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이야파티

단풍의 신부

2023_이야챌린지_058

by 이야
임시 표지

"하아하아-"


어느새 결혼식장과 멀어진 래양이 거친 숨을 토해냈다.

달리기에는 전혀 적합하지 않은 순백의 드레스가 이전과 달리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벗어던지고 싶은 이 옷을 여전히 입은 채 거리를 돌아다니는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무슨 정신으로 자신이 여기까지 도달한 건지, 그녀 자신도 몰랐지만 그때만은 그게 최선이었다.

어여쁜 신부 화장을 지우는 땀이 눈물로 변모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어지럽게 돌아가는 세상 한가운데 신랑 없이 홀로 덩그러니 남은 그녀는 뒤늦게 손을 올렸다.

청승맞은 눈물을 닦으려 가까이 온 손등은 끝내 볼에 닿지 못했다.

분명 드레스와 어울리던 장갑은 그 색을 잃은지 오래였다.

멀리 떼어놓고 본 손을 펼친 래양의 눈가가 더욱 경련했다.

붉은 피로 젖은 손이 꼭 단풍처럼 떨어지기까지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빠르게 낙하해 떨군 두 방울이 섞이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한 래양은 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마저 경고처럼 들렸다.

탐내면 안 될 자리를 기어코 차지한 자신을 향한 비웃음이 붉게 맺혀 흐르고 있는 때였다.

6개월 전.

끼이익.


​"트렁크 열어주시면 가져갈게요~"


​결제를 마친 래양이 택시 기사에게 부탁했다.

이후 한 저택 앞에서 미끄러지듯이 멈춘 차량은 부리나케 그곳을 떠났다.

턱.

드르륵.

캐리어를 끌고 건넌 그녀는 한 인영을 발견했다.


​"뭐예요? 저 따라다니는 거예요?"

"…? 제가 먼저 온 거 안 보입니까?"

"아니~ 단 검사님이 항상 제가 가는 곳에 있으니까 그렇죠."

"오히려 이 변호사가 저를 쫓아온 거 아닙니까?"


​이래의 어이없다는 시선에도 뻔뻔한 래양이 캐리어를 끌어당겼다.


​"하여튼~ 웃자고 한 소리에도 딱딱하시기는. 단 검사님도 여기 일하러 오신 모양인데, 마저 일 보세요~"


​새침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래양이 이래를 지나쳤다.

반면 이래는 다시금 저택을 올려보았다.

이윽고 그도 걸음을 옮겼다.

래양은 널따란 거실 한구석에 짐을 두었다.


​"여기서 살려고 챙겨왔습니까?"

"농담이죠? 친구랑 여행 가려고 챙긴 거거든요."

"재판까지 시간이 남았다고 해도 한가롭나 봅니다?"

"흥. 단 검사님처럼 일만 하고 사는 게 이상한 거라고요."


​래양이 그를 돌아보며 지적했다.


​"일과 결혼하셨다고 소문이 자자해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입니다."


​터벅터벅.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대답한 이래가 자연스레 내부를 돌아봤다.

그 뒤로 래양이 작게 혼잣말을 해도 별로 개의치 않은 그의 손이 문고리로 향했다.

쾅!

이래가 손잡이를 돌리려던 그때, 저택을 울리는 큰 소음.

깜짝 놀란 래양이 살짝 혀를 씹었다.


​"으아. 갑자기 왜 사람을 놀래켜요!"

"제가 그런 게 아닙니다. 밖에서 난 소리잖습니까."


​손등으로 입술을 비빈 래양의 눈에 찔끔 눈물이 고였다.

그런 그녀를 힐끗 바라본 이래는 곧 손잡이를 놓고 현관으로 이동했다.

더그덕.

어딘가에 걸린 듯 열리지 않은 문과 씨름한 이래가 결국 포기하고 돌아섰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한결 나은 얼굴의 래양이 다가왔다.


