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이야파티

겨울 지나 봄

2023_이야챌린지_089

by 이야
임시 표지

-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사서함으로…


뚝.

보미가 못마땅한 눈으로 폰을 바라봤다.


"하. 결국 마셨나 보네. 됐다. 그냥 혼자 간다."


밤 10시.

아르바이트가 끝난 시각.

평소 데리러 오던 동생, 그러나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하긴. 그동안 제대로 못 놀았을 테니까. 이번만 봐준다."


문자를 남겨놓은 보미는 가방을 끌어당겼다.

아직 쌀쌀한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새삼 낯설었다.


"숙취해소제라도 사둘까. 알아서 먹으려나? 에이, 몰라. 두면 언젠가 먹겠지."


편의점에 들러 필요한 물건을 사고 나온 후.

얼마나 걸었을까.

기묘한 감각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냥 방향이 같은 거겠지?'


눈치챘을 때는 이미 큰길을 지나 골목으로 진입한 뒤였다.

그녀는 다급하게 폰을 눌렀다.


'제발 좀 받아!'


이토록 간절한 적이 없었거늘.

마치 기만하듯 대응하는 메시지는 불안을 증폭시켰다.

어느새 바짝 좇아온 상대.

그 걸음이 가까워진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보폭이 똑같아?'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

드디어 신호가 들어갔고, 뚝.

기대는 처참하게 부서졌다.

뒤늦게라도 다른 연락처를 눌렀지만.

탁-


"아씨."


날아간 폰에 맞은 이가 주춤했다.

마지막 기회라 여긴 보미는 달아났지만, 금세 붙잡혔다.

벗겨진 가방 뒤로 넘나드는 손길은 끝내 무너뜨렸다.

퍼억-

어떤 저항도 의미가 되지 못한 시간.

그날을 각인받은 삶은 결코 따뜻할 수 없는 봄이 되었다.


"허억-"


급하게 몸을 일으킨 보미는 머리를 감쌌다.

지나치게 불쾌한 꿈.

거실로 나온 그녀가 빠르게 목을 축였다.


"너도 물 마시게?"


그러고는 한참 멍을 때리고 있을 때, 동생도 방을 나왔다.


"아니. 근데 안색이 왜 그래?"

"말도 마. 되게 기분 나쁜 꿈 꿨으니까."

"어떤 거길래?"

"몰라. 제대로 기억은 안 나는데, 악몽이었단 느낌만 나."


탁.

식탁에 컵을 올려둔 그녀가 머리를 흔들었다.


"곧 수험생이라 예민한가 보네."

"이미 수험생이지, 뭐."


얼마 전, 끝난 수능.

이제는 그들이 고3이었다.


"으아. 2012년에 멸망한다더니 왜 안 하는 거야?"

"멸망이 쉬웠으면 진작에 끝났겠지. 그보다 엄마가 과외할 생각이 있냐던데?"

"과외? 아, 저번에 봤던 그 언니인가? 목표 학교 학생이었던 것 같은데, 하면 괜찮을지도."


잔을 문지르며 고민하던 보미의 손이 멈췄다.


"너는?"

"나는 일단 독서실 다닌다고 했어."

"아."

"누나도 빨리 정해서 말해. 먼저 들어간다."


보민이 방으로 들어가자 홀로 남았다.

그러자 다시금 거북함이 올라왔다.

급하게 화장실을 향하는 보미였다.


"하. 좀 살 것 같네."


입을 헹구고 나온 그녀는 방으로 돌아왔다.

찝찝함이 다 가시지는 않았지만, 벌써 새벽 1시.

한참 뒤척이던 그녀는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시각.

이테라토의 주민이었던 보민은 빛을 따라 이동했다.


"공허에 온 걸 환영해, 채보민."

"공-허?"

"성공한 도전자는 부활과 환생 중에 선택할 수 있지. 네가 도운 우은하는 알다시피 너보다 이른 시간에 있었고, 그래서 봐."


손짓 뒤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다신 볼 수 없을 거라 여겼던 쌍둥이 누나, 채보미.


"결혼식?"

"그래, 저기 너도 있네. 정확히는 평행 우주의 너지만 말이야."

"은하 누나의 개입으로 바뀐 세계군요."

"이해가 빨라서 좋네. 너는 아닐지라도 또 다른 너는 분명히 구원받은 거겠지."


보민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잠시 떠올랐다.


"너에게 특이사항이 하나 있는데, 이걸 알면 정신이 괜찮을지 모르겠네."


행복한 누나의 웃음을 담던 눈은 여전했다.

보민은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상관없어요."

"채보미. 그 어불성설의 존재. 분명 저렇게 있는데, 있어야 맞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죠?"


그제야 눈길이 여자에게 향했다.


"너는 대체 뭘까? 왜 없는 사람을 기억하는 거야?"


이상한 질문을 들은 보민의 눈가가 경련했다.

그것을 지켜본 도희는 금방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이것 봐. 너는 외동아들이잖아."

"저는 이란성쌍둥이고, 채보미라고 아까 보여줬던-"


신부가 자신의 누나여야 하는데.

분명 그것이 맞을 텐데.

넘긴 증명서에는 확실히 자신뿐이었다.


"다른 세계의 자료인 거 아닌가요?"

"아쉽게도 네가 살던 세계의 정보야. 이테라토의 주민인 우리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잖아. 그래서 네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건가 싶었는데, 이게 웬걸. 또 저렇게 있는 게 맞단 말이지?"

"하고 싶은 말이 뭔가요?"

"친히 응답해 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끔 제시해 주긴 하거든."


그녀는 보민을 안쪽으로 이끌었다.


