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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개하는 섭취의 정석

2023_이야챌린지_085

by 이야
임시 표지

장한고등학교.

2학년 4반.

수능이 끝난 다음 주, 교실에는 자습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정석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창 문제집을 푸는 그의 뒤로 누군가 지나갔다.

아마도 사물함을 이용하기 위한 인기척.

맨 마지막 자리였기 때문에 익숙했다.

그러나 곧 쌀쌀한 바람에 종이가 넘어왔다.

탁탁.

이전 페이지가 여러 번 손등에 닿아 흔들렸다.

펄럭.

손바닥으로 연약한 책을 누른 정석이 막 고개를 들었을 때.

반장이 그를 불렀다.


"마정석. 너만 겨울방학 신청서 안 냈어."

"아. 낼게."


정석이 가방문을 열었다.

휙.

그가 유인물을 내밀자 반장의 손이 바로 낚아챘다.


"다음부턴 일찍 내."

"알겠어."

"강이유, 추운데 문은 왜 열고 있어?"


그녀로 인해 벌써 뒷자리는 찬 기운이 맴돌았다.

정석도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셔츠 속으로 금세 서늘한 공기가 스며들었으니.

반면 이유는 굴하지 않고 창밖을 내다봤다.

검정의 긴 머리카락이 강하게 날리는데도 닫지 않는 그녀.

결국 예은이 움직였다.

반장이 한 발째 내딛자 비로소 돌아본 이유가 입을 열었다.


"오늘, 세상이 변할 거야."


멈칫.

예은의 발이 정석의 가방 옆에서 멈췄다.


"무슨 소리야?"

"곧 수험생이 되니까 정신을 좀 놓았나 보네."


바짝 다가온 고3.

정석이 머리를 흔들며 작게 중얼거렸다.

힐긋.

잠시 정수리에 닿은 이유의 시선이 다시 창 너머로 향했다.


"저걸 보고도 태평할 수 있겠어?"


이유가 밖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예은의 고개가 돌아갔다.

한편 이유를 보고 있지 않은 정석은 닫아놓은 책을 펼쳤지만.

팍.

반장에게 자신의 가방이 치이자 그녀를 향해 몸을 틀었다.

놀란 눈동자로 어딘가를 응시하는 반장.

그 표정에 정석의 상체는 반대쪽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저게 뭐야?"


분명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던 하늘이 순식간에 안개로 뒤덮였다.

그리고 그 사이로 분명한 구가 보였다.

아주 새까만 그것은 간혹 스파크를 일으켰다.


"게이트가 열릴 거야."

"게,이트? 판타지에서나 나오는 거, 말하는 거야?"

"응. 그리고 사람들은 헌터로 각성하겠지."


그제야 정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의 대화를 머리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몸을 일으킨 정석은 순간 현기증을 느꼈고.

곧 전신이 반응했다.

우웅.

푸른 불빛이 가슴 앞으로 커지고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고귀한 어둠의 선택을 받아 특이 각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머리에서 울리는 무형의 소리.

휘청인 정석의 손이 책상을 짚었다.


"축하해, 사돈."

"뭐?"


어느새 그의 뒤에 가깝게 붙은 이유가 귓속말을 전했다.

정석이 몸을 돌리자 물러난 이유는 자연스레 힘을 개방했다.


"강이유, 너 머리에!"


즉각 반응한 이는 예은이었다.

친구의 머리 위로 뿔이 솟구쳤다.


"너, 악마라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구나?"


장난으로 하는 얘기인 줄 알았다.

원래도 자신은 신이라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잘 늘여놓는 친구였고.

항상 말로만 주장하고 있었으니, 믿기 쉽지 않은 내용.

예은은 얼떨떨한 얼굴로 친구를 살폈다.


"후후. 나는 주로 진실을 말한다고."

"공예은, 나와봐."


어느새 이유의 반을 가리고 있는 예은을 가볍게 밀친 정석이 거리를 좁혔다.


"사돈이라니 무슨,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아?"

"웬 사돈?"

"응. 맞아.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내 아들이 너의 사위가 될 거거든."


전보다 머릿속이 더 복잡해지는 말에 정석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반면 예은은 아들이란 말에 꽂혀 눈을 빛냈다.


"미래를 보는 거야?"

"단편적인 것만. 그래서 마정석. 너는 이제부터 내 며느리의 혼수를 준비해야 해."


어질어질한 발언이었다.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애초에 인간도 아닌 네 말을 내가 왜 들어야-"


외형이 달라졌고, 인외 종족인 것도 느꼈지만 아직 반 친구를 대하듯 말하던 정석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마주친 시선은 엄청난 압박감을 주었다.


"혼수, 가져올 거지?"

"그, 어떤 걸 마련해야 하는지."


잔뜩 위축된 정석이 간신히 눈길을 돌렸다.


"게이트."

"그걸 어떻게 바쳐야 할까,요?"

"간단해. 게이트 안에 있는 몬스터들을 모두 소탕하면 돼. 자, 이걸 받아."


이유가 손바닥을 보였지만, 그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곧 피어오른 검은 연기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열쇠.


"오로지 너만이 가능한 게이트 소유권이랄까?"

"영,광입니다."


혹여 책이라도 잡힐까 빠르게 열쇠를 잡은 정석이 고개를 숙였다.

같은 반 친구들의 연출에 예은이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그러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그녀가 교실을 둘러봤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공부하는 4반 학생들.


"판타지에서는 보통 이런 게 멸망의 징조, 아닌가?"