​"안 열립니다."

"…검사님도 참~ 장난이 심하시다."


​그의 말을 믿지 못한 래양이 급하게 문에 붙었다.

타그닷.

아무리 밀어도 미동도 하지 않는 문.

그녀의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었다.


"갇힌 거예요, 우리? 아니죠? 아, 창문이 있잖아요. 깨서 나가면 되겠네-"

"견적서 제대로 안 읽었습니까? 여기는 창문이 막힌 구조입니다. 그나마 있는 창도 손만 들어갈 정도로 작은 크기"


쾅쾅.


"여기 사람 있어요! 사람 있다고요!!"


패닉에 빠진 래양이 있는 힘껏 문을 두드렸다.

손이 발갛게 변할 때까지 소리친 그녀가 현실을 직시하고 고개를 떨궜다.


"하. 이럴 게 아니라 전화를-"


​진정한 래양은 금방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았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없어요."

"핸드폰 말입니까?"

"택시에 두고 내렸나 봐요. 그래도 여길 혼자 들어온 게 아니라 다행이네요. 검사님이 연락 좀 하셔야겠어요."


​아까와는 달리 침착한 그녀가 신뢰의 눈빛으로 이래를 바라봤다.

그러나 곧 그녀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차에서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일할 때는 쓰지 않는 주의라."

"그게 대체 무슨! 아니, 일하다가 중요한 연락이 올 수도 있는 거잖아요?"

"현장에서는 집중하는 데 방해만 될 뿐입니다."


담담한 그의 말에 정신이 아득해져오는 래양이 간신히 이성을 붙잡았다.


​"그래도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셔야 하는데, 안 오면 직원들이 막 찾겠네요? 그렇죠?"

"오늘은 바로 퇴근하는 걸로 알고 있어서 따로 없을 겁니다. 그보다 친구와 여행을 간다고 했으니 그 친구분이 이 변호사를 찾으면 되는 일 아닙니까?"


​허를 찌르는 이래의 질문에 래양이 입술을 짓이겼다.


​"…단 말이에요. 친구랑 싸워서 여행 취소됐다고요! 그냥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여기로 온 건데, 이게 대체 뭔 일이래요."

"저보고 일과 결혼했다더니, 이 변호사도 만만치 않군요."

"큼. 머리도 식힐 겸 온 거란 말이에요. 아무래도 일에 집중하면 차분해지니까- 그래도 하루만 버티면 되겠죠. 내일이면 출근하지 않은 검사님을 찾을 테니까요."


​래양은 몰랐다.

겨우 해낸 긍정적인 사고에 찬물을 끼얹을 사람이 곁에 있었다는 것을.


​"저도 내일부로 휴가입니다."

"뭐,라구요? 어, 그래도 찾는 사람이 있겠죠? 검사님 가족이나"

"적어도 2주간은 없을 예정입니다만-"


​태연한 대답에 래양의 혈압이 솟구쳤다.


​"열릴 거야. 문이 열릴 거야… 암호를 대면 되는 거야."


​그대로 정신을 놓은 래양이 연신 참깨를 되뇌고 있을 때, 이래는 다시 안으로 돌아갔다.


​"검사님은 이 상황이 두렵지도 않아요? 우리 여기 갇힌 거라고요."


​혼자 아무렇지 않은 그가 이해되지 않은 래양이 그를 쫓았다.

별다른 답 없이 움직인 이래는 아까의 방을 열었다.


​"저만 불안하냐고요."

"걱정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잖습니까."


​성의 없이 답한 그가 안쪽 방을 살펴봤다.

서재로 보이는 방 안에는 책장과 책들로 가득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손 놓고 있자고요? 어떻게든 여기서 나갈 생각을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래양이 여유롭게 구경하는 그를 닦달했다.


​"배고프지도 않아요? 우리 여기서 못 나가면 아사한다고요."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여기 채우기 좋겠습니다."

