곳에 담당된 성훈이 담백하게 인사했다.

종이 울리고 선생님들이 나간 교실.


"7반 친구들, 특히 해린 학생과는 더더욱 잘 지내고 싶은 거겠죠~"

"그만해라."


사물함에서 교과서를 준비하는 해린은 어느새 또 옆으로 와 놀리는 다영을 노려봤다.


"아니, 어떻게 새로 온 두 명이 다 널 얘기할 수 있는 거지? 이건 완전 운명 아니야?"

"무슨 운명."


괜스레 머리가 지끈거리는 해린은 겨우 다영을 떼어놓고 이나의 곁으로 도망 왔다.


"그래서 어느 쪽이 더 취향?"

"여기로 올 게 아니었어."


다영과 비슷한 이나의 반응에 해린이 머리를 감쌌다.

괴로워하는 해린을 응시한 이나가 이내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겼다.


'해린아. 네가 체드와 이뤄진다 해도 신이 될 수는 없을 거야.'


한껏 가라앉은 눈동자가 일순 붉게 물들었다.


'열망과 균형의 신, 디나. 내가 너를 용서해야 할까? 내 계획을 어그러뜨린 널 보면서 늘 고민하지. 결국 너의 술수에 넘어간 체드가 불쌍해서라도 응원하는 수밖에.'


인간에게는 찰나의 시간, 그러나 신에게는 영겁의 흐름 속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을 떠올린 헤라, 아니 이나가 눈가를 찌푸렸다.

체드의 사랑을 증명해 로제를 반신에 이르게 하려던 그녀의 뜻은 체드를 속여 마음을 얻은 디나로 인해 망가졌다.

그것을 아는 그녀는 염원하던 업을 망친 디나를 괘씸히 여겨 벌하고, 그럼에도 다시 사랑을 찾아 이곳에 온 체드를 기특히 여겨 돕고자 했다.


'역으로 인간이 되어서라도 네 사랑의 결백을 증명하는 거야, 체드. 그러면 약속했던 것 이상을 줄 테니.'


그와 함께 오빠를 떠올린 그녀가 쓰게 웃었다.


'로드. 아니 오빠 역시도 거스르겠다면 부디 이번에는 쟁취하길 바랄게.'


해린이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이미 이나의 눈이 다시 검게 돌아와 있었다.

이후 화장실에서 돌아온 다영이 친구들의 어깨를 감싸며 호탕하게 웃었다.

아저씨 같다는 평가에도 아랑곳 않고 다영은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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