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이야파티

사과를 알맞게 들일 수 있도록

2023_이야챌린지_092

by 이야
임시 표지

"어서 오시오, 이오 낭자~ 오는 길, 피로하지 않으셨소?"


막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온 이오는 자신을 반기는 이를 바라봤다.

푸른색의 선비 옷을 입은 남자친구, 원대한.

그의 말투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한식집을 예약할 걸 그랬네."

"아니오, 낭자. 소인은 외것의 재료를 더 잘 다루오."


사삭.

소매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구가 맞물렸다.

컨셉에 먹힌 애인을 싫지 않은 눈으로 흘겨본 이오는 재킷을 벗었다.


"식당째로 빌리길 잘했네. 이런 모습을 남들이 보면-"

"소인의 행각은 오직 그대만을 위한 것이오. 귀향하느라 허기졌을 텐데 바로 식사를 대접하겠소."


그 말을 지키겠다는 듯, 빠른 손길로 음식을 준비하는 대한.

자리에 앉은 이오는 얼마 되지 않아 첫 요리를 맛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다 할 시간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코스.

중간에 말릴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기내식조차 먹지 않고 일정을 소화한 그녀는 매우 허기진 상태였다.

잠시 후.

한참 바삐 움직이던 손을 멈춘 대한은 쉬지 않고 먹는 이오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많이 드시오, 낭자!"


큰 울림이 머리맡을 맴돌자 포크를 놓은 이오가 고개를 들었다.

맑은 눈이 불쑥 자신을 응시하자 대한은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소인이 방해가 되었구려?"

"그럴 리가. 그 요상한 말투는 역시-"

"요상?"


이오의 지적에 냉큼 눈빛을 돌린 대한은 어느새 일어난 이오를 마주했다.

자신의 지척에 상체를 들이민 여자친구를 보는 눈동자가 속절없이 흔들렸다.


"저번에 한 말 때문이지? 촬영장에서 보기 좋다고 해서."


말을 마친 이오가 다시 자리로 돌아가자 살짝 아쉬운 듯 입술이 움찔거렸지만.

대한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추석 때 같이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게 아쉬워서 준비한 거요!"

"흐음?"


의심스러운 눈길이 따라붙었으나.

금세 평상시의 눈으로 돌아왔다.


"그래? 나는 당신이 차.세.준을 따라 한 줄 알았네~"

"소,소인이 굳이 왜 그러겠소? 그자가 곱상하다는 데 이견은 없으나 체격 차이가 큰데 뭣하러-"

"아, 근데 굳이 관복을 입지 않고 선비 옷을 골랐다?"


정황은 확실했으나 대한은 말을 골랐다.

그의 덩치라면 나풀나풀 한 옷보다는 그쪽이 더 어울렸을 터.


"이게 더 취향이었소!"

"아? 그걸 몰랐네. 당신이 질투하나 싶었는데, 아니었구나?"

"그대가 옛날에 그자를 만났다 해도 나는 전혀 개의치 않소."

"진짜?"


되묻는 이오에 괜한 말을 했다고 아차 했지만, 이미 흘린 말을 주워 담기엔 너무 많이 와버렸다.

연극배우로 활동하다 EO엔터 발굴팀장의 눈에 띈 차세준을 대표실에서 재회했을 때도.

대표가 손수 촬영장을 찾아가 서포트해 줬을 때도.

그는 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굴었다.

둘의 과거가 일절 신경 쓰이지 않은 얼굴로 지켜보았지만.

속내는 그것과 180도 달랐다.


'너 정도면 원하는 곳 많을 테니까 절대 계약하지 마!'

'신인 아이돌에 인력이 쏠려서 대표가 나온 거니까 의미부여 하지 마!'

'가뜩이나 잘생긴 얼굴로 화사하게 웃지 말라고!'


경계할 수밖에 없는 외모의 남자, 차세준.

고등학교 동창이었지만 전혀 반갑지도 않고, 달갑지도 않은.

오로지 껄끄럽기만 한 존재였다.

지금은 자신의 연인이지만, 그 연인이 한때 만난 상대가 바로 그니까!


'아무리 13년 전, 고등학생 때라고 해도. 치기 어린 만남이었다고 해도-'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자신의 치졸한 마음을 알면 혹여 실망할까 내뱉지 못한 말들.


"하긴. 걔랑은 6개월도 안 갔는데 뭐."

'반년이나 가까이 만났다니.'

"또 학창 시절에 한 연애니까 괜찮겠네.'

'풋풋한 시절을 함께 하다니 전혀 괜찮지 않아.'


으드득.

입 밖에 내지 못한 소리 대신 디저트를 위해 마련된 사과만이 비명을 질렀으나.

반대편에 있는 이오는 알 수 없었다.


"그러면 알려줘도 되겠네."

"어떤 걸 말이오?"

"내 개인번호."

"그걸 왜?"


수난을 아직 끝내지 못한 사과는 우직한 손에 오열하는 수밖에 없었다.


"붙여준 애들이 다 어려서 낯을 가리나 봐. 원래도 그런 면이 있긴 했는데, 지금은 더 힘든가 봐."

"그 안타깝긴 하구려. 하나 사사로운 일까지 수장인 낭자가 챙기면 다른 이들이 오해하지 않겠소?"