"응? 거기 먹을 거라도 있어요?"

"마음의 양식이 많아 꽤 부를 겁니다."


​책 하나를 꺼내든 그가 순수한 눈망울의 래양을 향해 말했다.


​"저랑 장난해요?"


​래양이 농담하는 그를 노려봤다.

하지만 진심인 듯 소파에 앉은 그가 책을 펼쳤다.


​"왜 하필 저런 인간이랑 갇힌 거지."


​홀로 심각한 래양이 탐탁지 않은 눈으로 책장을 훑어봤다.

고개를 저은 그녀의 시선이 다시 한 번 이래에게 꽂혔다.

이 상황에서도 편안히 책을 읽는 그.


​"캐리어에 간식을 챙겼었나- 뭐라도 있으면 절대 안 준다."


​서재를 나온 래양이 자신의 짐을 확인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는 스스로를 꾸짖었다.

웬만하면 사 먹을 생각에 먹을 것을 전혀 챙기지 않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휘이이-

거실에서 애꿎은 옷가지만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이상한 소리에 몸을 떨었다.


​"아무래도 혼자 있으면 안 될 것 같다."


​꼬리 내린 래양은 서재로 돌아왔다.

그녀는 여전히 책을 읽는 이래가 재수 없었다.

하지만 직전의 공포를 떨치기 위해 그녀도 결국 책장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카드득.

투다닥.

구석에서 들리는 소리에 이래의 눈썹이 작게 까닥였다.


​"뭐하는 겁니까?"

"아~ 여기 들어갈 공간이 될 것 같아서 정리를 하고 있었는데, 에취!"

"도대체 누가 책장에 들어갑니까?"


​쿵.

모서리를 짚은 이래가 그녀를 신기한 생물 보듯 내려봤다.


​"검사님은 어릴 때 사물함에도 안 들어가 봤어요? 이게 꽤 아늑해서 마음이 편해진다고요."

"정말- 후, 지금 엄청 꼴사나운 거 아십니까?"

"먼지가 많은 걸 어떡- 꺄아아!"

"갑자기 무슨!"


​먼지를 피해 몸을 뒤척이던 래양은 푹 꺼지는 느낌에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서도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 이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아 버텼다.

다리에 래양을 실은 이래의 상체가 흔들렸다.

투다닥.

그대로 어딘가로 빨려 들어간 그들은 견적서에 적히지 않은 새로운 공간을 발견했다.


​"헉- 괜찮아요?"

"언제까지 누를 생각입니까?"

"큼.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요. 사고였다고요."


​바닥을 구르는 과정에서 그의 몸에 올라탄 래양이 옆으로 내려왔다.

탁탁.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은 둘은 어둠에 차차 적응했다.

끼익.


​"이거 불인가 봐요!"


​타닷.

빛이 들어오자 제대로 지하실을 마주한 둘의 눈이 커졌다.


​"와아. 대박! 이거 먹을 수 있는 거 맞죠?"


​선반의 캔을 집은 그녀가 훤히 웃어 보였다.


​"갇힌 지 얼마 안 됐는데, 그렇게 배가 고팠습니까?"

"어제부터 공복이었다고요. 그보다 이 정도면 저희 얼마나 있을 수 있는 거예요?"

"다 먹을 때까지 있을 생각입니까?"

"사람 일은 모르잖아요. 우리가 여기 갇힌 거 보면 앞으로 또 어떻게 될지 누가 알아요!"


식량을 품에 챙기는 래양.

앞으로의 생존을 보장받은 그녀는 전보다 안심한 눈으로 이래를 바라봤다.

아까와는 달리 얼굴에 이것저것 묻힌 그녀가 해맑게 웃자 이래의 표정도 잠시 달라졌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캔을 더 탐내는 래양을 두고 위로 올라가려는 그.

또 혼자 남을까 두려웠던 그녀도 황급히 따라갔다.


매거진의 이전글어쩌다 동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