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이야파티

소문난 도둑의 주장은 믿지 않습니다

2023_이야챌린지_071

by 이야
임시 표지

야심한 시각.


"역시 아르티노 후작. 허영이 가득한 덕분에 내가 이런 걸 다 손에 넣어보네."


펠레스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요즘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작은 크기의 그림들.

이전의 작품들은 훔치기에 좋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이번에 대서특필된 아르스의 작품을 등에 건 그녀.


"뭐, 애초에 그녀로부터 돈 바람이지만 아예 도둑한테 가져가라고 내놓은 거 아니야?"


예술로 이름을 알린 아르스.

그러나 그녀의 천재성은 예술에만 국한되어 있나 보다.

챙긴 판넬의 무게는 가벼웠다.

그녀가 빈 전시관을 바라봤다.

바닥에 자신의 마크까지 예쁘게 새긴 그녀.


"이제 가볼까?"


그녀의 손이 밧줄을 잡았다.

이제 떠나기만 하면 되는 그때.


"거기 신입, 당장 경비대에 알려!"


휘이잉.

갤러리의 천장이 뚫려 있었다.

전시대를 잡은 손이 떨렸다.

천만 골드를 호가하는 귀중품이었다.

반면 명령을 들은 신참은 운이 좋았다.


"다들 주목! 아르스의 예술품이 털렸다고 한다. 지금부터 그 도둑을 쫓는다."

"저쪽에 수상한 움직임이 있습니다!"


경비대가 빠르게 이동했다.

그 시각.

펠레스는 미리 파악해둔 길을 가로질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소음.


'뭐. 예상은 했잖아.'


신문에 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보안이 강화됐을 거란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후후. 그래봤자 내 발보다 빠를 순 없을걸?"


그녀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것을 증명하듯 거리가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이제 저기만 넘으면- 어?"


바스락.

어둠이 깔린 숲, 빽빽한 나무 사이에서 무언가 붉게 빛났다.

암흑에 익숙한 눈은 그것의 형체를 담았다.


"쿠어엉-"


때아닌 멧돼지의 등장.

미친 존재감을 뽐내며 달려온다.

고민도 사치였다.

기존의 도주로를 포기한 그녀가 바닥을 굴렀다.


'씨잉. 갑자기 말이 돼?'


최대한 몸을 숨긴 그녀.

기척을 죽였다.

킁킁.

그러나 곧바로 간파당했다.


"꾸이익!"

"악!"


필사적으로 달렸다.

잡히면 끝이다.

이대로 죽을 순 없었다.


"지,진정하자."


힐긋.

휘이잉.

까마득한 높이였다.


'하필 절벽으로 달릴 게 뭐람.'


완벽한 진퇴양난.

쿵쿵.

앞발이 위협적으로 흙을 긁었다.

선택해야 했다.


'침착해. 옆으로 피하면 돼.'


그녀는 빠르게 계획을 세웠다.

일촉즉발의 순간.

흉폭한 울음을 터뜨린 돼지가 힘차게 달려들었다.

그 순간을 노린 펠레스가 서둘러 몸을 틀었다.

공중을 나는 돼지.


"꾸이이익!"


비명 소리가 듣기 좋았다.


"살았다."


안도한 그녀의 다리가 크게 휘청였다.

드드득.


"아아아악!"


땅이 무너졌다.

지반이 약했던 것이다.


'주여. 부디 저를 돌보시기를.'


약간의 충격만 흡수해 주겠지만, 유일한 희망은 등에 있는 작은 미술품이었다.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쿠우웅.

끝이었다.

한편, 비명을 들은 경비대는 밤새도록 수색에 나섰다.


"저기 보입니다!"

"동이 텄으니 바로 내려간다!"


며칠 뒤, 경비대 인근 여관.

잠든 여인의 손이 반응했다.

펠레스였다.


"허억- 머리 아파!!"


경비대원은 곧장 대장을 불렀다.


"펠레스. 악명 높은 널, 드디어 잡는군!"


