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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쉬트 하우스의 황제

2023_이야챌린지_064

by 이야
임시 표지

"아무래도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쿨럭.

예빈은 남자를 노려봤다.

쉬고 있는 자신을 배신한 호위.

그를 따르는 무리들과 대치한지도 벌써 한 시진.

검으로 정평 난 그녀라 할지라도 이 많은 인원을 홀로 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2시간 동안 버틴 그녀의 몸이 균형을 잃었다.


"오라버니?"


공민성의 뒤로 이 일의 배후가 나타났다.

그것을 확인한 예빈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어찌하여-"


꽈악.

싸늘한 눈빛의 유예성은 동생의 손을 짓이겼다.


"전하. 아니, 이제 폐하라 불러야 하지요. 조선을 대국으로 만들다니, 이 오라비가 기특하여 친히 명에서 왔사옵니다. 제1계승자인 제가 유학을 나간 사이에 증조부께서 승하하셨는데, 어찌 이를 알리지 않고 조부께 왕위를 물려받으실 수 있습니까?"

"오라버니께서는 출타하실 때, 이 조선에 뜻이 없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2년 전, 소식을 전하려 보낸 사람을 계속 돌려보낸 것은 잊으신 것입니까!"


예빈이 이를 갈았다.

이제 와 권력에 욕심내는 사내가 진정으로 자신과 같은 피가 흐른다니.

불순한 동생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예성이 그녀의 검을 빼앗았다.


"참 좋은 검이지요. 아버지도 미처 몰랐을 것입니다. 자신의 명검이 제 딸의 목을 겨눌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겠지요."


스르릉.

목에 닿은 칼날이 차가웠다.

기어코 끝을 보려는 그의 가라앉은 눈동자에 애원을 남기지 않았다.


"고모님은 이번 일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외딴섬에 가 있는 그분이 뭘 아시겠습니까?"

"폐하- 저희가 왔습니다!"

"호오. 충견들이 이제 도착했나 보군요. 가는 길 외롭지 않게 곧 보내드리죠."


죽음이 지척까지 들어와도 살려달라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충직한 신하들이 자신을 구하겠다 분투하는데, 가만히만 있을 수 없었다.

너덜한 오른손을 대신해 왼손이 품속의 단검을 빼들었다.


"조카를 보지 못해 아쉬울 것 같습니다. 오라버니."

"이 망할-"


그대로 고꾸라진 예성의 등을 짚은 예빈은 배신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큭. 아직도 힘이 남아계신 겁니까-"


다른 이들을 상대하던 그로서는 황제의 일격을 피할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예빈도 지칠 대로 지친 터라 급소를 찌르지는 못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폐하. 송구스럽니다.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면"

"됐다. 우리 모두 무사하면 충분- 쿨럭."


일대를 정리한 황제의 사람들이 그녀를 챙겼다.

그녀의 몸 상태는 좋지 않았다.


"바로 의원을-"

"그대들의 안색도 좋지 않구나."


본인은 간신히 걷고 있으면서도 호위들의 상한 얼굴을 본 예빈이 걱정했다.

민성이 예빈의 호위를 담당할 당시, 다른 이들이 빨리 오지 못하도록 손을 쓰긴 했다.

뒤늦게 독에 당한 것을 알아챈 그들은 황제의 안위를 우선했다.

제대로 해독도 하지 못한 채 도착했지만, 잔당은 많지 않았다.


"폐하.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폐하의 용체부터 챙기십시오."

"군주는 쉽게 쓰러지지 않는-"

"폐하!"


아직 숨은 붙어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무결 형님, 어떻게든 폐하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막내 태찬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나, 역시 동의한다. 우리 사이에 전해져온 비술. 그게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첫째인 그래가 막내의 의견에 힘을 실었다.


"수호, 너도 동의하느냐."

"예. 그것 역시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입니다. 우리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 맞습니다."


무결이 비책을 꺼냈다.

꿀꺽.

태찬이 하얗게 질린 폐하의 용안을 살폈다.


"부디 폐하를 보호하소서."


파앗.

마차가 빛으로 물들었다.

암전 속에서 긴장한 이들이 눈을 떴을 때.


"폐하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이냐!"

"일단 밖으로 나가봅시다."


누워있던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시각.

하얀 천장을 마주한 예빈은 꿈에서 깨어났다.


"나도 참. 내가 조선의 황제라니- 무슨 이런 개꿈이 다 있어?"


몸을 일으킨 예빈이 밖으로 나왔다.


"동진 오빠, 벌써 일어났네?"

"응. 오늘 왠지 손놈 아니 손님들이 올 것 같아서-"

"오, 새로 하숙생들이 오나? 좋은 사람들이었으면 좋겠다."


예빈은 신기가 있는 동진의 말을 믿었다.

