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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는 족욕으로 빠져나간다

2023_이야챌린지_095

by 이야
임시 표지

'시련은 발 빠진 욕과도 같아 결국 벗어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오래 해도 족욕을 영원히 하진 않을 테니까. 그러니 좀 퉁퉁해도 맞는 신 정도는 찾을 수 있겠지.'


여기 신데렐라도 발견되는 세상에서는, 이렇듯 시련은 별 거 아니다.

끝내 맞이하는 결말이란 게 유일한 보상인 냥 굴어도 이 욕을 말릴 순 없는 법이다.

그리고 그게 더 마땅한 부름이라면 그에 어울리는 자가 되어주기로 했다.

깜빡-깜빡.


"이게 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미백 크림이라도 발랐던 걸까.

피부가 화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눈동자 크기도 달랐다.

생각할 여지는 하나, 빙의.

그녀는 몸의 주인을 추론하기 시작했다.

핑크빛이 감도는 금발의 머리카락.

그것과 비슷한 색감의 눈동자.


"만화 주인공인가?"


모습과 유사한 웹툰이 몇 개 떠올랐지만, 실사화로 보는 건 처음이다 보니 어떤 건지 영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 수 있었다.

이 여자의 직업.

하녀일 게 분명한 차림새.

그러나 이 누더기 속에서도 가려지지 않는 미모를 가진 점에서, 어쩌면 주인공일지도 몰랐다.


'소설 캐릭터에 빙의했다면 그럴 수 있겠지.'


거울이라 해봤자, 깨진 유리 조각으로 간신히 보는 처지지만 이것도 다 한때뿐.

다연은 혹시 모를 기대감을 가졌다.

생각과는 달리, 꿈도 희망도 없는 인물일 수도 있겠지만 우울한 생각은 애써 떨쳐낸 참이었다.

그때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처억.

복도에 서있는 상대방을 확인할 새도 없이 무언가 눈앞을 가렸다.


"걸레?"

"벨리샤! 네가 방에서 쉴 때야? 빨리 나와서 일해!"


걸레를 치우던 벨리샤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미친. 벨리샤?"

"지금 욕한 거야?"


벨리샤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벨리샤.

자신이 만든 신데렐라.

정확히는 신데렐라를 각색해서 쓴 글의 조연.

그리고 그 조연은,


"진짜 미쳤어…"

"뭐? 너, 너 언니랑 엄마 불러올 테니까 여기 가만히 있어!"


상대가 그러거나 말거나 벨리샤는 침음했다.

한때 자신이 어두웠던 시절.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신데렐라가 못마땅하여 바꾼 이야기.

그 흐름을 떠올린 그녀의 안색은 파리해졌다.


'왕자랑 결혼하고 행복할 줄 알았지? 아니, 이제 이 왕국은 제국에게 패하고 신데렐라, 아니 왕자비인 벨리샤도 같이 처형당하게 할 거야!'


과거 신나서 썼던 벨리샤의 파멸.

그런 벨리샤가 된 자신.


"미쳤네. 아, 왜 하필 이런 조잡한 세상에 빙의된 건데."


순간 벨리샤가 복수하려 벌인 일인가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고개를 흔들어 부정했다.


"이 저택에서 이런 취급을 받는다는 건, 아직 그때가 아니란 거야. 일단 무도회 전이면 가지 않으면 될 일이고, 후라고 하면-"


왕자가 들고 오는 유리구두.

왕국의 모든 귀족은 신어봐야 하니, 아무리 이 집안에서 하녀처럼 살고 있다 해도 피할 수는 없을 이벤트였다.

그러니 현시점이 부디 무도회를 하기 전이길 바라는 수밖에.

바닥으로 걸레를 던진 벨리샤가 고개를 들었을 때, 로잘린을 따라 올라온 이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벨리샤. 무도회에 데려가지 않았다고 시위하는 거니?"

"아. 이미 지났어?"


걸레를 만지지 않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넘겼다.

