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도 불안했지만 이토록 처참한 결과는 그것을 확고히 하는 것도 모자라 같은 트럼프에게 한낱 조롱거리밖에 되지 못했다.
'1등, 원리우는 저렇게나 큰 액수를 냈는데 난 어째서…'
명예의 전당에 올라간 다른 선배님들과도 견줄 수익.
존경하는 이들의 이름 옆에 새겨진 그가 미치도록 부러웠다.
민코코, 선우진, 원리우.
'기존 3위를 잡을 정도라니.'
대다수 뛰어난 트럼프.
그 사이에도 차이는 존재했다.
다이아는 물론이고, 트럼프에도 걸맞지 않은 자신.
큰 웅덩이에 빠진 채 가라앉는 것이 최선이었다.
"커억-"
꿈에서 깬 주이는 주위를 둘러봤다.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했다.
그제야 안심한 그녀.
도망치듯 떠나온 크라운 더 다이아.
"진정해, 공주이. 지난 일이잖아."
쏴아아.
그녀는 필사적으로 세수를 마쳤다.
수도꼭지를 잠그자 보이는 뽀얀 얼굴.
그곳에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서서히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그녀의 손이 급하게 크림을 찾았다.
문지르듯 바른 뒤에야 숨을 돌린 주이는 울렁이는 속을 물로 달랬다.
"하아."
침대에 걸터앉은 그녀가 얼굴을 가렸다.
달아난 잠은 또다시 절망을 남겼다.
가까스로 손을 내린 주이는 공허한 눈으로 어두운 창밖을 바라봤다.
깜깜한 하늘처럼 자신도 그런 암흑에 갇혀있는 기분.
그럼에도 삶의 의욕을 놓지 못한 그녀는 인간들 사이로 섞여들었다.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다.
현재 많은 트럼프가 교류원을 통해 이 지구에 넘어와 살고 있으니까.
비록 그들은 트럼프의 긍지를 여실히 지니고 있겠지만.
"엄마처럼 폐인이 되진 않을 거야."
자신처럼 재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랑하는 이를 잃은 엄마는 더 이상 트럼프로서 기능하지 못했다.
결코 웃을 수 없는 상태에서 웃음을 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해도 그것은 조커 트럼프임을 부정하는 것과도 같아서 그렇게 엄마의 삶은 저물었다.
약속한 날짜에 맞춰 추락하기 좋았던 거다.
"그럴 거면서, 그렇게 놓고 떠날 거면서 왜 마지막은-"
나한테 웃어준 거야.
끈질긴 괴롭힘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그날 마주한 종말이었다.
어쩌면 그때의 트라우마가 흉터처럼 남아 자신을 무능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를 일.
뜻하지 않은 과거까지 들춰본 주이의 안색은 더욱 파리해졌다.
"차라리 이 숫자를 몰랐다면 나도"
자리에 일어선 그녀는 발아래를 내다보았다.
까마득한 높이.
손목 위 새겨진 수명이 억울하면서도 다행스러웠다.
'결국 살아남아 몸만 망가진 채로 여생을 보내겠지.'
시선을 돌린 그녀는 남은 물병을 비웠다.
맑아지기는커녕 더욱 깊은 수렁 속에 빨려가는 느낌이었지만.
홀로 지새우는 밤은 너무나도 길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그녀는 일찍 집을 나왔다.
산책이라도 해서 기분을 전환하려던 그녀.
공원에 들어선 그녀는 어느 순간 자신을 미행하는 기척을 감지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밖을 돌아다니다 보면 간간이 붙는 감시자들.
경계하는 한편으로 이렇다 할 대처는 하지 않았다.
'다이아 트럼프는 뭐, 수요가 많으니까. 나처럼 재능 없다 해도 없는 것보단 나으니 저러는 거겠지.'
언젠가는 말을 걸어올 거라고 생각해서 지켜봤는데.
"허? 이보세요. 갑자기 공격하면 곤란하죠?"
발을 들어 상대를 막은 주이가 따졌지만, 그들의 행동은 거침없었다.
결코 자신이 약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오히려 힘이 세서 괜히 허약한 애들을 다치게 할까 묵묵히 참아온 자신.
잠깐이지만 스페이드 트럼프였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품었는데.
'역시 뭔가를 다치게 하는 건 성미에 안 맞아-'
하지만 그게 이런 결과로 이어지다니.
자신의 남은 일수는 넉넉했다.
죽지는 않겠지만 딱 그뿐.
앞으로 자신이 처할 상황을 그려보던 주이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역시 나이트 트럼프라 쉽지 않네."
"여럿이 애먹을 정도면 꽤나 상위권이니 전력에 도움이 되겠어."
의식의 끈을 놓는 와중 그런 얘기를 들었지만 전혀 이해되지 않는 소리였다.
그녀가 눈을 뜬 것은 한참 후.
흐릿한 시야 너머 푸른 하늘과 검은 전투복을 입은 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당신들 뭐야!"
"그렇게 경계할 거 없어. 같은 편이니까."
