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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자로 전락한 공주는 황후가 됩니다
2023_이야챌린지_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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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Nov 5. 2023
임시 표지
"전쟁영웅, 제이드 세르티아. 이번에도 당신이야."
콱.
표창이 정중앙에 박혔다.
타이니가 눈을 감았다.
흩날리는 재.
그 사이로 물씬 풍기는 지독한 피 냄새.
이제는 익숙한 그 향이 가장 싫은 때.
"내 나라를 손에 넣은 걸 후회하게 해주겠어."
복면을 내린 그녀는 결정했다.
며칠 전, 방문한 세리아티 공작의 제안을 수락하기로.
"오라버니. 비록 한 번도 뵙지 못했지만, 꼭 복수해 드릴게요."
제라르 세리아티의 장례식장.
입양된 타이니는 이제 세리아티의 유일한 계승자였다.
하얀 상복의 그녀가 굳은 얼굴의 공작을 응시했다.
"황제는 조카의 장례에도 참석하지 않는군요."
"거슬리는 돌이 알아서 사라졌는데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가장 강력한 이아로스를 넘기고, 꼭 황태자비가 될게요."
"나도 그대의 백성들을 찾는 데 최선을 다하지."
공작 역시도 황가의 사람이었지만, 그는 늘 전쟁을 반대했다.
특히 아들의 출정 소식은 한사코 반발했지만, 결국 황제의 뜻대로 일은 벌어졌다.
"형님. 이번에는 저도 결코 물러날 수 없겠습니다. 제 소중한 피붙이마저 데려갔다면, 그 지옥을 형님께서도 겪으셔야죠."
집무실로 돌아온 공작이 목걸이를 매만졌다.
이제는 영영 볼 수 없는 가족의 초상화가 담긴, 목숨보다 귀한 물건이었다.
나흘 후.
타이니는 공작과 함께 입궁했다.
공작이 귀빈실로 사라지고, 연회장에는 타이니 홀로 우두커니 서있었다.
곧 그녀에게 말을 건 이는.
"헬리아 이아로스예요."
붉은 드레스를 입은 이아로스 공녀의 인사.
타이니도 그간 배운 예절을 선보였다.
"타이니 세리아티입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일 무렵.
두 공녀를 지켜보던 이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세리아티 가문은 황가와 같은 핏줄인데도, 황태자비 후보를 데려오다니. 공작이 아들을 잃고 정녕 미쳤나 봅니다."
황태자비 후보의 부모 중 몇몇이 타이니를 두고 수군대고 있었다.
공작이 없는 틈을 타 흉을 보는 그들.
친딸이 아닌 타이니는 개의치 않고, 준비된 음식을 집었다.
오히려 그들을 노려본 자는 헬리아.
그녀의 상체가 타이니의 시선을 가렸다.
"저들의 말에 신경 쓰지 말아요. 공녀."
까득.
타이니는 아무렇지 않게 쿠키를 먹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귀족들의 힐난이 커졌다.
같이 마련된 음료까지 마신 타이니는 당황한 헬레나의 얼굴을 살펴보고는 입을 열었다.
"근친인 것보다는 천한 제 신분이 더 문제가 되는 거겠죠. 어디서 굴러들어 온 지도 모르는 돌이 나란히 후보가 되었으니까요."
이내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털어낸 타이니.
"저저 숙녀가 어찌 저런 발칙한-"
흔히 볼 수 없는 행동으로 물의를 일으켰지만, 그녀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헬레나는 타이니를 따라 팔을 뻗었다.
"저도 하녀들의 성화에 밥을 못 먹었는데, 앞의 간식이라도 먹어야겠네요."
"이거 맛있어요. 휘낭시에."
"고마워요."
두 공녀가 한창 디저트 타임을 즐기고 있을 때.
공작은 황태자와 독대했다.
"작은아버지, 지금 제게 근친을 요구하는 겁니까?"
"전하께서 왜 이리 화를 내시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제 딸아이도 공작가의 자녀로서 충분한 자격이 있을 텐데요."
"아버지께서 공작의 수작을 눈치채지 못할 거라 생각합니까? 애초에 이런 압박은 통하지 않을뿐더러 도를 넘었습니다!"
공작의 눈썹이 올라갔다.
"도? 이번 전쟁에서 저는 제 아들을 잃었습니다. 황태자께서는 기억하십니까? 공자를 무사히 보내주기로 한 약속 말입니다. 시신이라도 챙겼으니 다행으로 알라, 그런 뜻이었답니까?"
"그, 후. 제가 흥분했습니다. 제라르의 일은 저도 무척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세리아티에서 황태자비 후보를 데려온 건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무엇이 두렵습니까? 오히려 반겨야 할 일이 아닙니까. 제국의 긍지 높은 가문과 공식적으로 손을 잡는 것입니다. 그저 충견의 이아로스를 엮는 것보다도 득이 많지 않겠습니까?"
공작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냉정했다.
결국 그 뜻을 반려하지 못한 황태자의 손이 목덜미를 문질렀다.
대화를 끝낸 공작은 미련없이 방을 나갔다.
잠시 후, 홀로 남은 제이드의 어깨가 떨렸다.
문을 지그시 바라보는 눈은 그 너머의 공작을 좇고 있었다.
"못난 아들을 용서하세요. 아버지."
일순 제이드의 갈색 눈동자가 풀렸다.
