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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월한 후계자를 위한 선처
2023_이야챌린지_088
by
이야
Dec 6. 2023
임시 표지
한강이 훤히 보이는 18층의 사무실.
대표이사 선우진.
그의 눈썹이 일순 꿈틀거렸다.
좀비 사태가 끝나고, 세상에 자신들의 존재가 드러난지도 벌써 3개월.
이 정도는 예상한 바였다.
하지만 그 시기가 한참 일렀다.
"평균보다 훨씬 빠르군."
1년.
트럼프의 계획에 의하면 항상 그에 웃돈 시기로 종식되었다.
그런데 지금 이곳은 무려 4개월이나 앞선 것.
아무리 트럼프라 해도 모든 변수를 다 통제할 수는 없는 법.
그러니 오차 범위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는 편차가 너무 큰 사항.
물론 그는 발 빠르게 선도했지만 지금의 상황이 껄끄럽기는 매한가지였다.
똑똑.
비서의 방문에 불편한 속내를 덮은 선우진이 의자를 돌렸다.
"기존의 연예인에서는 아이돌 스타일을 비롯해 총 15명 정도가 화제의 인물에 올랐습니다. 그중, 스타 트럼프는 11인으로…"
짧게 목례를 한 비서는 바로 본론을 꺼냈지만.
선우진의 손짓에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새로 투입된 이들부터 보고하지."
"예. 지금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인물은 우미나 양입니다."
"전략이 통했나 보군."
우미나.
그 얼굴을 떠올린 선우진이 가볍게 웃었다.
스타 트럼프의 외모는 말할 것도 없다.
하나 그들이라고 모두 인간에게 사랑받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가능성은 높지만, 어떤 세계에서는 먹히지 않는 매력도 분명 존재했다.
비서의 보고가 끝나자 잠시 생각에 잠긴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흠. 만세이를 이대로 내버려 두기엔 너무 아까운데 말이지."
"따로 알아본 결과, 당장 이곳을 떠나지는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동생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데, 무턱대고 이동하진 않겠지. 혹 간다 해도 용병으로 활동할 수 있는 만세오만 보낼 수밖에 없을 텐데, 조만간 만세이를 찾아가야겠군."
"예. 일정 확인해 보겠습니다."
탁.
다시 사무실에 홀로 남은 선우진의 눈길은 다른 보고서로 향했다.
소속 연예인의 자료가 아닌 왜소한 체격의 남자.
사진을 뗀 선우진의 입술이 비틀렸다.
"원리우라고 했던가. 나쁘지 않겠군."
자연스레 시계를 푼 그는 곧 왼팔의 셔츠를 올렸다.
하얀 팔목에는 트럼프답게 선명한 숫자가 적혀있었다.
113.
자신의 남은 수명을 무감한 눈으로 바라본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딱히 후계자를 둘 생각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내 편인 듯하군."
이전에도 트럼프가 장악한 세계에 있었던 그는 새삼스레 흐르는 강물을 내다보았다.
어렸던 자신이 죽음을 앞두고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을 수도 있고, 생각과는 다를 수도 있었다.
그저 주어진 일수에 부정하지 않고 살아가는 수밖에.
한쪽에 걸어둔 정장을 걸친 그가 밖으로 나왔다.
"수행원은 따로 필요 없어."
"하지만-"
"스페이드 트럼프를 데려가 봤자 실이 될 뿐이다."
"예. 시정하겠습니다."
결국 효정은 뜻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운명에 무력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한편 올성역 앞, 자리 잡은 리우는 한창 신문지로 멋을 부리고 있었다.
"학생, 여기서 노숙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
"참나. 버려두고 떠날 때는 언제고."
"그건 일대가 좀비로 가득했으니까- 이젠 다 사라진지도 벌써 3개월이 넘었는데 집에 들어가야지, 학생."
무려 10개월 만에 자신의 직장으로 복귀한 현성은 리우를 끌어내려 애썼다.
하지만 전혀 미동도 않는 그.
오늘도 지는 것은 현성이 될 뻔했지만.
쑤욱.
"응? 이 학생, 보호자 되십니까?"
"그 비슷한 거."
"아저씨는 뭐야?"
잡힌 팔을 빼내려 몸을 비틀었으나, 오히려 더욱 조일뿐이었다.
한참 씩씩대던 리우는 제풀에 지쳐 흐물해졌고.
그때를 놓치지 않은 선우진은 그를 데리고 떠났다.
드디어 개운한 마음이 든 현성은 바닥에 놓인 신문지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대체 뭔데 사람을 납치하냐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리우가 소리쳤다.
차가운 시선에 잠시 위축됐지만, 리우는 눈에 힘을 주었다.
"잠깐! 때리지는 마."
곧 손을 드는 남자에게 급히 부탁한 리우.
하지만 그를 신경 쓰지 않고, 선우진은 볼에 있던 가죽을 떼어냈다.
"다이아 트럼프? 그런데 왜 크림을 안 바르고 구식으로-"
쾅.
큰 소리에 절로 몸이 떨렸다.