라디움이 그녀를 쏘아봤다.

반면 펠레스는 통증에 눈살을 찌푸릴 뿐이었다.

그녀의 무심한 반응에 분노한 라디움이 팔을 뻗었다.


"아저씨, 뭐 하는 거예요!"


남자에게 양어깨를 잡힌 펠레스가 기겁했다.


"펠레스. 네가 지금 이렇게 굴 때가 아닐 텐데. 귀족들이 너를 얼마나 원하는지 치료하는 내내 찾아온 이들만 무려-"

"펠레스가 누군데요? 설마 저 말하는 거예요? 아. 청혼이 많이 들어왔구나. 그쵸?"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아오. 진짜. 시끄러워요! 날 왜 펠레스라고 부르는지는 모르지만 유모나 엄마 좀 불러줘요."


펠레스의 태도는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눈썹을 까딱인 그가 장단을 맞췄다.


"그럼 네 이름은 대체 뭐지?"

"뭐야~ 멋대로 펠레스라 부르더니. 그리고 백작가에서 일하면서 내 이름도 몰라요? 나는 오로날드 백작의 딸, 다이엔 오로날드에요."

"하. 역시 머리는 좋아. 그걸 이용해먹겠다 이건가? 과거 오로날드의 영애가 납치됐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 펠레스, 네가 아무리 꾀를 써도 너에 대한 형벌은 바뀌지 않아."


라디움이 차갑게 대꾸했다.

한편, 펠레스는 코웃음을 쳤다.


"아저씨. 아빠한테 죽고 싶어요? 제가 왜 납치를 당해요. 우리 가문은 제국에서도 내로라하는 귀족가인데, 미쳤어요? 아~ 그래서 날 펠레스라고 부르는 거구나? 당신들이 날 납치해놓고 혼란스럽게 하려는 거면 실패했네요."

"말이 안 통하는군. 그래봤자 소용-"

"꺄아악!"

"왜 그러지?"

"뭐예요!! 이게 뭐냐구요!!"


순식간에 배지를 낚아챈 펠레스.

역시 도둑다웠다.


"하, 역시 비싼 건 알아보는 군. 내놔라."

"이깟 게 얼마나 한다고! 그것보다 중요한 건 이게 뭐냐고요!"

"네 얼굴은 왜?"


라디움은 황당한 눈으로 그녀의 손가락을 쳐다봤다.


"엄마처럼 늙었잖아요!!! 무슨 약을 먹인 거예요!!!"

"늙었-?"


제 귀를 의심한 그가 대원들을 돌아봤다.

하나 이해하지 못하는 건 피차일반이었다.


"사람은 원래 시간이 지나면. 아니. 연기는 그만해라. 펠레스. 이렇게 시간을 끌고 도망갈 심산인가 본데-"

"웃기지 마요! 나 이제 고작 9살이라고! 나랑 엄마랑 몸이라도 바뀌었대요?"

"아홉 살? 네가 아무리 속이려고 해도 그건 제국민이 다 아는 사실이야!"

"대체 무슨 주술을 부린 거예요. 내 몸은 어딨고, 아빠는 뭐 하는 거냐구요."


이불에 얼굴을 파묻은 펠레스, 아니 다이엔이 서럽게 울었다.

9살이었던 자신이 이렇게 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납치범들. 두고 봐! 아빠가 날 찾아내면 무조건 죽이라고 할 거야!"

"우린 후작령의 경비대원들-"


울컥한 경비대원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라디움이 그를 제지했다.


"좋다. 네가 도망가지 않겠다 약조하면 오로날드 백작령까지 데려다주지."

"경비대장님, 어째서!"


그가 조용히 손가락을 올렸다.


"웃기지 마. 니들이 납치해놓고 이제 와서 아닌 척 군다고? 게다가 이렇게 몸까지 건드렸으면서!"

"네가 믿든 말든 상관없어. 네 연기를 까발려주지."


라디움이 그녀의 팔뚝을 잡았다.