곧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창을 바라보는 그녀.

드넓은 하늘이 푸르렀다.


"이불부터 빨아야겠다!"


동진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세탁을 끝낸 예빈은 나갈 채비를 마쳤다.


"하긴. 맨날 궁을 지나치는 데 그런 꿈을 꿀만도 하겠네."


들어가 보진 않았지만, 매일 지나가는 곳이긴 했다.

아침의 꿈을 이해한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경복궁에서 멈춘 버스는 익숙한 차림의 남정네들을 태웠다.


"학생들, 돈은 내고 타야지~ 컨셉에 너무 충실한 거 아니야?"

"몇 냥이면 되겠소?"

"천오백 냥은 내야지."

"그그리 비싸단 말이오? 내 1년 치 자산을 내라 하다니. 조선 땅이 이리 변한 것도 기할 노릇인데, 허어-"


당황한 그래가 동생들을 데리고 내리려던 찰나.


"폐하!"


수호의 큰 소리에 모두 놀란 눈으로 뒷자리를 돌아봤다.


"진진짜 폐하십니다."

"아가씨~ 그 학생들하고 아는 사이야?"

"예? 아니요. 처음 뵙는, 어? 어?"


분명 오늘 꿈에서 만난 남자들.

예빈은 그들을 알아봤다.


"일,일단 내릴게요!"


쉬이익.

뒷문이 열리자 네 명의 남자들을 데리고 내린 예빈이 이마를 긁적였다.


"폐하가 이곳에 계셔 다행입니다. 그리고 미천한 저희들과는 달리 이곳에 적응하기도-"

"잠시만요. 저는 일단 여러분이 아는 사람이 아닐 건데. 어, 그냥 닮은 사람?"

"무슨 소리십니까! 이렇게 날개까지 있으신데-"


태찬의 시선에 예빈도 고개를 숙였다.

성인이 되자마자 새긴 타투.


"흉터를 가리려고 옥체에 넣으신 것까지 다 기억하는데, 폐하. 혹 저희가 무단으로 비책을 사용해 화나신 거라면-"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아닛. 여기서 무릎 꿇지 마시고요."


남자들을 만류한 그녀의 가방에서 전화가 울렸다.


-오늘 일찍 갔어? 버스에 없네?


수화기 너머로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이 생겨서 자체 휴강할 것 같아.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


친구가 미처 뭐라고 하기도 전에 통화를 끊은 예빈이 남자들을 일으켜 세웠다.

꼬르륵.

큰 울림에 모두들 예빈의 시선을 피했다.


​"가장 싼 걸로 먹어야 해요. 전 가난한 대학생이라고요."

"어머니의 손맛이 느껴져요!"


김밥을 먹는 태찬의 입술이 반질거렸다.

분식집조차 비싼 세상에 알바비를 탕진한 예빈이 물을 들이켰다.


"아휴. 그냥 모른 척할걸. 하필 꿈에서 본 사람들이라 나도 모르게 그랬네."

"너,너무 맵습니다아"


맵찔이들의 뒷바라지를 한 그녀가 혼 빠진 얼굴로 버스를 기다렸다.


"교통비도 다 내가 내야 하는 건가?"


힐끗.

세상을 신기하게 구경하는 네 남자들.


"동진 오빠! 나 좀 도와줘!"


자꾸 딴 길로 새려는 그래와 태찬을 마크한 예빈이 간신히 집에 도착했다.

그나마 무결과 수호는 점잖았다.


"그런 줄 알았지."


몇 개월 후.

동진의 자비로 같이 일하게 된 그들.


"저 잘생긴 바보들. 대체 언제 과거로 돌아가는 거래요?"

"글쎄, 폐하를 두고 떠날 것 같지는 않은데?"

"아, 누가 황제란 거예요!"


놀리는 동진과 투닥대던 예빈이 다시 그들을 살폈다.


"덕분에 매출이 늘어서 좋긴 한데, 제가 계속 눈초리 받는 건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네요."


포쉬트 하우스의 홍일점이라 그런가.

손님들에게 따가운 눈총을 받는 신세가 처량했다.


"같이 사는 것까지 알면-"


부르르.

예빈이 몸을 떨었다.

철저히 입단속을 시켰지만, 혹여 그들이 말실수라도 할까 예빈의 눈이 뾰족해졌다.


"예빈아!"


처음엔 절대 허락하지 않은 그들도 이제는 편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쟁반을 건네받은 예빈이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아휴. 내 심장만 가장 고생하지."


쌀쌀해진 지금.

붉어진 볼을 식히는 그녀가 쟁반 위 쪽지를 발견했다.


-파이팅!


어느새 현대에 완전히 적응한 무사들이었다.

​예빈의 손이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그래도 여전히 붉은 볼은 귓가까지 번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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