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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도 사랑해?

2023_이야챌린지_059

by 이야
임시 표지

"물려요."


​벌써 며칠째 같은 것만 먹은 래양이 우울한 목소리로 투정했다.

처음에 그것을 발견한 기쁨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반면 이래는 묵묵히 식사에 임했다.

좀처럼 곁을 주지 않는 이래를 보니 아까보다 속이 울렁거리는 그녀였다.


​"내가 사람이랑 지내고 있는 게 맞나."


​화장실에 들어온 래양이 입을 헹구며 투덜거렸다.

벌써 5일이 지난 시점.

이전의 공포는 잊고, 계속 불만만 쌓여가는 래양이 꾀죄죄한 자신을 바라봤다.


​"물이 너무 적게 나와서 제대로 씻지도 못하니까 더러워 죽겠네."


​고양이가 세수를 하는 것처럼 얇은 물줄기로 간신히 얼굴만 닦아낸 그녀가 불쾌함을 대변했다.

시큼한 냄새를 그나마 향수로 덮은 그녀는 오늘도 고고한 자세로 책을 읽는 이래를 노려봤다.


​"아무리 할 게 없어도 어떻게 책만 계속 읽을 수가 있냐. 진짜 노잼인간."


​하지만 결국 본인도 쌓아둔 책을 펼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지루한 이 저택에서 연명하고 있는 둘은 마음의 양식으로 풍족해지고 있었다.


​"그래도 참 다행이지 않아요? 저는 캐리어가 있어서 옷 걱정은 없고, 그쪽도 집주인이 같은 남자였어서 갈아입을 수도 있고. 약간 찝찝하긴 하지만."


​늘 그렇듯 침묵을 견딜 수 없얼던 래양이 결국 책을 내려놓고는 말을 걸었다.


​"듣고 있어요? 참 집주인도 불쌍해요. 살아생전 별종이긴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빈집에 마약 상이 들어설 줄 예상이나 했겠어요?"


​대답 없는 이래를 향해 노골적인 눈빛을 보냈지만,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던 그녀는 평소처럼 자기 할 말을 이어나갔다.


​"솔직히 여기까지 올 필요는 없었을 텐데, 단 검사님도 참~ 운이 없네요."

"뭐든 확실히 하는 게 좋아서 선택한 겁니다."

"예. 그렇겠지요. 진짜 여기서 나가면 스테이크도 먹을 거고요. 비빔밥도 먹고, 아 피자도 먹을래요. 내가 살아생전 다이어트 한 번을 안 해봤는데 이렇게 굶어야 할 일이냐고요-"


​겨우 버티고 있는 래양이 흐르는 침을 닦았다.


​"아무튼 단 검사님은 저한테 고마워하셔야 해요! 제가 지하실을 못 찾았으면 우리 아사했을 거라고요!"

"…결국 같이 발견한 거 아닙니까?"

"에이~ 제가 거의 다 제공한 건데? 소파에서 책만 읽으시는 양반이 저 책장을 살펴볼 생각이나 하셨겠어요?"

"거기는 경찰 조사에서도 발견하지 못한 곳입니다."

"어쨌든요~ 나가면 저한테 한 턱 쏘라고요! 그 정도 보답은 해야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의 대답에 래양이 밝게 웃었다.

일주일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래양은 그와 며칠간 있으면서 알게 된 것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그의 생각해 보겠단 답변은 웬만해선 긍정적 결론이 나오는 대답이었던 것이다.


​"약속이에요~ 무사 탈출 동지로서 짠 한 번 해야죠~"


​비록 기약 없는 구출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정확히는 태연하게 하루를 보내는 이래의 태도에 불안함이 사라진 그녀에게는 구조가 당연했다.


"단 검사님 말대로 핸드폰을 기사님이 찾을 거고, 그래서 최근 연락처인 제 친구한테 연락해 줄 거고~ 그러다 보면 이상한 걸 알 테니까 금방 나가겠네요!"


