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brunch
매거진
이야파티
일요일은 기다리지 않는다
2023_이야챌린지_093
by
이야
Dec 11. 2023
임시 표지
"결국 둘이 혼인하는구나."
소파 위에 누워있던 해수는 상체를 일으켰다.
평소에도 자주 읽는 로판.
하지만 주로 폰으로 보던 때와는 달리, 책으로 읽고 있는 지금.
이 책은 친구의 선물이었다.
바로 글을 쓴 장본인이 준 종이책.
오랜만에 만난 지안은 근황을 전하며 책을 선물했다.
글을 쓰는 동안 도움을 준 자신에게 가장 먼저 권하고 싶었다고 했나.
활자를 훑는 한편으로 해수는 점심때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턱-
의자에 가방을 내려둔 해수는 지갑을 찾았다.
"뭐 마실래?"
"나는 오곡라떼."
곧 키오스크로 주문을 마치고 돌아온 해수.
그녀를 반긴 것은 지안의 미소였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나야 뭐. 회사 다니고 똑같지."
"그래도 이번에 이직했잖아."
"새로 교육받고 해서 정신없이 보내고 있긴 해."
몇 마디 말이 더 오간 뒤.
해수의 귀로 영수증의 번호가 들렸다.
"나왔나 보다. 가져올게."
금방 쟁반을 든 채 테이블을 찾은 그녀.
음료 외에도 디저트가 많은 것을 확인한 지안의 눈이 커졌다.
"진짜 많이 시켰네."
"들어오기 전에 말했잖아~"
"그냥 식당을 갈 걸 그랬나?"
"아니야. 이거면 충분해."
찰칵.
촬영을 마친 해수가 폰을 끄자 그제야 잔을 잡는 손.
오곡라떼를 한 모금 홀짝인 지안은 고소함에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괜찮네."
"이제 네 근황도 말해봐. 책 나왔담서?"
"응. 네가 영감을 준 거 하나랑 요청받아서 쓴 작법서 하나."
"오, 이제 어느 정도 팔리는 작가가 됐구나. 역시 정지안-"
마치 자신을 직접 키운 것처럼 감격한 해수.
마들렌 하나를 입에 넣은 지안이 웃음을 흘렸다.
"누가 보면 날 낳은 줄 알겠어~"
"마음으로 낳았지, 마음으로! 이럴 게 아니라 바로 서점 가서 네 책 사야겠네."
"뭘 돈 주고 사. 자, 받아."
지안이 건넨 쇼핑백 안을 살펴보자 로판 특유의 표지가 보였다.
붉은 머리카락과 녹안을 지닌 여자가 남자의 눈을 가리고 있는 일러스트.
"백작 영애가 훔치는-"
"잠만. 아무리 나라도 책 제목을 읊는 건 좀."
책을 꺼낸 해수가 제목을 읽으려 하자 지안이 급하게 말렸다.
"알았어, 알았어. 아무튼 고마워. 집 가서 바로 읽어야겠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한테는 잘 맞을 거야. 네 취향이 많이 반영된 이야기니까."
"완전 내 맞춤 책이네? 기대되는걸."
"내가 쓴 거긴 하지만, 너도 거의 공동 저자지. 2년 전에 네가 사고 났을 때, 신나서 막 읊던 소재를 가지고 시작한 거니까."
"내가 그랬나?"
추운 날에도 얼음을 포기하지 못한 해수가 아메리카노를 입에 털어 넣으며 의문을 띄웠다.
입원했던 기억은 나는데, 구체적인 회상은 되지 않았다.
흐릿한 과거의 한 장면을 끄집어내기 위해 미간을 좁혔지만, 역시 떠오르는 건 없었다.
"뭐, 내가 병문안 갔을 때 흘리듯 말한 거라 기억 못 하나 보네."
"그래도 내가 한 말인데, 왜 이렇게까지 생각이 안 나지?"
"제대로 쉬지 못하고 거의 바로 회사 들어가서 그런 거 아니야?"
"하긴. 전 직장이 그렇긴 했지."
그 이후로도 여러 주제로 떠들던 둘.
새삼 빠르게 저무는 해가 떠난 하늘은 캄캄했다.
어느새 창밖을 바라보던 해수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무릎 위에 올려둔 책이 더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많이 읽었네. 나머진 내일 마저 봐야지."
소파에서 일어난 해수는 찌푸둥한 몸을 풀었다.
한껏 기지개를 하고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일기를 짤막하게 남긴 다음 침대로 올라왔다.
'아침에 운동 가고, 이번에 개봉한 영화 보고, 점심 먹고 돌아와서 다시 책 읽으면 되겠네.'
잠들기 전, 내일 하루를 간단하게 계획한 그녀는 이불을 올렸다.
포근한 잠자리에 금방 잠에 든 그녀.
몇 시간 뒤.
눈을 뜬 그녀는 자신의 일정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이게 뭐야?"
손가락 사이로 빠지는 머리카락이 이상했다.
일단 색부터 달랐다.
밤새 염색을 했을 리는 없고.
