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그럼 승호랑 우영이랑 하고. 떨어지는 사람이 부반장을 하면 되겠네~ 반장선거는 이틀 후야~"
이윽고 아침 조회를 마친 그녀는 구두 소리와 함께 앞문을 나갔다.
이틀 뒤, 선거일.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무효표 2을 제외하고는 모두 기호 1번을 가리켰다.
"음. 이 정도로 차이가 날진 몰랐지만. 반장은 우영이고, 부반장은 승호가 맡아주는 걸로 하자."
"잘 부탁해. 승호야."
"으응."
선의의 경쟁을 마친 둘.
그때까지만 해도 그저 짓궂은 장난 수준에 그쳤다.
그것이 끈질긴 괴롭힘으로 변하기까지.
8반의 부반장인 승호가 의지할 구석은 반장 우영뿐이었다.
점심시간, 급식실.
우영은 승호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줬다.
"허? 우리 반 애들이 정말 그랬다고? 이거 안 되겠네. 내가 따로 얘기해 볼게."
우영과 대화를 마친 승호는 한결 편한 마음으로 수업에 임했고.
그가 장담한 대로 잘 전달됐는지 반 아이들은 승호를 더 건드리지 않았다.
적어도 며칠간은.
주말 아침, 승호의 집.
승호는 주방에서 나는 소리에 의아함을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엄마? 오늘은 가게 안 해?"
"당분간은 쉴 거야."
"역시 그동안 힘들었지?"
엄마의 결정이 반가운 한편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승호는 방으로 돌아와 바로 핸드폰을 켰다.
'괜히 돈 걱정하지 않게 내가 일해봐야지.'
아르바이트를 하려면 부모님의 동의서가 필요했지만, 그 부분은 혼자서 해결할 수 있었다.
다행히 그날 바로 면접과 교육을 받은 승호는 다음 주부터 햄버거집에서 일하게 됐다.
다음날, 학교.
"알바? 주말에 한다고 해도 힘들지 않겠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닌걸, 뭐."
우영에게만 이 사실을 알린 그는 우영을 정말로 친구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가 반 친구들을 데리고 나타날 때까지는.
'어, 그럴 수 있지. 못 오란 법이 어딨겠어.'
승호는 침착하게 주문을 받았다.
위태로웠지만, 그들은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별점 테러요?"
"하, 위생 관리를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다음 출근 날.
분노한 사장이 폰을 들이밀었다.
"죄,송합니다."
"신고한 녀석들이 너랑 같은 반이라고 하던데, 이거 일부러 노리고 그런 거냐?"
"절대 아닙니다!"
강하게 부인했지만, 사장의 눈초리는 싸늘했다.
"얼마 전에 요 근방 식당도 미성년한테 술 판매해서 영업정지 당했다던데, 하여간. 요즘 애들이 더 무서워."
"저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요즘 애들 무섭다고! 넌 해고야!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휙.
들고 있는 유니폼마저 빼앗긴 그는 그대로 쫓겨났다.
집으로 돌아간 승호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혹시나 하는 의심은.
"엄마, 얘네들이었어?"
학급 단체 사진을 내민 승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들 반 학생이었구나. 엄마가 진작 학교 한 번 가볼 걸 그랬다."
"작정하고 속였는데, 어떻게 알겠어!"
속상한 눈으로 아들을 바라본 영숙은 따뜻한 손길로 등을 토닥였다.
"2개월이나 영업 못하는 거잖아."
"괜찮아. 엄마가 따로 일 알아봤어."
"미안해, 엄마."
"우리 아들은 잘못한 거 하나 없어요."
엄마의 그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서늘한 시선이 축구장에 걸렸다.
"도대체 두 번째 방법은 언제 알려주냐!"
"이 짓을 헥, 이겨야만 관둘 수 있으면 진 팀은 계속 추란 거냐고!"
점수 차이는 크지 않았지만.
이번에도 지고 있는 석호의 팀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제 알려줄게. 두 번째는, 속죄야.]
"뭐? 속죄?"
승호의 대답에 잠시 춤을 멈춘 재영의 다리는 순영처럼 붉게 물들었다.
"끄아악! 춘다고! 추고 있다고!"
양말 안쪽으로 돋아난 날카로운 가시가 종아리를 사정없이 찔렀다.
재영이 급하게 상체를 움직였다.
"무릎이라도 꿇을까! 엉?"
"거, 별것도 아닌 걸로 무슨!"
"어릴 때 누구나 할 법한 실수 아니냐? 너도 우리 입장이었으면!"
기태는 팔을 들어 같은 팀인 정현의 말을 막았다.
"뭐야, 송기태! 어디 가?"
"기태, 너 지금 그렇게 걸으면."
"어차피 가봤자 홀로그램인데-"
축구장에서 이탈한 기태는 피가 흐르는 동안에도 멈추지 않고 승호에게로 걸어왔다.
"미안하단 말로 부족할 거 안다. 그때 난 그냥 허세에 쩔어있었고, 어떻게든 돈이 필요했다. 할머니 수술비를 마련했어야 해서 장우영의 말에 거스를 수 없었어. 아니, 이 모든 게 한낱 변명이란 거 안다. 내가 노모랑 어렵게 사는 것처럼 너도 그랬을 텐데, 나 살겠다고 무슨 짓을 한 건지. 결국 장우영 대신 감옥에 들어가고 나서야 알았다. 너와 네 어머니께 평생 못 지울 상처를 남겨서, 그 기억 속에 살아가게 해서 정말 미안하다. 이대로 내 다리를 잘라가도 좋다."