"놓으라고! 날 좀 내버려 두라고!"


다이엔은 시도때도 없이 난동을 부렸다.

어차피 죄인.

가차없이 구속구를 채운 라디움이 그녀를 마차로 밀어넣었다.

철푸덕.


"정말 집으로 가면 네 목숨은 내놓아야 할 거야!"


그는 앙칼진 외침을 무시하고는 출발 신호를 보냈다.


"두고 봐. 아주 사지를 철저하게 찢어놓을 테니까."

"백작영애라면서 입이 험하군."

"누구 때문인데!"


그녀는 쉴 새 없이 그를 험담했다.

입에도 구속구를 채울까 고민한 라디움은 그냥 쉬운 길을 택했다.

픽.

목덜미를 내어준 대가는 기절이었다.


"이제 좀 조용하군."


오랜만에 지나가는 길.

농부의 아들이었던 라디움의 눈이 일렁였다.

오로날드 백작령은 그의 고향이기도 했다.


"감히 아가씨를 사칭하다니."


언제나 한구석에 품고 살았다.

그렇기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일.

도저히 그녀를 용서할 수 없었다.


"일어나지 그래?"

"진짜 집이다."


다이엔은 말릴 새도 없이 뛰쳐나갔다.

저택을 향한 달리기.

묶인 손이 불편했지만, 그녀는 빠르게 백작저를 찾았다.


"엄마!!! 아빠!!! 유모!!!"


시끄러운 소리에 영지민들이 하나둘 나와보기 시작했다.

저택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집사가 문을 열었다.


"할아버지는 누구?"


행색이 좋지 못한 여인이었다.

페리온은 그녀가 다가오지 못하게 경계했다.


"오랜만에 뵀습니다."

"라디움, 자네. 돌아왔는가?"

"할아버지. 페리온 아저씨는 어딨어요?"

"이보게. 페리온은 나야! 라디움, 이 죄인은 누군가!"


히끅.

호통에 놀란 다이엔이 비틀거렸다.

반면 라디움의 안색은 기묘하게 변했다.


'정보력이 대단한 거다. 아가씨일 리 없다.'


단정지은 그의 속내를 모르는 그녀는 겨우 균형을 잡았다.


"저예요. 다이엔 오로날드! 왜 아무도 안 믿는 거야!"

"허! 감히 아가씨의 이름을 함부로 올려! 네가 그러고도 무사할 성싶으냐!"

"엄마!!! 엄마, 나 왔어요!!! 제발-"


애절한 목소리가 백작저를 울렸다.

그녀의 진심이 닿은 걸까?

또각또각.

오로날드의 안주인이 밖으로 나왔다.


"마님, 그저 미천한 이의 소행입니다."

"페리온, 비켜요."

"하지만 마님-"

"내 딸아이 목소리랑 비슷하다고요! 당장 비키세요."


언제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딸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기꺼이 악마와도 거래할 수 있었던 백작부인.


"엄마. 엄마. 아아악!"

"다이엔 오로날드?"

"거짓말!!! 엄마는 더 늙었잖아!!! 왜 다 이런 건데?"


주저앉은 그녀가 통곡했다.


'이게 연기라면 정말 대단하군.'


라디움은 끄떡없었다.

한편, 집사는 다이엔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그의 눈이 커졌다.

어째서 몰랐을까!

젊었을 적 백작부인과 꽤나 닮은 그녀의 얼굴.

신혼 시절, 풍만해지기 전 그때와 같은 미모였다.


"다이엔 오로날드. 널 얼마나 애타게 찾았는지 몰라."

"엄마는, 엄마는. 날 알아봐요?"

"당연하단다. 이제서야 널 찾, 페리온! 내 딸한테 뭘 채운 거야!"


어느새 구속구는 손목이 너덜 해질 때까지 스며든 채였다.


"라디움, 저걸 풀게나!"

"예? 알겠습니다."


달칵.

족쇄가 벗겨졌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피라는 흙 파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