​물론 그 이야기를 나눈 후에도 별다른 소식은 없었지만, 그녀는 사람의 선함을 믿어보기로 했다.

아무리 서로 얼굴을 붉히고 싸웠다 한들 친구는 친구였다.

오래 연락되지 않는 자신을 걱정할 거라 믿은 래양은 한결 편한 얼굴로 책을 바라봤다.


​"이거 예전에 읽은 건데 다시 보니까 또 새롭네요~ 결혼식에서 신부가 도망친 이야기인데, 과거에는 이해되지 않았던 감정선이 지금은 공감이 되네요."

"저는 오히려 식장에 홀로 남은 신랑에게 더 이입이 됐습니다만."

"그래요? 그런데 단 검사님은 일하고 결혼해서 식장 갈 일도 없잖아요~ 아, 거기서 사건이 일어나면 가시려나?"

"신부가 있다면 피할 생각은 없습니다."

"오. 과연 검사님을 데려갈 신부가- 꺄아."

"이번엔 또 뭡니까?"


​새가슴인 그녀가 잘 놀라는 것을 익히 본 그가 평이한 목소리로 물었다.


​"있었다구요. 뭔가 보였다고요."


​한 번씩 좁은 창문 너머로 귀신을 봤다는 그녀의 주장은 안타깝게도 받아들여진 적이 없었다.


​"계속 이 변호사 눈에만 보이는 걸 보니 그냥 눈에 먼지가 들어간 게 아닐까 합니다만-"


​놀란 나머지 이래의 곁으로 바짝 붙은 래양이 고개를 들었다.

서로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시선을 마주한 둘의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렀다.


​"큼. 그런 거 아니거든요. 진짜 있는데, 왜 자꾸 저만 보는 건지. 실은 봤는데 모른 척하는 거 아니에요? 저 놀리는 거 좋아하잖아요."

"놀린 적도 없고, 좋아한 적도 없습니다. 그보다 더운데 떨어지시죠?"

"그럴 생각이었거든요. 아무튼 진짜 제가 꼭 알아내서 증명할 거니까 절 허언증 환자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예. 응원하겠습니다."


​래양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다시 책에 시선을 둔 이래를 못마땅하게 내려보던 그녀는 밖으로 나와 2층으로 올라갔다.


​"흠. 그나마 내부가 넓어서 괜찮았는데, 창문이 죄다 작으니까 답답하긴 하다. 그보다 바깥문은 대체 뭘로 막힌 거야- 이거 완전 원한 범죄 아니야?"


​충분히 그럴듯한 가능성을 제기한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단 검사님 정도면 그동안 빵에 보낸 사람만 몇이야. 그들 중에 출소했으면 검사님을 노려서 아사시킬 계획이었던 걸지도. 그리고 불쌍한 나는 거기에 휘말린 거고?"


​그녀는 계단 앞에 놓인 소파에 앉으며 상상을 확장시켰다.


​"경찰이 미처 찾지 못한 마약이라든지, 어? 아니면 일부러 가져다 놓고 그걸 증거로 빼도박도 못하게 만들어서 막 평판을 떨어뜨리려고 했던 걸지도 모르겠네. 허- 뭔 개소리야."


​이런저런 추리를 이어가던 그녀가 스스로도 어이없는 결론에 인상을 찌푸렸다.


​"나, 변호사 관두고 작가나 할까? 요즘 책만 읽어서 미친 건가?"


​자조한 래양이 그대로 소파에 누웠다.

낮잠이나 잘 요량이었다.

이곳에 와서 자는 시간만 부쩍 늘은 그녀였지만, 금세 또 꿈나라로 빠진 뒤였다.

삐그덕.

잠시 후.

계단을 올라온 이래는 고른 숨결을 내며 자고 있는 래양을 내려다봤다.