양말을 뚫고 튀어나오는 붉은 선혈이 잔디를 적셨다.
그 모습을 경악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몇몇.
"그래! 송기태 말처럼 우린 그냥 장우영한테 이용당한 거야! 너도 알잖아? 네가 끝까지 믿었던 우영이가 널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었는지! 왜 우리한테만 이래?"
"맞아. 장우영이 다 짠 판이었다고! 우린 하란 대로 한 게 전부였어!"
반성은커녕 오히려 억울함을 토로하며 악을 쓰는 이들도 있었다.
그 사이로 진혁도 경기장을 나섰다.
"미안하다. 나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 아니, 나도 그때는 별생각이 없었어. 너무 이기적이었다."
진혁마저 그러자 서빈을 비롯한 몇 명의 눈동자도 거칠게 흔들렸다.
"우재호! 네 먼 친척이잖아. 어떻게 설득 못하겠냐? 그냥 다 없던 일로 하고."
"하, 솔직히 난 그때 얼굴 알아볼까 봐 그 치킨집에는 가지도 않았어."
"그렇게 빠져나가겠다고? 네가 알려준 거였잖아!"
어느새 자기들끼리 다시 싸우는 이들.
서빈은 세 번째로 그 진흙탕에서 벗어났다.
"이게 속죄가 될진 모르겠다. 그냥 거기에 일조했던 게 정말 후회되고, 감히 용서도 구할 수 없을 것 같다."
그 뒤로 각오하고 뒤따라온 이들도 사과의 말을 전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춤을 멈췄지만, 피는 계속 흐르고 있었다.
"속죄하면 멈출 수 있다더니, 결국 저렇게 되는 거잖아! 나는 안 빌 거야!"
여전히 경기 중인 순영은 재영처럼 붉은 채로 뛰어다니며 춤추고 있었다.
그리고 저 고통을 감내하느니 경기에서 이길 요량으로 남은 이들도 축구공에 집중했다.
"젠장! 기태도 빠졌는데, 우리가 진 거야?"
"저긴 골키퍼도 없었어!"
석호 팀의 얼굴은 좌절감에 휩싸였다.
"우린 이제 살았어!"
끝내 승리한 기대 팀은 환호했다.
조용히 관람하던 승호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약속한 대로 이긴 너희들은 춤추지 않아도 돼. 그리고 진심이든 아니든 뉘우친 너희는 아예 이곳을 벗어날 수 있고.]
"잠만. 우린 계속 여기 두겠단 거야?"
자유로워진 한기가 그쪽으로 달리며 물었다.
[고통에 대한 보상을 줘야 하지 않겠어?]
"야, 나랑 재영이도 이렇게 됐거든?"
[너희는 속죄하지 않았잖아. 쉬운 길을 냅두고 선택한 대가는 너희가 치러야지.]
"왜 우리한테만 이래? 장우영은 왜 빼냐고!"
[장우영. 너희들이 열심히 찬 공이 누구라고 생각해?]
냉담한 답을 꺼낸 승호의 전신이 곧 사라졌다.
이윽고 반성한 9명도 어딘가로 떠났다.
오직 남은 이들만 그 물음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그것도 잠시.
"윽!! 경기 한 판 더 하면 벗어날 수 있는 거냐고! 이기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하체를 멈추면 무자비하게 들어오는 가시.
비명을 지른 순영이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반면 승리팀은 복잡한 눈으로 속죄한 이들이 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잠시 후.
쩌어억.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나갈 수 있는 거 아니야?"
"야, 우리는!"
몸이 가벼운 이들이 먼저 출발한 사이.
춤추는 패배팀도 천천히 따라잡았다.
"저,게 뭐야?"
"끄아악!"
벽이 깨지고 그 파편이 일찍 도착한 이들의 몸에 꽂혔다.
"꼴좋다!"
그 꼴을 보자 순영이 비웃었다.
하지만 순영의 모습도 여간 웃긴 것이 아니었다.
짝짝짝.
그들이 달려온 곳에서 박수소리가 들렸다.
"모두 보기 좋군요."
"당신은 또 뭐야!"
"이 지옥의 왕. 보통 염라라고 부르던가요? 난다을입니다."
"염라대왕?"
허망한 9쌍의 시선.
"지옥. 우린 이미 죽은 건가?"
"그런 셈이죠. 당신들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용서를 구하지 않는군요."
"그래서 뭐! 이 정도면 충분하잖아!"
"글쎄요? 분명히 듣지 않았나요?"
이번에도 따지려던 순영은 그 손에 들린 축구공을 바라봤다.
"우영이가 공이 됐다는 거, 정말이야?"
"남을 괴롭혔으면 이 정도 모욕은 감수해야죠."
가장 밑바닥에서 치이는 벌 앞에 미소를 지은 다을이 손가락을 튕겼다.
"끄아아아!"
남은 9명의 몸이 공으로 끌려왔다.
비명 소리를 즐긴 그는 그것을 헬 그라운드에 던져뒀다.
축구하러 도착한 천사들은 평소처럼 경기를 속행했다.
흔들리고 차이는 그 속에서 영원한 어지러움을 동반하는 끝을 선고받은 9명은 마지막 기회를 붙잡지 못한 자신을 원망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