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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것이오!

2023_이야챌린지_098

by 이야
임시 표지

세준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며칠 전, 빈혈로 쓰러지고 난 다음이었을까.

그때부터 이오의 행동이 전과는 달랐다.

정확히 꼬집을 수는 없지만 미묘한 차이는 분명 존재했다.

그리고-


"헤어지자."


오늘, 이별을 고하는 그녀.

이미 예상하고 있어서일까?

생각보다 타격은 크지 않았지만, 그래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지난주 주말만 해도 사이좋게 데이트했던 우리.

그간 무리 한 그녀가 자신에게 질린 것일까.


"내가 더 잘할게. 데이트하자고 귀찮게 하지 않을게. 제발 다시 생각해 줘."

"그- 아냐. 그냥 이대로-"


결국 포기하고 돌아선 이오를 보자 안도한 한편.

자괴감이 들었다.

그는 알았다.

이 표정에 그녀가 약하다는 것을.

그녀와 어색한 관계가 이어진지도 벌써 이틀.

갈수록 아침 등교의 온도가 떨어지는 때.

멀찍이서 이오를 따라 걷던 세준은, 그녀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의 마음이 닿은 걸까?

어느새 우뚝 멈춰 선 이오가 세준을 돌아봤다.


"구세준. 너는 이제 차세준이야. 널 최고의 배우로 만들어줄게."


얼빵한 소리가 절로 나왔다.

갑작스러운 이오의 말에 세준의 눈이 커졌다.


'얼마 전에 내가 연기 연습하고 있는 걸 본 건가? 설마 그래서-'


헤어지자고 했던 걸까.

그녀의 마음을 오해한 세준은 그렇게라도 이오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그래서 자신만 믿으라는 이오를 보며 미소를 지었지만.

곧 그의 입가가 굳었다.

정문을 지나 운동장을 바라보는 이오의 눈빛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원대한? 설마- 다른 사람을'


미처 뒷말을 생각지 않았다.

혹 정말 그럴까 봐.


'아냐. 그럴 리 없잖아. 접점이라곤 같은 반이란 것밖에-'


그러나 그의 마음은 하염없이 추락했다.

자신이라고 뭐가 다를까.

이오의 옆얼굴을 보던 세준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이젠 다른 것도 생겼잖아.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자.'


바람에 흔들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처럼, 자신도 같이 흔들렸지만.

애써 떨쳐낸 세준이 곧 교내로 들어가는 그녀를 따라 이동했다.

이번에는 전보다 가까워진 거리로.

며칠 후.

형식적인 관계로 자신을 대하는 이오였지만, 세준은 굴하지 않았다.

자신이 봐야 할 오디션 목록을 건네주는 동안에도.

그리고 합격하기 위해 연기를 연습할 때에도.

그녀는 곁을 지켜주었으니까.

내심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그였지만.

그날은 평소와 달랐다.


'원대한이랑 이오-'


속이 시끄러웠다.

불안감이 엄습해왔지만, 차마 저 사이로 끼어들 수 없었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걸까.

궁금했지만, 엿듣고 싶지 않아 그대로 돌아섰다.


'이것마저 연기할 줄은 몰랐네. 괜찮은 척.'


도저히 학교에 있을 수 없던 그는 조퇴했다.

곧장 도착한 집.

침대에 누운 세준은 불편한 마음을 달랬다.

그리고 겨우 잠에 들었을 때.

바뀐 세계선의 과거가 작동했다.


"헉- 백이오!"


놀란 얼굴로 상체를 세운 그는 자신의 손을 쳐다봤다.

조명이 위태롭게 쏟아지던 때.

그녀를 구하려 달려나간 자신.


'구했을까?'


마지막 기억이 흐릿했다.

분명 이 품에 그녀를 안았던 것도 같은데.


"맞아. 차이가 있는 것 같아."


먼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그는 최근 겪은 일과 대조했다.

일단 이때쯤 자신은 연기를 하지 않은 건 분명했다.

부모님이 반대하던 일.

그에 반항하여 할 자신이 없었던 그.


"옛날보다 빠르게 시작했어. 게다가 이오랑 헤어진 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머리가 울렸다.

두통에 이마를 짚은 그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막아야 해. 아버지 보증."


친구를 위해 했던 빚보증.

그리고 그것은 집안을 망가뜨리는 첫 단추였다.

또, 자신이 이오에게 이별을 말할 수밖에 없던 이유이기도 했다.


'전처럼 쓸 수 있는 돈이 없어졌으니까-'


매번 이오가 내주는 게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좋아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자신이 초라했다.

끝내 헤어지자고 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유조차 모르고 차인 이오는,


"당연하네."


