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이에요, 아가씨. 가족이라곤 남동생 하나뿐이었는걸요. 기억하실는지 모르겠지만, 두 살 터울의 사고뭉치요. 지금은 어엿한 기사가 되어 영지를 수호하고 있지만요."
"로이라면 나보다 한 살 어렸던 녀석인데. 걔도 늙었겠네."
다이엔의 중얼거림을 들은 로나가 쓰게 웃었다.
이 손으로 언젠가 다시 아가씨의 머리를 만질 날이 올 거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
무려 20년 만에 주어진 사명을 다할 수 있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느새 촉촉한 눈길로 아가씨를 바라보는 로나.
그 시선이 어색해 고개를 돌린 다이엔은 훌쩍 커버린 몸이 낯설었다.
"어떻게 10년도 아니고, 20년씩이나 세월이 흐를 수 있어. 10살을 코앞에 뒀던 내가 이젠 서른이란 거야?"
아주 큰 차이는 아니었지만 옛날과 다른 발 사이즈는 그녀의 기분을 더욱 가라앉게 만들었다.
이렇다 할 사교계에도 나가보지 못하고, 감히 나가기 어려운 나이가 되다니.
나간다 해도 영애보다는 부인이 더 어울리는 꼴이라니.
"하. 스물아홉의 노처녀가 정말 나라고? 이건 세상이 날 속이는 거야. 악몽을 꾸는 게 아닐까? 로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너는 벌써 서른이 넘었잖아. 이게 납득이 돼?"
다이엔과는 달리 자신의 시간을 차곡차곡 밟아온 로나는 곤란한 표정만 내보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로나를 마주하자 아무리 부정해도 이것이 현실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껴버린 다이엔.
그녀는 바닥과 훌쩍 멀어진 눈높이에 현기증이 일었다.
"이럴 순 없는 거야. 난 그럼 누구랑 결혼해? 제국의 그 누구도 나를 원하지 않을 거야…"
여생을 혼자 살아야 한다는 것.
정신은 여전히 9살에 머무른 다이엔에게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몇 년만 있으면 결혼할 줄 알았는데, 이 세상 가장 행복한 신부가 될 거라 믿었는데!
"하하, 황태자비가 되려고 공부했던 게 다 무슨 소용이야!"
한편에 쌓아둔 책들은 먼지 하나 없었지만.
그녀의 눈앞을 뿌옇게 만들었다.
"어, 그 다이엔 아가씨?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라요."
"뭐가 가능해? 어려지는 거? 그런 마법이라도 개발이 됐대?"
"아니, 그게 아니라요. 황태자비요!"
그제야 진정한 다이엔이 책을 함부로 하던 발길을 멈췄다.
"황태자가 아직 결혼을 안 했어? 아니, 잠깐. 그러고 보니 황태자는 내가 8살이 되는 해, 태어났었지? 그러면 이제 스물하나?"
신속하게 계산을 끝낸 다이엔의 눈빛이 변했다.
제국에서는 보통 이른 나이에 결혼하긴 하지만, 황태자의 연식이 생각보다 높지 않았다.
즉 그는 여전히 결혼 적령기.
하지만 자신은?
곧 현실을 직시한 그녀는 무력하게 침대에 떨어졌다.
"내가 한 살이라도 어렸을 때라면 모를까. 이제 와선 좀 아니잖아."
제국 법에 의하면 10살부터 약혼할 수 있으니, 자신이 18살이 되는 해.
그때에 약혼했다면 괜찮았을 텐데.
사라진 20년보다 놓쳐버린 11년이 더 아프게 사무쳤다.
"아직 포기하긴 일러요! 지난 5년 동안 황권은 약화되고, 황실은 막대한 빚을 떠안았거든요. 그리고 백작님은 그런 상황에서도 황실에 과감히 투자했고. 그러니 비호를 잊지 않았다면 8살 차이가 대수겠어요?"
"나이 차는 상관없지. 과거에도 황후가 황제보다 15살이 더 많은 때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황제가 황자 시절, 스물다섯의 영애와 혼약을 맺어서 그런 거잖아."
로나가 말릴 새도 없이 다이엔의 손이 예쁘게 단장한 머리를 헝클였다.
