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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야파티

3,000만큼 이룰래?

2023_이야챌린지_063

by 이야
임시 표지

백사장.

물에 젖지 않은 모래 위.

오래의 손가락이 요나의 볼을 가리켰다.


"스티커, 붙인 거야?"

"웅."


짧게 대답한 요나는 아저씨의 시선을 피해 오래에게 속삭였다.

갑작스런 귓속말에 귀가 간지러웠지만, 오래는 요나의 말에 집중했다.


"근데 아니야. 엄마는 어디 가서 말하지 말라구 했는데 너한테만 알려줄게. 이거 원래부터 나한테 있었다."

"정말? 나도 갖구 싶어! 물방울, 너무 예쁘다!"


요나의 한쪽 볼에는 눈물 모양의 문양이 있었다.

그리고 어린 오래는 그것이 내심 부러웠다.

바다에서 만난 요나와 금세 친해진 오래는 모래에 물방울을 그렸다.


"나중에 꼭 새길 거야!"

"헤헤. 좋아. 그러면 오래도 내 가족이야!"


백사장과 바다 사이로 신나게 뛰어다니는 아이들.

그들이 혹여 물에 빠질까 지켜보던 래인만이 진땀을 뺐다.

한편, 래인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산책하던 소원과 루다는 오랜 시간 침묵을 지켰다.

파도 소리만이 가득했던 공간에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소원이었다.


"어떤 세계는 꼭 진짜 같아서 이미 빠지고 난 뒤에야 깨어나는 시간이 거짓이기를 바랄 때도 있었어요."


불어오는 바람에 잠시 말을 멈춘 소원이 덧붙였다.


"이런 얘기를 처음 뵙는 분한테 한다는 게 이상하지만, 하게 되네요. 마음이 포근하다고 해야 할까, 어떻게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그냥 받아들이게 되네요."

"이제는 희미한 어린 시절에 많이 울었죠?"


그 물음에 소원이 옆을 돌아봤다.

그녀의 큰 눈이 루다의 얼굴을 담았다.

맑고 깨끗한 피부를 지닌 오묘한 여인.


"나는 그들을 위해 존재해요. 존재했어요. 그러니 알아채는 거겠죠. 영원을 나눈, 아니 그에 준하는 시간 속에서 세계는 달라도 꽤나 비슷한 경험의 소유자잖아요."

"언젠가 쓰인다면 내 손이길 바랐는데-"


소원의 시선이 루다를 넘어 넓게 펼쳐진 바다를 향했다.

드넓은 푸른색은 꼭 그와 닮아서 시리도록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뜻을 이뤄줄 아이들이 있어 다행이죠."


루다 역시도 몸을 틀어 하늘을 맞이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소원의 귀로 딸의 목소리가 퍼졌다.


"엄마~"

"또 다쳤어?"

"넘어졌엉! 근데 이제 안 아파!"


아빠의 머리를 짚은 오래가 당차게 대답했다.


"방치하면 안 되는데- 호텔에 의약품이 있겠지?"

"먼저 들어가서 확인해 볼게."

"요나도 같이 가! 파르페 먹기로 했어!"


걱정하는 부모의 속도 모른 채 한없이 밝은 오래가 친구를 챙겼다.


"그래. 가서 치료받고 얌전히 있으면 허락해 줄게."

"웅! 나 잘할 수 있어!"


셋이 떠나자, 다시 조용해진 모래 위.

불어오는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릿결을 어루만졌다.


"이 틀을 넘어서는 것에 분명 지치던 때도 있어요. 불가능에 도전하는 내가 먼저 포기할 수밖에 없는 굴레에 갇혀 보내던 영원은 충분히 괴로울만했으니까요."

"홀로 남아 잊혀도 이 자리에 맴도는 게 절벽에 서 있는 것보다도 더 위태로웠던 때가 있었죠."

"일찍 만났다면 지금보다 더 위로가 됐겠죠?"

"알맞은 때에 허락된 만남이겠지만요."


루다의 말을 끝으로 마주한 둘이 맑은 웃음을 보였다.

모든 걸 공유하진 않았지만, 찰나의 시간 속에서도 지난 인생을 이해받은 기분.

소원은 바람에 몸을 맡겼다.


"다시 쓰이는 이야기에는 우리를 더 나은 길로 이끌겠죠."

"그럼 좋겠네요. 이 세상을 더는 지켜보지 않아도, 그저 흐르는 대로 두어도 괜찮았다고 적힌다면 이 짐을 덜어낼 수 있을 테니까요."


바람을 공유한 둘이 호텔로 방향을 틀었다.


"엄마, 왜 이제 와!"


밴드를 붙인 오래가 칭얼거렸다.