분명한 업보.

세준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짧게 피어올랐다.


"일단 아버지부터 말려야겠지."


다행이었다.

아직 그 일이 일어나기 전이라는 것이.

행동에 옮긴 그는 아버지에게 당부했다.

처음에는 아들의 말을 듣지 않던 그도, 여러 번 반복되자 신경 쓰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친구가 손을 내밀자 미안하긴 했지만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기어코 욕까지 들으며 관계가 끊겼지만.

한편 무사히 집안을 지켜낸 세준은 어느새 가까워진 둘을 봐도 전처럼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했다.


'저 둘이 사귄다는 소식은 워낙 유명했으니까.'


이름난 엔터 대표와 국가대표의 만남이다.

세간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일.

놀라울만치 고요한 그는 덤덤했다.


'하긴. 괜찮지 않았으면 계약 못 했겠지. 뭐, 원대한은 아직 날 견제하는 것 같았지만.'


지난 시간만큼 희미해진 감정이었고, 희석된 사랑이었다.

하지만 가끔은,


'만약 이오도 돌아온 게 아니었다면- 이 상태에서 계속 만났으면 좀 달랐으려나.'


허황된 생각이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돈이 절실해 바쁘게 살았던 지난날.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청춘은, 이오와 만났던 때였으니.

그 찬란했던 날만이 과거의 모든 것이라 말할 수 있었다.


'연극일도 어느 정도 안정을 찾고 시작한 거니까-'


결국 돌아 선택한 일은, 어릴 적 꿈.

이제는 그 시기를 앞당겼다.

이오 덕분이기도 하고, 자신도 이 일을 계속하고 싶었다.


"차세준, 집중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색했던 예명에 그가 바짝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오히려 본명이 더 낯설 지경.

실제로 누가 자신을 구세준이라 부르면 대답하는 게 느렸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도서실에서-'


다시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세준을 지켜본 이오가 손뼉을 쳤다.

그제야 비로소 제대로 현실에 돌아온 그.


"이렇게 해서 최고는커녕 배우 되기도 어려워."

"미안. 잘할게."


안일했던 자신의 상태를 파악한 세준이 뒤늦게 자신의 말을 지켰다.

연습이 끝난 후.

동아리실에 방문한 사람은 대한.

이오를 데리러 온 그였다.

그는 알까.


'원래라면 한참 후에나 만났을 텐데. 이오가 앞당겼어.'


확실히 이전과는 다른 행보.

다시 쓰는 인생은 더욱 특별했다.

복도를 지나 도서실에 도착한 세준은, 주변을 둘러봤다.

오늘도 창가 자리에 앉은 학생이 보였다.

하은주.


'같은 학교였을 줄이야.'


1학년.

한 학년 아래.

그 후배는 훗날 드라마 스태프로 자신을 찾아온다.

그녀가 원대한의 사인을 요청하던 게 떠올랐다.


'그날 사고가 나서 결국 못 받았네.'


세준은 망설임 없이 챙겨온 노트를 펼쳤다.

찌이익.

한 장 뜯어낸 그는 그녀의 곁을 찾았다.

의아한 얼굴로 올려다보는 그녀.

펜을 꺼낸 그가 스윽 종이에 무언가를 그렸다.


"내 사인이야."

"…?"

"유명해질 예정이거든. 아마도 국가대표보다 더- 멋진 국민배우로 성장할 생각이야."


남자의 설명을 들은 은주는 눈살을 구겼다.

딱 보아도 '어쩌라고?' 되묻는 낯.

사인 종이를 그녀에게 선물한 세준은 이내 자리를 떠났고.

갑자기 쓰레기를 손에 넣게 된 은주는,


"뭐야. 저 또라이는?"


명찰로 선배인 것을 눈치챘지만, 그런 건 전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멋들어지게 그려진 사인이 꼭 그를 닮았다.


"우리 학교에 잘생긴 또라이가 있다니."


버릴까 했지만.

자신 있게 웃어 보이는 그 미소가 왠지 모르게 머리에 박혔다.

꼭 해낼 것처럼, 당당한 태도는 그녀의 마음을 톡 건드렸다.

자신의 꿈을 그렇게 확신할 수 있다면.


"다음엔 내가 사인을 줘야겠네. 나도 스타작가가 될 거니까!"


만만치 않은 기질을 가진 은주가 종이를 고이 접어 자신의 노트에 챙겼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사인을 만들어냈다.


"흠. 일단 지금 쓰고 있는 극본에 집중해야지."


나중에 줄 생각으로 잘 챙겨둔 그녀는, 자신의 시나리오에 집중했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꿈에 닿기 위한, 가장 아름다운 청춘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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