"3년만 일찍 돌아왔어도."
제국에선 스물일곱이 넘으면 결혼에 실패했다고 보는 편.
돈과 권력이라면 아예 못할 것도 아니지만.
스물일곱 이후에 혼례를 올린다는 것은 손에 꼽히는 일이었다.
"고작 3년 때문에 내가 실패자라니."
수치심에 물들은 낯이 깊은 좌절감을 떠안았다.
그것을 안쓰럽게 바라본 로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지 않아요, 다이엔님! 조금 상하긴 했지만, 이번에 다듬은 붉은 머릿결 좀 보세요! 얼마나 탐스러워요? 그리고 눈동자는요! 예전에 보여주셨던 페리도트처럼 반짝이잖아요! 그리고 피부도 전혀 쳐지지 않았고, 주름 하나 없으시잖아요! 스물아홉이라 해도 외모만 보면 이제 막 성인이 된 다른 영애들과도 견줄 수 있는걸요!"
열정 어린 칭찬이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꼭 맞닿은 손은 그것이 진심임을 나타냈다.
"그렇게까지 포장할 건 없어, 로나.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 정도로 어려 보이지 않을걸."
하나 그 말이 진실일 수는 없는 법.
안으로 굽은 팔이기에 할 수 있는 아부였지만 기분이 한결 나아지기는 했다.
"다이엔 오로날드!!!"
다이엔이 차츰 자신에게 적응하고 있을 무렵.
소식을 듣고 급하게 돌아온 백작의 목소리가 저택을 울렸다.
그에 다이엔의 몸이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너무나도 그리웠던 아버지의 목소리.
아무리 세월이 지났어도 그 음성만큼은 여전했다.
"아빠!!!"
"정,말 내 딸아이가 맞구나!!!"
극적으로 재회한 부녀의 상봉.
저택의 식솔들도 눈가를 붉혔다.
이십 년 전, 잃어버린 백작 영애가 이제야 이 저택을 다시 환하게 빛내주었다.
아가씨 하나 지키지 못해 속죄하는 마음으로 일하던 그들은 비로소 그 짐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었다.
"네가 납치된 이후, 다시는 보지 못할 줄 알았단다. 널 앗아간 조직을 소탕해도 너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는데. 정녕 꿈이 아니더냐."
"진짜예요. 비록 스무 살이나 더 늙어버렸지만요."
"죽기 전에 널 되찾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구나. 너를 데려온 라디움에겐 반드시 사례를 해야겠지."
그 불쾌한 이름을 듣자 다이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다이엔은 자신의 손목을 내밀었다.
"도대체 누가 이 귀한 팔을!"
치료를 받았어도 남아있는 자국.
그것을 보자 족쇄에 쓸렸던 시간이 다시금 떠올랐다.
"절 도둑으로 취급한 것도 모자라 제 몸을 함부로 굴린 작자예요."
"뭐? 라디움이 그랬단 말인가? 페리온! 당장 그 자를 지하 감옥에 가둬라!"
"그렇지 않아도 현재 그곳에 있습니다."
대답을 들은 오로날드 백작이 갑갑한 치장을 벗었다.
그러고는 딸을 이끌고 자신의 집무실로 걸어갔다.
"후. 내 딸을 건드린 줄도 모르고 은인으로 여겼구나."
"절 백작저로 데려온 건 맞으니까요. 그자의 처분은 제가 해도 될까요?"
"그래, 그러자꾸나. 그보다 그간 어떻게 지냈느냐. 아니, 이런 얘기는 부인도 있는 곳에서 해야겠지."
"아빠, 저는 기억이 없어요. 제가 20년 동안 어떻게 지내왔는지. 그냥 한숨 자고 일어난 것뿐인데, 세상이 그만큼 흘렀대요."
집사를 부르려던 손이 멈췄다.
딸의 슬픈 눈을 마주하자 깊은 분노가 일렁였다.
이미 죽여 없는 납치범들을 재차 죽이고 싶은 심정.
"어리고 약한 몸으로 겨우 세상살이를 해왔겠지. 다이엔, 굳이 그 세월을 기억할 필요 없단다. 앞으로는 이곳에서 안전하고 평화롭게 여생을 함께 보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