그 태도에 계모와 언니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 신발, 그거 부술 수도 없고-"


처형 피하자고 감옥에 수감될 수는 없는 법.

발을 당장이라도-

벨리샤의 고개가 땅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면 맞추겠다고 늘리거나 자르기도 했는데. 음."


영문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는 벨리샤.

계모는 제 딸들을 데리고 슬금슬금 물러섰다.


"어디 가요, 어머니?"

"누,누가 네 엄마야! 얘들아, 내려가자."

"아빠랑 결혼했으면 맞잖아, 엄마."


사뭇 다른 행동을 보이는 벨리샤에게 겁먹은 계모는 급하게 계단을 내려갔다.


"엄마! 얘, 손 봐줘야지!"

"로잘린, 내려오렴. 벨리샤, 네가 혹여 허튼짓이라도 한다면-"

"허튼짓? 뭐, 이런 거?"


툭-

벨리샤의 손이 가볍게 로잘린의 등을 밀었다.

계단 앞에 어정쩡하게 서있던 그녀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그나마 옆에 있던 캐서린이 재빨리 팔을 뻗어 사고는 막을 수 있었다.


"너, 네가 정녕 돌았구나?"

"히익-"


캐서린이 묻자 벨리샤는 바로 다리 한쪽을 들어 올렸고, 그것을 마주한 로잘린은 기겁했다.

다시 올라와 딸들 사이에 들어온 헤이젤 역시 놀란 얼굴로 벨리샤를 지켜봤다.


"심란하니까 건들지 마. 셋 다 이대로 계단 굴러서 절명하고 싶지 않으면."


피식.

멍한 얼굴의 그들을 보다 돌아선 벨리샤는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망가진 문을 복도로 내던졌다.

한편 머리채라도 잡으려던 캐서린을 말린 것은 헤이젤이었다.


"엄마, 왜…"

"그냥 내려가자."


낯선 눈빛이 마음에 걸린 계모는 딸들을 1층으로 이끌었다.

그들이 사라지자 진정으로 혼자가 된 벨리샤는 처량한 방을 못마땅하게 둘러봤다.

당장 저들과 방이라도 바꾸고 싶었지만.

중요한 것은 다른 데 있었으니 일단 옷가지를 바닥에 깔았다.


"생각 좀 해보자. 무도회가 끝난 이후 같으니, 며칠 안 있어서 왕자가 오겠지? 그리고 그때 그 유리구두에 절대 이 발이 맞게 해선 안 돼."


한참 고민하던 그녀는 곧 밖에서 들리는 빗소리를 인지했다.

그러다 문득 소설 속 내용이 떠올랐다.


"그녀의 기쁨은 저 소나기와 같았다. 잠깐 머물다 그칠 비로, 더는 젖게 해선 안 됐다. 자신은 결코 이 세상을 벗어나지 못할 테니 말이다."


벨리샤는 자신이 썼던 문장을 소리 내어 말했다.


"이제 곧 오겠네. 찾아야 해, 방법."


촉박한 시간 속 그녀는 간절히 기도했다.

벨리샤의 상태가 한껏 사나워진 그때.

계단을 노려보던 캐서린이 입을 열었다.


"하여간. 무도회 좀 못 갔다고 반항하는 거야, 뭐야."

"벨리샤, 그 애는 신경 쓰지 말고 우리끼리 티타임이나 갖자꾸나."


거실에 모인 그들이 우아한 허영을 즐기며 기분을 전환했다.


"무도회에서 왕자님이 워낙 빛나셨지~ 나랑 아주 잘 어울리는 멋진 분이었어."

"왕자도 너한테 마음이 있는 게 분명해. 같이 춤도 췄잖니."

"역시 그렇지?"


실상은 앞에 있던 여인들 몇몇과 잠깐 췄던 거지만.

그런 사실을 무시한 셋은 기막힌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똑똑.


"어머, 이 시간에 웬 손님?"

"왕자님이 보낸 게 아닐까?"


로잘린이 신나서 달려나갔다.

