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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동거
2023_이야챌린지_057
by
이야
Oct 29. 2023
임시 표지
웅성웅성.
마당에 놓인 정자 뒤로 스태프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약간 떨어져 지켜보던 다유가 코트를 끌어당겼다.
늦여름의 새벽.
쌀쌀맞은 바람이 심술궂게 머리를 헤집었다.
코를 훌쩍이는 그녀의 눈에 친구가 들어왔다.
스태프와 대화할 때도, 누군가와 통화할 때도 여러 번 찡그려지는 눈썹.
정확한 사정은 몰랐지만 무언가 곤란한 일이 터졌음을 유추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인데, 다들 울상이야?"
다유가 다가오는 아름에게 물었다.
난감한 얼굴의 그녀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배우 만세이 씨가 오다가 사고 났어. 가벼운 찰과상이라고는 하는데, 경과는 지켜봐야 할 것 같아."
"지금 일정 조율 때문에 문제 생긴 거야?"
"응. 작가님이 완강하셔서 예정대로 진행 못하면 드라마 자체가 엎어질 것 같아."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에 다유의 미간도 좁혀졌다.
"김은정 작가가 까다로운 건 알고 있었는데, 더 확고하구나."
"그렇지? 그나마 이번 일은 남배우가 더 중요해서 그쪽에 포커스를 두면 되긴 하는데- 하, 이 새벽에 대타를 구하는 게 가장 큰 난관이야."
"그래도 세이 씨는 업계에서 꽤 알려졌잖아. 그녀 대타라고 하면 신인 중에 자원하는 친구들 있지 않을까?"
"글쎄. 이게 촬영에 반영되는 거면 어떻게든 하겠지만, 준비 작업일 뿐이라 시간만 버린다고 생각할걸. 게다가 엑스트라 출연을 미끼로 하기도 어려워."
"김은정 작가님 작품인데도?"
"그래서 어려운 거야. 작가님이 필요해서 투입되는 게 아니라면 기약 없는 기다림이니까."
아름이 퀭한 눈으로 밝아지는 하늘을 바라봤다.
일련의 사태에 해탈한 친구.
그녀를 보는 다유도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렇다고 파투 나면 안 되는데- 일단 짐 푼 다음에 기본적인 것들 짚어주기로 했잖아. 그거 진행하는 동안 괜찮은 수가 나오지 않을까?"
"맞아. 지금 남주연 쪽은 도착했는데 무한정 기다려 달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어?"
다유의 제안을 받아들인 아름의 발이 멈췄다.
덩달아 그녀를 따라가던 다유의 걸음도 끊겼다.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응?"
"너야!"
다유를 가리키는 아름의 눈이 번뜩였다.
이윽고 친구의 손을 공손히 붙잡은 아름.
그것을 부담스럽게 느낀 다유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갑자기 왜 이래?"
"네가 하면 돼!"
"대체 무슨 소리를. 어? 설마? 내가 같이 들어가란 거야?"
말뜻을 헤아린 다유의 목소리가 커졌다.
순간 정자 쪽에 몰린 스태프들의 시선이 그녀를 향해 일제히 움직였다.
이윽고 아름의 눈짓을 받은 막내가 달려왔다.
"어떻게 안 될까요? 어차피 몇 번씩 들리셔서 법 관련 도움을 주시기로 했잖아요."
"아니, 그건 예정된 거여서"
다유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하나같이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유야. 진짜 이런 부탁, 말도 안 된다는 거 알고 있는데 지금 상황에서 너만 한 사람이 없다."
"잠시만. 나도 너무 갑작스러워서- 고민 좀 해볼게."
"변호사님, 긍정적인 방향으로 검토 부탁드려요."
자신들의 행동이 무례했다는 것을 눈치챈 스태프들이 정중히 사과하고는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아쉬움의 눈길마저 없애지는 못했다.
사람들의 열기 때문이었을까.
훅 더워진 다유가 싸맸던 코트를 벗었다.
"그래, 이것도 일이야. 오지 못한 여배우 대신이긴 하지만, 저기서 내가 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까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지."
부채질로 얼굴을 가라앉힌 그녀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역시 어렵지? 괜한 부탁해서 미안."
"억지 부려서 죄송해요, 변호사님."
"응? 혹시 해결된 건가요?"
"그건 아닌데, 너무 무리한 요청이었어요."
오죽했으면 자신에게까지 부탁했을까.
결정을 내린 다유가 친구와 스태프들을 둘러보았다.
"그러지 않아도 돼요. 일의 연장선이라 생각하니 꼭 그렇지도 않더라구요."
"어, 그 말씀은?"
"네. 할게요, 저."
그녀의 대답에 사람들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아름도 놀란 눈으로 다유의 어깨를 붙잡았다.
"정말 괜찮겠어?"
"응. 어차피 나 3개월 동안 일 쉬잖아. 그동안 너 도와주기로 했고. 그래서 나쁠 것 없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재밌을 것 같기도 하고"
"꺄아. 역시 내 친구! 고맙다, 다유야!"
슬슬 해가 비치는 시각.
변하는 공기 속에서 친구에게 안긴 다유는 뻘쭘하게 웃었다.
"나, 땀나는데 좀 놔줄래?"
"큼큼. 너무 고마워서 격했네."
"그런데 혹시 오늘 당장 들어가는 건가?"
이제야 한시름 놓은 아름이 옆에서 들리는 큰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방금 너였어?"
"어? 응. 근데 나 자문만 해주는 줄 알고, 아무 준비도 안 했는데 설마 바로 시작하는 거 아니지?"
"친구야. 오늘부터 3주야. 이거 밀리면 촬영하는 것도 계속 늘어져."