그녀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들고온 담요를 위에 놓아준 이래가 옆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쯤이었던가-"


​그곳의 벽면에 그어진 표시를 만진 그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허리춤까지 오는 높이였다.


​"내일이면 나아질지도 모르겠네."


​과거의 기억 사이로 래양의 얼굴이 겹쳐졌다.

생각을 정리한 그가 방을 나갔을 때는 이미 일어난 래양이 멍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웬일로 친절을 베풀었대요?"

"원한 범죄의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이 변호사의 마음을 살 필요성을 느꼈을 뿐입니다."

"…어, 그걸 들었어요?"

"저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 줄 알았습니다만."


​주방으로 도망친 래양이 얼굴을 붉혔다.


​"그냥 해본 말이에요! 아, 진짜 놀린 적 없다면서!"

"그저 사실 확인입니다."

"우씨. 단 검사님이 이래서 원한 범죄를 당한 걸지도 모른다고요."

"예. 그래서 여기서 가장 위험한 이 변호사에게 미움 당하지 않으려면 노력해야겠다고 판단했습니다."

"뭐요? 제가 어디가 위험하단 거예요?"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흠. 저번에 칼을 들이밀었던 건 잊으셨나 봅니다."

"아, 그거 실수였다구요! 아니, 그냥 식기 집은 걸로-"


캔을 들고 돌아온 래양은 주방을 뒤적이다 식칼을 찾아냈다.

어디에 쓰일까 싶어 들었다가 이래의 앞에서 멈춘 칼은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그땐 조심성이 부족했어요. 죄송해요."


과오를 뉘우친 래양이 고개를 숙였다.


"예. 통조림 더 안 먹을 겁니까?"

"으. 먹을 거예요. 이거라도 먹고 버텨야죠."


래양이 씩씩하게 수저를 들었다.

이후 불만 없이 식사를 마친 그녀는 그렇게 열흘을 더 저택에 갇혀 지냈다.


"계십니까?"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잠에서 깬 래양이 이미 방을 나온 이래와 마주쳤다.


"지금 사람이 온 거죠?"

"네. 보름 만에 구조되는 겁니다."

"진짜 끝까지 저만 감정적이네요! 아무튼 빨리 가요! 네! 여기 사람 있어요! 좀 꺼내주세요!"


​여전히 담담한 그에게 적응된 래양이 짧게 한 마디만 하고 밖에 말을 전했다.

드디어 넓은 하늘을 마주한 둘.

곧장 병원으로 이송됐다.


​"도대체 어쩌다 여기 갇힌 건지-"

"말도 마요. 15일이나 있었다고요. 제 친구가 저를 이렇게까지 안 찾을 줄은."

"친구요?"


​병원에서 검진을 받은 래양은 조사하러 온 경찰과 대화하고 있었다.


​"제 친구가 신고한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쪽으로 산책 다니는 분이 며칠째 차가 주차되어 있어서 신고하신 겁니다."

"진짜요?"

"네. 아무래도 출입 금지로 막아둔 곳에 같은 차가 계속 있으니까 수상해서 연락했다고 하네요. 이전에도 마약 관련으로 얘기가 나온 장소다 보니, 혹 그런 게 또 생겼나 싶어서 고민하다 넣었다네요."

"몰랐네요."


​경찰의 말이 이어졌지만, 래양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인간관계를 돌아보던 그녀는 곧 환자복을 입은 이래가 지나가는 것을 발견했다.


​"단 검사님도 영양실조죠?"

"단이래 검사님은 그것 말고도 몸에 타박상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제야 집중한 그녀의 안색이 파리하게 변했다.


​"변호사님, 괜찮으세요?"

"아, 예. 저는 괜찮죠. 단 검사님이 고생 많으셨어요."


​첫날에 있었던 일이 생각난 래양이 애꿎은 이불만 문질렀다.

보름 동안 탓하지 않은 이래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이 동시에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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