아무리 몽유병이 있어도 그럴 수 있을까?
뿐만 아니라 길이도 달랐다.
단발을 고수하던 자신이 이 정도로 긴 머리카락을 가졌다?
"말도 안 되잖아."
그런데 차라리 하루아침에 모습이 달라진 거면 다행이지.
거울 속 비친 자신은 결코 자신이 아니었다.
낯선 여인은 이상하게도 낯이 익었다.
"표지랑 닮지 않았나?"
녹색의 눈동자는 그녀를 확신하게 만들었다.
자고 일어났더니 친구가 쓴 소설 속 주인공에 빙의되었다.
"참 로판다운 제목이야."
머리를 부여잡은 그녀는 다시 침대로 돌아가 웅크렸다.
"내 일요일이 왜!"
짝쫘악.
여러 번 볼을 쳐봐도 깨어나지 않았고.
등 뒤로 느껴지는 푹신함은 차원이 달랐다.
그녀는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책 속으로 빙의된 것이 현실임을.
"다이엔 오로날드, 아니 다이엔 카트벨룬이 된 건가?"
아무래도 혼인하고 난 뒤의 세상 같았다.
황태자인 크루스 카트벨룬과.
부정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에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한 해수는 결정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기로.
비록 보지 않은 뒷부분이 심히 마음에 걸렸으나.
'내 취향대로 썼으면 파국엔딩은 아니겠지.'
자신은 꽉 닫힌 해피엔딩을 좋아했다.
그러니 지안과 자신의 취향을 믿으면 됐다.
"천장도 엄청 높네. 평생 여기서 산다고 하면-"
편리한 현대가 매우 그립겠지만.
"어느 세상이든 돈이 많으면 다 편리한 거 아니겠음?"
다이엔, 그녀가 시집온 황가는 빚에 허덕인다 해도 그녀의 집안은 누가 뭐래도 부유한 가문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해수, 곧 다이엔은 비릿한 미소를 띠었다.
"유년 시절을 험하게 구르고 이제야 보상받는 다이엔에게는 미안하지만, 대신 내가 제대로 즐겨줄게!"
다짐한 다이엔은 새삼 큰 방을 다시 둘러보았다.
그러다 일찍이 남편 되는 이가 나갔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 그렇겠지."
쏙 이불 속으로 들어간 그녀는 남편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제국의 황태자, 크루스.
설정상 한참 연하인 그는 돈 때문에 팔리듯 결혼한 것과는 마찬가지.
동침을 했다고 하지만 그뿐.
둘의 사이는 아직 좋아지지 않았다.
'그리고 다이엔은 기억을 잃었다지만. 크루스가 마냥 그녀를 달가워하지 않는 건- 그녀가 훔치려던 그림의 주인이 자신이기 때문이었지.'
다이엔이 과거 펠레스로 살던 때.
기억이 돌아오기 직전 훔친 명화의 작가는 아르스.
그리고 그 아르스가 바로 황태자였다.
'자신의 그림이 도난당했다는 사실을 안 그는 이 소식을 전해 들었지만, 죄를 물을 수는 없었으니까.'
일단 다이엔 본인이 펠레스임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고.
아르스는 황태자의 비밀 신분이었기 때문에 직접 나설 수도 없는 실정.
"결국 로맨스라 이거야. 일단 아르스의 뒷배나 되어볼까?"
실제로 해수는 읽지 않아 몰랐겠지만.
훗날 기억을 찾는 다이엔이 그를 후원하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저 그 시점이 당겨지는 것뿐.
이제 막 이불에서 벗어나려던 그녀를 누군가 밖에서 불렀다.
"로-나?"
"황태자비 전하, 모시러 왔습니다. 의복부터-"
로나는 평소와 다른 다이엔의 모습에 잠시 말문을 멈췄다.
혹시 그녀가 사라진 20년의 기억을 찾았나 싶어 긴장하던 찰나.
다이엔, 아니 해수는 눈앞의 여인이 친구와 닮아 놀란 상태였다.
그렇지만 그녀가 지안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다이엔이 된 해수가 중세의 불편함을 몸소 겪고 있을 때.
해수가 원한 일요일을 보내고 온 용희는 서점을 지나치고 있었다.
"이건-"
놀란 눈으로 다시 발길을 돌린 그.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이번에 나온 신간.
"붉은 머리카락, 녹색 눈동자. 어쩌면-"
딸랑.
서점에 들어온 그는 바로 책을 구매했다.
그 자리에서 책을 펼친 용희는 자신이 찾던 세상을 막 발견한 참이었다.
13
댓글
댓글
0
작성된 댓글이 없습니다.
작가에게 첫 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브런치에 로그인하고 댓글을 입력해보세요!
이야
직업
작가지망생
3,000자 내외의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주기적으로 내용을 수정할 수 있으니 감상에 참조 바랍니다.
팔로워
101
제안하기
팔로우
매거진의 이전글
사과를 알맞게 들일 수 있도록
신데렐라는 족욕으로 빠져나간다
매거진의 다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