"마, 말로 해."
"15살, 맞나?"
주눅 든 리우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널 내 후계자로 임명하지."
"웃기지 마! 내가 할 것 같아? 나는 다이아로 살고 싶지 않다고!"
"그럼 왜 드러내고 지내지?"
"그건 돈이 없으니까… 아무튼 날 잡아갈 거면 그렇게 해! 다시는 다이아 트럼프로 살지 않을 거라고!"
낙인된 볼이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는 날.
뜨거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염없이 울리는 배를 무시한 리우가 몸을 돌렸다.
하지만 곁눈질로 쟁반을 살피는 얼굴은 투명했다.
"먹어라."
"됐어. 그냥 굶어 죽고 말지. 빚이라도 달 거 아니야. 내가 다이아 생각을 모르겠어?"
"그렇지. 하지만 이번에는 순수한 호의다."
"…딴말하기 없기다?"
고민 끝에 햄버거를 잡은 손이 떨렸다.
역시 배고픔 앞에는 장사 없는 현실.
크게 한 입 먹은 리우의 눈이 일순 욕망으로 차올랐다.
'온전히 놓지는 않았군.'
그의 상태를 냉철하게 파악한 선우진이 고개를 까닥였다.
남자의 것도 넘겨받은 리우는 순식간에 음식을 해치웠다.
"이제 용건 없지? 말했다시피 나는 다이아 트럼프로 살지 않을 거야."
콜라를 품에 안은 리우가 일어섰다.
"다른 사람 알아보라고~"
덧붙인 그가 잽싸게 자리를 떠났다.
구태여 붙잡지 않은 선우진의 눈으로 포스터가 들어왔다.
이윽고 연락을 돌린 그도 가게를 나왔다.
몇 시간 후.
역 앞으로 돌아온 리우는 다시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다.
"여기 있으면 춥지 않아?"
"우,미나?"
"알아보는구나? 반가워."
리우는 그녀의 손을 잡지 않았다.
경계 어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본 그가 일침했다.
"아까 그 아저씨가 보냈나 본데, 이런다고 내가 다이아 트럼프로 살 일은 없어."
"돈이 아무리 많아도 사랑하는 사람은 구할 수 없으니까?"
"네가 그걸 어떻게- 하, 역시 추잡하긴. 남의 뒷조사까지 다하고."
그냥 무시하기로 결정한 리우가 바닥에 앉았다.
그를 지켜보던 미나는 가방 속에서 악보를 꺼냈다.
"사장님은 차갑긴 하지만 좋은 분이야. 내가 부탁했어. 널 찾아달라고."
신문지로 배를 접는 리우는 그녀의 말을 계속 무시했다.
그의 곁에 악보를 깔고 앉은 미나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그날, 우리 부모님도 그 현장에 계셨거든."
"…"
"솔직히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을 줄은 몰랐는데."
"여긴 이제 안전지대니까. 하아,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손을 멈춘 그가 미나를 돌아봤다.
"스타 트럼프끼리 간혹 공명하는 거 알아?"
"거의 못한다고 들었는데-"
리우가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손이 거칠게 미나의 어깨를 잡았다.
"설마 어머니랑 공명한 거야?"
"맞아. 그보다 아픈데 놓아줄래? 그리고 내가 너보다 한 살 더 많거든?"
"뭐,뭐라고 하셨어?"
리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걸로 거래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우리 사장님 명함이야. 찾아올 수 있지? 후회하진 않을걸. 너희 어머니 바람이랑 어느 정도 맞닿아있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미나는 더러워진 악보를 털었다.
반면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한 리우는 그녀를 다그칠 수 없었다.
"이 사람이랑 만나면 말해줄 거야? 말해줄 거예요?"
"내가 사람들 앞에서 웃을 수 있는 건 협상 때문도 있었지만- 부모님이 조커 트럼프였기 때문이야. 나도 부모님처럼 남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서 이 길을 선택한 거야."
"그건 네가, 아니 누나가 스타 트럼프니까-"
물건을 가방에 집어넣은 미나가 빙긋 웃었다.
"맞아. 하고자 하는 일에 정해진 재능이 있어서 도움이 되지. 누구보다 계산적인 너는 이해하겠지? 타고난 이점을 선점한다는 게 얼마나 유리한 삶인 건지."
"그래봤자 지키지도 못했는걸."
"자연 앞에서는 무력해도 돼.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너는 꼭 다이아 트럼프로 살아야 할 거야."
"도대체 무슨 소리-?"
반쯤 접은 신문지가 무력하게 구겨졌다.
"그 일에 배후가 있다면 반드시 밝히고 싶을 테니까."
"…찾아갈게요. 제대로 설명해 줘야 할 거예요."
"바라던 바야."
모자를 더욱 깊숙이 쓴 미나가 떠나자 홀로 남은 리우는 자리를 정리했다.
더는 어울리지 않는 곳.
짙게 깔린 밤하늘 사이로 자취를 감춘 그의 눈은 선우진보다 더 깊게 가라앉은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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