"뭔가 막고 있어서 제대로 보여주지는 않지만, 실마리는 찾았어."

"아이나 이스테로?"

"자기 이름이 '채보미'라고 하더라고. 아주 운 좋게 걸렸다고나 할까? 간혹 공허의 인도자로서 돌아다니다 보면 자기들이 전생 혹은 빙의했다고 얘기하는 친구들이 있거든. 그 애도 그런 소리를 했고."


설명을 들은 보민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눈으로 서류를 훑었다.

재차 입을 연 것은 도희였다.


"보통 치였다고 하더라. 트럭에. 그래서 열심히 조사해 본 결과, 진짜 있어. 신들과 계약을 맺고 데려가는 운전수가. 더 알아보고 싶었지만, 쉽지 않더라고."

"이 사람이 정말 우리 누나라는 겁니까?"

"동명이인이 아닌 이상 그럴걸? 자기도 쌍둥이라고 하는 걸 보니, 나는 거의 99.9% 확신해."


보민의 눈동자가 여리게 흔들렸다.


"어떻게 할래? 공허의 인도자로서 살아볼래? 아니면 이대로 영면을 취할래?"

"그러면 이 운전수에 대해 알 수 있습니까? 그리고 누나도 다시"

"확답은 못 줘. 하지만 혼자 하던 걸 둘이 하면 돌파구가 생기겠지. 안타깝게도 아이나는 이미 내가 인도해 줬지만, 여기서는 시간이 한 방향이 아니니까 어쩌면?"

"할게요. 하게 해 주세요."


눈을 빛내는 보민을 마주한 도희는 생각했다.


'이런 사람이 한낱 npc였다는 게 얼마나 이상한지 모를 일이야.'


잠시 감상에 젖은 그녀는 곧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는 악수를 건넸다.


"앞으로 잘 부탁해, 후배. 나는 정도희라고 해."

"채보민입니다."


손을 붙잡은 그의 눈빛이 일렁였다.

째깍.

세계의 시간이 나아갈 즘.


"선생님, 고마워요!"

"에이, 보미가 열심히 따라와 준 덕이지!"

"그래도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하향으로 지원했을 거예요."

"보미, 넌 자신감이 너무 없어서 탈이야. 이참에 운동해 보는 건 어때? 나영이었던가? 친구네가 도장을 운영한다면서?"


그간 공부를 봐준 은하와 카페에서 만난 보미가 눈을 굴렸다.


"어, 운동하고는 별로 안 친한데."

"그냥 생각해 보라는 거였어! 아, 이건 선물!"

"헉, 전혀 예상 못 했는데. 감사해요! 응? 호신용품?"

"세상이 생각보다 험해. 나도 봐.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다가 취객한테 소주병으로 맞았잖아."

"으, 그 흉터는 진짜 몇 번을 봐도 끔찍하네요. 정말 무섭고 아프셨겠어요."


평소에는 머리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지만, 들춰보면 확실히 존재하는 그날의 낙인.

잘 덮은 은하는 마치 제 것처럼 공감해 주는 보미를 빤히 바라봤다.


"그랬었지. 그래서 이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필요한 법이야."

"고마워요. 쓸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혹시 모를 땐 바로 쓸게요!"

"나한텐 쓰지 말고."

"당연하죠!"


모든 게 끝날 것 같던 겨울이 지나자 뭐든 시작하기 좋은 봄이 찾아왔다.


"아. 이제 선생님 말고 언니라고 부르죠, 후배님?"

"앗. 그래도 되나요? 선배님이라 불러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음. 편한 대로?"


카페를 나온 둘은 곧 헤어졌다.

홀로 눈밭을 걷던 보미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야?

"나, 이번에 운동해 볼까?"

-그럼 여기로 와라.

"안 그래도 가는 길이야."


경쾌한 걸음.

그 끝이 향하는 길목에서 마주한 손은.

결코 무섭지 않은, 평생을 함께해도 좋을 온기였다.

이윽고 지켜보는 눈이 닫히자 그 순간도 모두 사라졌다.


"저게 다른 우주 속 나라고요?"


보미, 아니 이제는 아이나가 된 그녀가 눈물을 떨궜다.

어떤 부정이 너무 간절했다고 해도 기껏 이뤄진 바람을 망쳐놓을 수 있을까.


[네가 트럭에 치이는 순간, 모든 게 지워지기 전에 오류가 일어났어. 채보민은 널 기억했고, 결국 저렇게 달라진 세계선이 나온 거지.]

"정말 그랬어요? 보민이가-"

[자책감에 더는 살지 못한 거지. 그 무력감에 스스로 놓은 자격이라 해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겠어? 아무튼 공하나가 알면 이거 큰일인데. 애초에 다른 하나들에게는 알려지기 싫었지만. 영원한 비밀은 없단 건가.]


인도자인 정도희를 만난 다음.

또다시 찾아온 누군가는 알 수 없는 소리를 했지만, 그녀의 정신은 온통 보민에게 있었다.

찌르르.


[남의 세계를 건드렸으니 각오가 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아이나 이스테로, 아니 채보미. 너, 나한테 협조 좀 해줄래? 그럼 네 동생을 다시 만날지도 몰라. 아, 같은 세계선의 동생.]


저릿한 마음에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떤 봄은 너무나 추악해서 묻어뒀지만, 꼭 들춰내는 겨울이 기만 속에 덮어준다 해도 쌓이는 봄이 마냥 예쁘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하얗게 물든 세상 속에서 비워내고 지운 뒤에는 그저 봄이 되었고.

다시 밟아보는 꽃잎은 무색하리만치 아름다웠다.

결연한 표정이 참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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