"뭐? 사람 뒤통수를 쳐놓고 같은 편?"
샤삭.
빠른 움직임으로 멀어진 주이.
그 사나운 눈빛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내 이름은 세미. 너의 선배라고 해두지."
"그딴 거 안 궁금해! 날 어디로 데려온 거야?"
주이는 휙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어디 보다는 왜가 더 타당하지 않아?"
"하- 당연히 돈 때문이겠지. 그런데 이거 어쩌나? 나는 재능이라곤 1도 없는 언다이아 트럼프나 마찬가지인데!"
"풉,푸하하. 아, 미안. 그래, 이해해. 나도 한때는 언하트 트럼프였거든."
확실히 세미란 여자의 볼에는 하트가 새겨져있었다.
"그런 걸로 내가 동질감을 느낄 것 같아?"
"그래도 느낄 수밖에 없을걸. 우리는 가장 우월한 트럼프, 모든 트럼프를 발밑에 두는 나이트 트럼프니까 말이야."
말을 마친 세미는 주머니에서 향수를 꺼냈다.
그러고는 제 볼에 뿌리는 그녀.
그 행동에 눈살을 찌푸린 주이가 입술을 씰룩였다.
"뭐래? 그딴 트럼프가 없거든?"
"이걸 봐도 그럴까?"
"뭔 개수작- 그건 뭐야? 달?"
자신의 얼굴을 들이미는 세미를 마주한 주이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듣도 보도 못한 달의 문양이 떠올랐으니까.
칙-
방심한 찰나, 그 보라색의 향수는 자신을 향했다.
"콜록- 이게 대체 뭔-"
주이의 말문은 그대로 막혔다.
거울 속 자신이, 그 얼굴에 있는 것이 똑같았으니까.
달을 지닌 채 웃고 있는 세미와.
"나이트 트럼프는 날 때부터 위장한 채로 태어나. 그리고 이 향수, 원료는 비밀이지만 아무튼 이걸 뿌리게 되면 드러나지."
"역사서에서 그런 거 본 적 없어."
"당연하지. 우리가 그동안 지워왔으니까. 철저히 비밀로 붙여진 미지의 트럼프. 그게 우리야. 그리고 트럼프도, 인간도 다-"
세미의 손가락이 바닥을 가리켰다.
"우리 나이트, 발아래 있는 거지."
"미친 소리야…"
"그래. 지금은 혼란스럽겠지. 너의 정체성을 부정당했으니. 근데 스스로 언다이아라 부를 만큼 알고 있었잖아? 그 길은 너와 맞지 않는다는걸. 그런 우리에게는 꽤나 놀랍게도 신체적 재능이 있어. 마치 스페이드 트럼프처럼. 그래서 다른 영역에서는 최하위권이지만, 스페이드에서는 선방하는 편. 물론 스페이드로 위장되면 운 좋은 케이스겠지만 말이야."
어린 시절이.
웃음을 머금은 마지막 말이 그동안 가슴에 맺힌 말을 건들기 시작했다.
"뭐, 한 가지 아쉬운 건 제로 트럼프로는 위장하지 못한다는 거? 그것도 옛말이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가서 알릴 거야…"
"널 도와준 원로한테? 말리진 않을게. 그분도 한패니까."
이럴 순 없었다.
세상이 단체로 자신을 속이는 걸까?
"그냥 모두가 다 그 향수에 맞으면 달로 바뀌는 거 아니야?"
"그래. 합당한 의심이야. 야, 조커."
"예이~"
치이익-
조커라 불린 사나이가 익살스럽게 웃었다.
그의 볼에도 향수가 닿았지만.
"얘는 나이프 아니고 재밌어 보여서 합류한 애야. 보다시피 반응 없지? 그리고 이젠 시간이 없으니 본론을 말할게. 저기 아직 미치긴 일러, 공주이."
세미가 미간을 구겼다.
그동안의 세월이 허무해서 그런 걸까.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는 주이.
그 심정을 자신도 겪었으니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타악-
"받아."
주이는 발끝에 무언가 닿자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칼? 승부라도 하자는 거야?"
"나랑은 아니고. 이 동굴에 있는 드래곤이랑 하게 될 거야."
"하? 나이트 트럼프에 이어 드래곤?"
파앗.
세미의 손이 순식간에 주이의 팔목을 붙잡았다.
"여기 수명, 보이잖아."
"나이트 트럼프는 남의 수명도 볼 수 있나 봐?"
"아니, 그건 아니야. 드래곤을 통해 뭘 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거야. 강한 힘과 똑똑한 머리뿐만 아니라 나이트가 군림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 생각해 봐. 우리가 어떻게 제로마저 아우를 수 있는지."
모든 트럼프의 재능을 가진 제로.
그리고 그 제로를 뛰어넘는 나이트.
"수명의 한계에서 벗어났다?"
"빙고~ 그리고 그걸 이뤄주는 게 드래곤인 거지~ 자, 단잠에 빠진 드래곤의 목을 가져와. 어렵진 않을 거야. 너도 결국 나이트 트럼프의 일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