"쟤네들도 5분 후에 영향을 받을 거야."

"응?"

"우리 셋만 좀 더 이르게 맞이한 거니까 말이야. 아무튼 사돈."


예은의 중얼거림에 친절히 설명해 준 이유가 재차 정석을 바라봤다.

꿀꺽.

침을 삼킨 그가 흥건한 손을 교복 바지에 닦아냈다.


"꽃처럼 이쁜 딸이 만개하려면-"


싱긋.

왠지 전보다 더욱 긴장되는 웃음에 정석의 허리가 책상에 닿았다.


"만 개 정도는 가져와야 할 것 같은데. 할 수 있지?"


답은 정해져있었다.

무언가 절대적인 존재인 같은 반 친구.

가끔 소설을 쓴다는 것 정도만 알았는데.


"부담 주지 않으려 했지만, 네가 나서지 않으면 세계는 정말 멸망할 거야. 우리 아드님 성격이 꽤나 고약하거든."


아직 만나지 못한 사위조차 무서울 지경이었던 그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파지직.

이내 그들을 둘러싼 결계가 깨졌다.


"야, 다들 하늘 봐봐!"

"이거 뭐야? 몸에서 빛이!"


이유가 말한 5분이 지난 시각.

예은은 반 아이들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때마침 국가 재난 문자가 동시에 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굳이 나만-"


아무리 사돈이라 해도.

소란스러운 반 상황을 지켜보다 뒤늦게 의문이 든 그가 이유를 돌아봤다.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녀.


"나는 입장 금지고. 이 명분은 네가 원한 거야. 부디 네 아이를 살려달라고 날 찾아온 건 너니까."


이유가 흘러내리는 머리를 뒤로 넘겼다.


"물론 내 탓도 있어. 내가 세상에 구멍을 낸 게 꽤나 크게 작용한 것도 맞으니, 네게 좋은 능력을 준 거야."


구멍?

더욱 의문만 커진 정석이었지만.

이유는 예은을 데리고 교실을 빠져나갔다.

당장 게이트를 들어가라고 한 건 아니니, 정석도 대피하는 아이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곧 그의 발은 먼지에 의해 주춤했다.


[당신이군요! 이유님의 선택을 받은 분.]

"뭐,뭐야?"


허우적거리는 팔에 올라탄 먼지는 요정이었다.

이유를 닮은 아주 작은 그것은 정석의 팔 위에서 균형을 잡았다.


[저는 이유님의 분신, '유'라고 해요! 당신을 보좌하려고 다른 세계를 건너왔으니 믿고 맡겨주세요!]

"뭘 믿으란 거-?"


딱.

그 작은 날개로 빠르게 날아온 유는 정석의 이마를 후려쳤다.

워낙 조그마한 손짓이라 아프지는 않았지만.


"커억-"


다른 세계 속 자신의 기억을 전해 받은 정석은 가슴을 두드렸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 찾아간 동창.

장한고 졸업생들 사이에서는 나름 영험하다고 알려진 이유를 만나야 했던 건.

7년 뒤.

세상에 태어날 자신의 딸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인나야.'


어느새 동화된 감정은 그의 눈빛을 달라지게 만들었다.


[당신은 분명 마인나 양을 살린다면 어떤 대가도 치를 수 있다 했어요. 맞나요?]

"맞습니다."

[생존은 확실히 보장하죠. 두 세계 모두. 하지만 그렇게 살린 목숨은 도련님이 취할 거랍니다. 아, 혼인을 말하는 거니 나름 합의된 사항이 맞죠?]

"…예, 맞습니다."


귀한 딸을 벌써부터 다른 놈한테 맡겨야 한다는 게 다소 마음에 걸렸지만.

28살의 정석은 10년 전 자신에게 깃들었다.


[기한은 10년이니까요. 그때까지 만 개의 게이트를 얻어보자고요!]

"그때가 되면 이 사람, 아니 다른 세계의 저는 다시 돌아가는 겁니까?"

[네, 각자의 세계로요. 다만 게이트가 나왔던 이 세계의 역사는 유지될 거예요. 그리고 여기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면 당신의 딸은 물론이고-]

"세계가 멸망하겠죠."


유의 말을 이어받은 정석은 착잡한 얼굴로 상태창을 중얼거렸다.

게임이나 판타지 소설에서나 겪을 일.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보좌관 유가 당신을 보필합니다.]


유의 날개 끝으로 푸른 창이 투영됐다.

아무래도 이 보좌관이 흔히 말하는 시스템인 것으로 보였다.


[능력을 확인하세요.]


이유가 말했던 좋은 능력.

그것을 확인한 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섭취?"


설명을 읽은 그의 눈가가 떨렸다.


"설마 나를 먹으라고 하는 건 아닐 테고."


마정석.

자신과 이름이 같지만.

보통 이런 헌터물에 자주 나오는 광물.

그것을 먹어 힘으로 바꾸는 것이 자신의 능력이었다.


"할머니가 항상 돌도 씹어 먹을 나이라고 했는데, 정말 그러게 생겼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도대체 그걸 어디서 구하냐는 것.

보통 몬스터를 잡으면 주는 걸로 아는데.

아무리 낮은 등급의 게이트라 할지라도 정석의 스탯은 처참했다.

고민하던 그는 아까부터 흐르는 교내 방송을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이제 3살 됐지만,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딸을 위해서라면.

이 10년을 어떻게든 열심히 살 각오만 다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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