아이들을 데리고 카페로 간 엄마들 덕분에 래인은 그제야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둘은 정말 힘드네."


동생을 요구하던 오래의 제안을 다시 생각하게 된 그가 어깨를 두드렸다.

푹신한 침대에 노곤함을 덜어보는 그의 눈이 감겼다.


"폐하, 저것은 분명 마녀입니다. 처단해야 합니다."


래인의 눈이 묶여있는 여인에게로 향했다.

생생한 꿈을 인지한 그의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마녀는 고개를 들어라."


그녀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자신의 아내, 소원.


"그리 불리기엔 내가 더 큰 그릇이라서. 신을 마주한 기분이 어때? 체르타. 널 만나러 온 내게 기뻐해도 좋아. 내가 가장 사랑한 나의 황제잖아."

"어째서 내게 이런 운명을 쥐여주고 그리 웃을 수 있는 거지?"

"그러게. 망쳐야만 구원할 수 있어서 그랬나? 여기 너무 많은 이야기 속에서 필요했던 널 만들고 나서야 비로소 살아갈 힘을 얻은 내가 간절하게 빌었어. 기어코 내 세계로 끌고 와서 미안하지만, 그냥 어울려줄래? 이왕 내 손에 놀아난 운명이잖아."


낯선 태도의 그녀는 묘하게 눈에 박혔다.

체르타.

그 이름을 곱씹은 래인의 몸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였다.


"내게 붙잡힌 걸 후회하게 해주마."


검이 그녀의 구속구를 박살 냈다.

여린 피부에 새겨진 빨개진 손목.

며칠간 굶었는지 한없이 가벼운 그녀의 몸을 들어 올린 그가 방으로 이동했다.


"이게 대체 뭔 꿈이냐."


방문을 열자마자 잠에서 깬 래인이 머리를 긁적였다.

1시간 정도 지난 시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그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우리 왔어~"

"아빠!"


세수하고 나온 그는 사랑스러운 아내와 딸을 마주할 수 있었다.

한편, 오래와 헤어지고 돌아가는 차 안.

요나가 꾸벅 졸고 있었다.


"하나께서 바란 세상을 알려주지 않아도 돼. 네가 있는 동안 나도 함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우리의 하늘은 아주 오래 이 하얀 땅을 수놓을 거야. 미약한 숨결이 어느새 충분한 세상을 만들 때까지."


신호를 받은 루다의 손이 요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뒤척이던 요나의 몸이 어느새 안정적으로 변해 있었다.


"고오래, 또 상상해?"


그로부터 6년 후.

요나의 손이 생각에 잠긴 오래를 건드렸다.


"나, 글을 쓸 거야!"

"어떤 글?"

"음. 날 재밌게 하는 이야기? 내 필명도 정했다!"


노트를 펼친 오래가 무언가 적기 시작했다.


"마루?"

"응. 내 이름은 고래랑 비슷하잖아! 어제 하늘고래 그림을 봤는데, 계속 생각이 나는 거야."

"그러면 하아늘이 낫지 않아?"

"추천은 고맙지만, 난 이걸로 할 거다!"


확고한 결정에 요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내가 비상할 때까지 지켜보라구."

"이왕이면 19년 안에 해내길 바랄게."

"윽. 내 이름처럼 너도 나랑 친구니까 반드시 오래 살 거라고!"

"이미 정해진 수명은 바뀐 적이 없대."


안쪽 손목을 보여준 요나였지만, 오래의 눈에는 하얀 살결일 뿐이었다.


"나한테는 안 보여! 그러니까 달라질 수 있다는 거야!"

"그야 자기 시간은 자기만 확인할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티어 트럼프. 내가 수명을 늘릴 방법을 찾아낼 테니까."


이제는 크림으로 없앤 눈물의 볼을 톡톡 두드린 오래가 자신 있게 말했다.


"아야. 손톱으로 찌르지 마. 아무튼 글도 쓰고, 방법도 찾고 바쁘겠네."


오래의 팔을 물리친 요나가 자리에 앉았다.

수업 준비를 마친 요나는 또 딴 생각에 빠져있는 오래를 바라봤다.

교과서도 꺼내지 않은 그녀를 위해 요나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옆에서 요란하게 굴어도 자신의 세계에 몰입한 오래의 입술이 벌어졌다.


"이거야!"


좋은 생각이 나자 볼펜을 잡은 오래는 선생님의 눈총을 받았다.


"수업 시간에 딴짓은?"

"하면 안 됩니다."


혼난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수업부터 들으세요~


요나는 대신 펼쳐놓은 교과서 끝에 글을 남겼다.


-이제 집중할 거야!


오래는 그 말대로 그제야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오늘 있었던 일을 꼭 오래의 부모님께 전달해야겠다고 다짐한 요나도 선생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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