"에이~ 송이강 씨도 내 개인번호 알고, 또 세준이는 나 믿고 우리 엔터 와준 거나 마찬가진데 뭐 어때?"

"송 도령은 그 낭자보다 많이 어리지만, 그 차 도령은 동문이지 않소?"


대한의 물음을 들은 이오의 손이 포크를 집었다.

푹.

아직 남은 큐브 스테이크 위로 꽂힌 그것.


"많이?"

"어, 조금?"

"그래. 일단 알았어. 그보다 오랜만에 보는 건데, 이상한 나라의 원 선비 말고 진짜 내 남자친구를 좀 보고 싶은데-"

"큼. 내가 너무 몰입했나?"


그가 컨셉에서 벗어나자 사과도 그 손아귀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제멋대로 으깨진 사과는 좋은 후식이 되었다.

스케줄로 바쁜 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

심야 촬영을 나온 세준은 핫팩을 챙기고 있었다.


"앗. 감사해요, 배우님!"

"배우님, 안쪽에서 쉬세요. 제가 마저 나눌게요."

"아,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촬영 관련해서 따로 드릴 말씀도 있어요."

"네~ 부탁드릴게요, 매니저님."


물건을 넘긴 세준은 스태프와 천막으로 이동했다.


"빡빡한 일정인데 체력은 괜찮으시죠?"

"예. 현재 작품은 하나뿐이라 무리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행이네요. 이번에 예능 하나 게스트로 들어간다고 들었어요. 고스토랑!"

"촬영 일정과 겹치지는 않을 텐데-"

"앗. 그게 아니라 저희가 배우님을 너무 굴리고 있어서 힘드실까 봐 여쭤본 거였어요."


차락.

안으로 들어온 둘은 한기를 걷어낼 수 있었다.


"그렇군요. 별다른 문제는 없습니다."

"네네. 오늘 씬에서-"


스태프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세준은 여느 때보다 집중했다.

연극만 하던 자신이 처음으로 맡은 드라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

연극도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연기한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훨씬 더 멋진 연기를 선보이고 싶었다.


'그래야 후회하지 않을 테니까.'


자신을 믿고 투자해 준 EO엔터 나아가 그곳의 대표, 백이오.

결코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네. 여기까지만 숙지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촬영 들어가면 알려드릴게요."


무전기를 꺼낸 스태프는 잠시 뜸을 들였다.

세준이 의아한 눈짓을 보내도 머뭇대는 입술.


"따로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그게, 그 이곳에서 할 얘기는 아닌데."

"나쁜 얘기가 아니라면 괜찮습니다."

"저번에 오셨을 때가 기회였는데, 하필 그날 자리를 비워서. 배우님, 제가 진짜로 이런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정말 부탁할 사람이 배우님밖에 없어요."


절박한 눈빛을 보자 세준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제가 정말 팬이에요. 원대한 축구선수. 아, 이제는 은퇴했지만 현역으로 활동할 때부터 진짜 좋아했는데 현생 사느라 생눈으로 본 경기도 별로 없고. 그래서 가까이 보지도 못했고, 사인 한번 받지 못했는데. 배우님이 동창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이번에 고스토랑 게스트를 출연하면 아마 만나실 것 같기도 하고."


거기까지 전해 들은 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원대한과는 동창이었고, 알기로는 해당 프로그램의 고정 출연자가 맞았다.

그는 곧 그녀의 부탁을 눈치챘다.


"사인. 가능하면 받아오겠습니다."

"진,짜요? 제가 너무 무례한 말씀을 드렸는데, 어 정말."

"동창이긴 하지만 막 친한 사이는 아닙니다. 그래서 안 될 수도 있지만."

"아뇨아뇨. 그 무리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니, 제가 잠시 미쳤나 봐요! 배우님 쉬셔야 하는데, 시간 뺏어서 죄송해요!"


황급히 허리를 숙이고 돌아선 스태프, 하은주.

은주의 등 뒤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꽂혔다.


"최대한 받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닷!"


차락.

밖으로 나온 그녀는 씹힌 혀에 냉기가 닿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미쳤지, 미쳤어."


이미 엎질러진 물.

찬 바람에 종종 걸음을 옮기는 그녀가 애꿎은 무전기만 문질렀다.

며칠 후.

BCS 사옥 7층.

고스토랑 스튜디오에 도착한 대한은 평소와 다른 건물이었지만, 익숙한 내부를 둘러봤다.

먼저 방문한 차세준이 빠릿하게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대한 씨, 왔어?"

"예. 이거 선물입니다. 안 PD님."

"어휴~ 이미 한 번 거하게 돌렸으면 뭘 또."

"아이, 이사하고 첫 방문인데 빈손으로 올 수 있나요?"


대한의 너스레에 여정이 너털웃음을 보였다.


"진짜 대한 씨는 인성이 남달라~ 아주 그냥 아들 삼고 싶어~"

"아, 제가 눈치 없이 일찍 태어났네요."

"하여간~ 갈수록 말도 늘어~ 아무튼 저기 오늘 게스트 세준 씨랑도 인사해. 이오네 소속 배우니까 초면은 아니지?"


대한은 피디가 가리키는 쪽을 쳐다봤다.

때마침 고개를 든 세준과 정면으로 부딪힌 시선.

묘한 기운이 둘 사이를 가로지를 때.

여정은 조연출의 부름에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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