당황한 다유의 어깨를 짚은 아름이 진지한 목소리로 달랬다.
"나 옷은? 아니, 칫솔이나 이런 건-"
"그건 이미 준비되어 있으니까 몸만 와."
원래는 여배우를 위해 마련한 용품들이었지만, 이제는 달랐다.
오로지 다유가 쓸 그것들은 빠르게 그녀의 손에 들어왔다.
"하하. 여행 온 것 같고 좋네."
손잡이를 쥔 채 새삼스레 넋을 놓았을 때.
"안녕하세요. 저번에 뵙고, 이번에 또 보네요."
"아, 안녕하세요. 권효인 씨."
그녀에게 말을 건 것은 앞으로 함께 지낼 남자 배우.
효인은 상대 배우의 사고 소식을 듣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대박 라인업에 캐스팅된 드라마를 촬영하기도 전에 망칠 수는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큰 문제 없이 진행하게 된 지금, 그에게도 다유는 은인이었다.
"안에서 불편하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네? 아, 네. 잘 부탁드릴게요."
"이제 들어가셔야 할 것 같아요."
인사를 나눈 들 사이로 스태프 한 명이 신호를 보냈다.
꿀꺽.
긴장한 낯의 다유.
"소다유!"
"응?"
"이거 받아."
"저택에서 핸드폰 사용은 어렵다며."
"들어가기로 한 사람이 바뀌었잖아. 급한 대로 2G 폰이라도 마련했어."
다유는 오랜만에 보는 정석의 폴더폰을 문질렀다.
"정말 고맙다. 3주 뒤에 내가 제대로 모실게. 그걸로 간간이 연락할 테니까, 혹시 안에서 돌발 상황 생기면 알지?"
"알았어~ 그리고 너무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오히려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던 일이라 기대되고 신나. 즐기고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래. 네가 그렇다면. 효인 씨, 우리 다유 잘 부탁드려요."
"네. 무사히 밖으로 보내겠습니다."
깍듯한 아름과 효인을 보던 다유가 작게 미소 지었다.
"듬직하네요. 들어갈까요, 우리?"
달달달.
다유는 효인과 함께 저택으로 들어갔다.
탁.
문이 닫히고 설렘과 긴장으로 물든 마음을 숨긴 그녀가 맑은 미소를 선보였다.
"저쪽인가 봐요."
"듣던 대로 지낼 방이 두 개네요."
"거기가 설정상 집주인의 방이었나 보네요! 그럼 저는 이 방에 짐을 풀게요."
다른 방을 가리킨 다유가 그쪽으로 캐리어를 밀었다.
"일단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볼까요?"
"그렇게 해요. 저택이 커서 구경할 맛이 날 것 같아요! 저 세트장은 처음 와보는데, 효인 씨는 별로 안 신기하겠죠?"
"저도 이렇게 제대로 만든 곳에는 와본 적이 없어서 변호사님과 같은 마음이에요."
"으. 여기서 변호사라 불리는 건 좀- 지금은 그냥 동거인이니까 다유라고 불러주세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을 던진 다유가 냉큼 방으로 들어갔다.
"동거인… 그렇지."
충분히 전달받은 내용이었지만, 막상 당사자에게 들으니 이상한 기분을 느낀 효인이 목덜미를 쓸었다.
살짝 붉어진 귓가를 뒤로하고 집주인의 방에 들어간 효인이 설명대로 준비된 옷을 뒤적였다.
"사이즈가 맞을 거라더니, 진짜 딱이네요!"
"아, 만세이 배우님과 체형이 비슷한 것 같긴 했는데."
"체형만요?"
"그, 어, 아무래도 배우님이다 보니"
"큭큭. 농담이에요. 효인 씨, 생각과 느낌이 다르네요."
"제가 더 나이 많은 걸로 아는데-"
놀림을 받은 효인이 뻘쭘한 얼굴로 말을 멈췄다.
"오, 서재도 있고~ 3주 동안 책 읽으면서 시간 보내도 되겠네요! 그런데 출출하지 않아요? 제가 살짝 듣기로는 여기 어딘가에"
"조심…!"
어색함을 숨기려 활동적으로 움직이던 다유의 몸이 기울어졌다.
바로 반응한 효인의 손이 빠르게 다유를 붙잡았다.
"잡아줘서 고마워요."
"급해서 잡을 게-"
"머리 깨지는 것보단 멱살이 낫죠! 처음도 아니고요. 도와줘서 감사해요~ 그보다 저도 배고프긴 했나 봐요. 너무 긴장했나?"
"주방부터 확인해 볼까요?"
둘의 거리가 어색하게 벌어졌다.
냉장고를 연 다유가 입맛을 다셨다.
"어? 여기 맥주 있는데요?"
"아침부터 마시려고요?"
"큼. 아니, 그냥 있다구요. 반가워서 그만 저도 모르게 손부터 나갔네요."
"2개밖에 없네요. 나중에 마셔요."
아쉽게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에 문어 과자가 들어왔다.
"흠. 집주인이 생존에 되게 집착했다는 설정이 있잖아요. 여기에 식량 창고가 있으니, 밥 걱정 없을 거라고 했는데-"
"찾는 게 문제네요."
있다고는 들었지만, 정확한 장소를 알려주지 않은 친구가 야속했다.
다유의 손이 전보다 과자를 소중히 안았다.
유일한 식량을 야무지게 챙긴 그녀.
"무조건 찾아야 해요."
2G 폰을 받아왔기 때문에 아사할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몰입한 그녀의 눈빛이 집요하게 집안을 훑었다.
어느새 그녀와 나란히 붙은 효인이 소매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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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직업
작가지망생
3,000자 내외의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주기적으로 내용을 수정할 수 있으니 감상에 참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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