활짝 열린 문 너머, 개인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로는 눈부신-


"와,왕자님?"

"블라우스 자작 가문에 방문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희야말로 왕국의 작은 별을 보아 영광이나이다."


당황한 로잘린을 대신해 따라나왔던 캐서린이 인사를 건넸다.

이윽고 엄마까지 불러 왕자를 저택에 들이게 된 캐서린.

꼴깍.


"어떤 용무로 귀한 걸음, 주셨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헤이젤이 나서 묻자 왕자가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단 눈짓으로 신하를 보냈다.

그에 그들 사이에 들어온 신하는 왕자의 말을 전했다.


"이번 무도회에서 왕자님께서 만난 여인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저,저를요?"


힐끗.

로잘린을 살짝 본 신하는 계속 설명했다.


"이 유리구두를 신고 있던 아리따운 여인입니다."

"유리구두?"

"해서 영애들의 발을 살피고 있으니, 직접 신겨 확인해 보겠습니다."

"좋아요!"


로잘린이 먼저 발을 들이밀자 남모르게 눈썹을 구긴 신하가 유리구두 착용을 도왔다.


"어라, 이게 왜. 아니, 저한테 딱 맞네요!"

"뒤꿈치는 전혀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큽. 무슨 소리예요? 저랑 잘 어울리는데! 그렇지 않아요, 왕자님?"

"일단 다음 영애도 한 번-"


왕자의 지시에 신하는 바로 캐서린의 발을 확인했다.

하지만 역시나 맞지 않았다.


"언니는 한참 남네."

"발이 작은 편이라. 그럼 블라우스 가문에는 없네요."

"뒤의 여성분은?"

"엄마예요."

"그분이 아니고 저쪽-"


신하의 손짓에 뒤늦게 아차 한 벨리샤지만.

이윽고 당당히 현관을 나왔다.


"얘는 귀족가 영애가 아닌-"

"로잘린, 무슨 소리니. 우리 막내딸이잖아."


혹여 왕족 앞에서 거짓을 고한 것이 문제 될까, 헤이젤이 급하게 딸의 말을 막았다.

캐서린의 귓속말에 엄마의 뜻을 헤아린 로잘린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네."


발을 건넨 벨리샤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왕자를 바라봤다.

다미트 마이너스.

풀네임을 떠올린 그녀가 허벅지를 꼬집었다.

블라우스, 마이너스, 아주 마음대로 붙인 성이었다.


'황태자는 네코스 아디오스였나.'


한편 구두를 신겨본 신하가 말했다.


"맞지 않습니다."

"그렇겠죠. 벨리샤는 무도회에 가지 않았는걸요!"

"어째서 참석하지 않았죠?"

"애가 그날 어찌나 아프던지-"

"그럼 자작 가문은 아예 오지 못한 건가요?"


왕자의 질문에 일순 정적이 흘렀다.

오히려 입을 연 것은 벨리샤.


"제가 가라고 했어요. 저 때문에 엄마와 언니들이 축제를 누리지 못하는 게 싫었거든요."

"그렇군요. 왠지 그대는 맞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는데-"

"저도 아쉽네요, 정말."


인사하고 돌아선 그녀가 저택으로 돌아갔다.


'후, 다행이야. 족욕할 시간은 있어서.'


정확히는 발이 불거나 혹은 줄 때까지 담굴 정도의 여유였다.

나름 맞춰보겠다고 시간을 끌어준 덕분에 왕자비 루트를 피할 수 있었다.


'좋았어. 이대로 왕국을 뜬다.'


어차피 3년 뒤에는 멸망할 나라.

제아무리 벨리샤의 고향이라 할지라도 자신과는 무관했고.

미심쩍은 눈길을 주던 신하가 혹 깨닫기 전에 도망가야 했다.


'혹시 모르니 자금을 빡세게 벌고, 바로 날아야지.'


순조롭게 용의자에서 벗어난 벨리샤는 조용히 웃음을 삼켰다.

모든 게 확실할 때를 위해, 발톱을 감추는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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