제이드에게 언제나 눈엣가시였던 금빛이 맴돌고 있었다.
한 달 전.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오던 길.
자신을 향한 제이드의 검에 맞선 제라르는 기습에도 살아남았다.
싸늘하게 식은 주검은 제이드의 것이었다.
'이 사실이 절대 알려져서는 안 된다.'
그랬다.
황태자의 죽음을 공표하는 순간.
황제는 공작을 반역으로 몰 수도 있었다.
아버지를 지키기 위해서 제이드로 변모한 제라르는 다시금 마법진을 그렸다.
온전한 황태자가 된 그.
연회장으로 이동하는 걸음이 묵직했다.
"드디어 오셨네."
"타이니, 잘 겨뤄보자! 누가 황태자비가 되든 우린 쭉 친구인 거야?"
잠깐의 시간 동안 타이니와 가까워진 헬리아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 생각해 볼게."
타이니의 검푸른 눈동자가 제이드를 향했다.
7년 전, 봤던 그 혐오스러운 눈동자에 손이 절로 검을 찾았다.
다행히 비어있는 그녀의 허리춤.
하지만 다리에 찬 단검을 뽑아내 찌르고 싶었다.
겨우 마음을 진정한 타이니는 제이드와 시선을 마주했다.
무슨 변덕인지 자신을 살려줬던 11살의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이즈피나…"
일순 그녀의 눈이 커졌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분명히 들렸다.
'날, 기억하는 거야?'
휘청이는 타이니의 팔을 헬리아가 잡았다.
헬리아는 안색이 파리해진 그녀를 부축했다.
"어디 안 좋아?"
"괜찮아."
다시 상체를 세운 타이니는 태연한 눈길로 제이드의 얼굴을 훑었다.
'상관없어. 날 알든, 모르든 난 황태자비가 되어 꼭 저 심장에 검을 박을 거니까.'
한편 그녀의 다짐을 모르는 제이드, 아니 제라르는 당황하고 있었다.
셀틴의 손에 멸망한 왕국의 공주.
그녀를 다시 만날 거라고는 상정하지 않았다.
아니, 그녀는 모른다.
어린 제이드가 왕가를 찾았을 당시.
마법을 쓸 줄 알았던 제라르가 제이드의 눈을 빌려 타이니를 보았다는 것을.
그가 씁쓸하게 고개를 돌렸다.
'또 제이드로 볼 줄은 몰랐지만, 그녀가 황태자비가 될 일은 없을 거야.'
타이니로 향하는 마음을 다잡은 그의 눈은 자연스레 공작을 찾았다.
벌써 두 사람이나 제외한 제라르.
그러나 그는 한 번 더 당혹감에 젖었다.
'설마 세리아티의 입양아가-'
타이니였음을 깨달은 그의 마음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같은 사람을 배제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의 귀로 황제의 입장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황태자를 보고 웃은 황제는 곧 동생을 마주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금세 표정을 풀고는 황태자의 어깨를 짚었다.
"무사귀환한 황태자의 짝 후보로 와준 영애들을 보니, 안심이 되는군요. 대국마저 무너뜨린 셀틴은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것입니다!"
점잖은 황제의 말에 모두들 박수를 쳤다.
좌중을 둘러본 황제는 선포했다.
"그리고 황태자비 수업뿐만 아니라 황후 수업도 같이 받을 테니, 부디 제 아들의 짝으로 충분한 사람을 황가에 들이길 기원합니다."
연회장은 침묵과 경악으로 물들었다.
현 황태자에게 황위를 물려주겠다는 뜻과도 같았다.
모두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는 와중에, 세리아티 공작 가문만이 조용히 머리를 식혔다.
긴 승전식이 무르익고, 돌아가는 마차 안.
"될 것 같으냐."
"선택의 여지가 있긴 한가요?"
헬리아는 창밖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이아로스 공작이 딸을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동생인 헬리오는 알아서 가문을 위해 일하는데, 장녀인 너는 어찌 이리 무신경한 거냐."
"아버지는 충성에 보답받길 원하잖아요. 그걸 이뤄줄 사람이 저뿐인 거 저도 잘 알아요."
"큼. 혹여라도 허튼 생각하지 말거라."
연회 내내 귀족들과 얘기한다고 딸은 뒷전이었던 그가 이제 와서 챙기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구태여 꺼내지 않고, 마차에서 내렸다.
"누나, 괜찮겠어?"
"뭘 마중까지 나왔어."
"걱정돼서 그렇지. 아버지가 또-"
헬리아의 손이 기특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쁘지 않았어. 좋은 친구도 사귀었는걸?"
타이니를 떠올린 그녀가 동생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솔직히 동생과 가문에서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아버지의 말대로 장녀인 자신이 감수해야 할 문제였다.
타악.
방으로 돌아온 헬리아가 커튼을 쳤다.
"타이니한테 아버지를 죽여달라 사주해야 할까?"
처음엔 몰랐지만, 불현듯 생각났다.
언젠가 의뢰해서 받은 암살자의 정보.
그때도 고용할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아직은 참아야겠지. 헬리오에게서 아버지를 뺏을 순 없는 일이니까."
붉은 눈동자가 깊이 가라앉았다.
거기엔 그것과 닮은 반지가 비치고 있었다.
전쟁에서 잃은 건 공자뿐만이 아니었다.
톡.
눈물이 번지는 보석은 더욱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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